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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224화 (224/1,329)

제2화 누구나 자신이 한 일의 대가를 치른다 (1)

불과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황 중이라 환자가 왜 자살을 시도했는지, 시간이 얼마나 경과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환자를 가장 먼저 발견해 응급실로 데려온 고경아가 창백한 얼굴의 이명희를 보며 눈가를 붉혔다.

“며칠 전부터 명희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어요. 마침 오늘은 명희와 제가 비번이라 얼굴이라도 볼 생각으로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아서 집에 찾아갔어요. 그런데 문이 열려 있는 거예요. 이상해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만…….”

끔찍했던 광경이 떠올랐는지 고경아가 울먹였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나마 제때에 이명희를 발견한 것이다. 동맥이 잘릴 정도로 스스로 손목에 깊은 상처를 내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깊게 자신의 손목에 자해를 했을까?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아직 이명희의 상태가 입을 열 정도도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사생활이었다. 의사라고 해서 함부로 물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신기동 교수도 이해가 되지 않는지 혀를 차며 입원을 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제야 간호사들이 잔뜩 피가 묻은 옷을 벗기고 환자복으로 갈아입혔다.

이명희의 집은 지방이었고, 보호자에게 아직 연락도 못했다. 고경아가 옷을 받아 들고는 정리를 했다.

최철한과 유석재가 김지훈의 등을 두드리며 묘하게 웃었다. 보면 볼수록 놀랍기만 했다. 혈관 수술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수술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그만큼 매 수술마다 집중을 했다는 말이었고, 생각 이상의 재능을 가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자식, 대단해. 니가 사람 하나 살렸어.”

“아닙니다, 선생님.”

“아니긴, 인마. 나나 석재한테 걸렸으면 최소한 손목에 문제는 생겼을 거다. 석재야, 안 그래?”

“에이! 선생님 말이 다 맞는데 기분이 왜 이렇죠? 이러다 이 자식한테 정말 추월당하는 거 아닐까요?”

유석재의 말에 최철한이 씨익 웃었다.

“앞으로 교수님들께 우리 트레이닝 끝날 때까지 수술 주지 말라고 말씀드리면 되지, 뭐. 잘난 게 죄다.”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었다.

이명희의 사정이야 어쨌든 일반 외과 전공의로서 최선을 다했고, 최고의 결과를 얻었다.

다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응급실을 나서려는 순간 급히 달려온 고경아가 김지훈의 팔을 잡았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왜 그래요?”

고경아가 피 묻은 한 장의 편지를 건넸다. 이명희가 남긴 유서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편지를 읽던 김지훈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어금니를 물었다.

‘이건 아니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최철한과 유석재는 물론 신기동 교수까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이 다른 말도 없이 신기동 교수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잠시 후, 다들 어이가 없다는 얼굴만 보였다.

정갑수와 사귄 지 6개월.

임신 16주와 중절 비용 30만 원.

중환자실에서 빼돌린 데메롤 투여.

신기동 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임신과 이별은 개인적인 문제였고, 함부로 관여할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데메롤은 그렇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마약성 진통제인 데메롤은 중독성이 강해 엄격한 관리를 받는 약품이었다. 불가피하게 데메롤을 투여한 환자들 중에서도 중독된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정갑수가 이명희를 이용해 데메롤을 빼돌려 자신에게 투여한 것이다. 허위 기록을 넘어서는 중대하고도 심각한 사안이었다.

신기동 교수가 최철한을 보았다.

“지금 징계 위원회가 열리고 있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일단 가 보자. 이대로 넘어갈 일이 아니다.”

신기동 교수와 함께 모두 징계 위원회가 열리는 별관 지하 회의실로 달려갔다.

김지훈이 분에 못 이겨 뒤따라오려는 고경아에게 오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좋을 일이 없었다.

이명희가 자살을 시도했던 그 시간에 징계 위원회가 시작됐다. 각 과 교수들 6명에 금경태 과장과 이혁민 교수까지 모두 8명의 위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구석에 앉은 정갑수가 초췌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심한 불안을 느끼는 것 같았다.

먼저 금경태 과장과 이혁민 교수가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곧 가장 심각한 사안인 허위 기록 문제가 거론됐다. 징계 위원장이 정갑수를 불렀다.

“정갑수 선생, 자네가 이 수술 기록지를 작성했나?”

“예, 선생님.”

“그럼 수술 기록을 고의로 누락시켰다는 사실도 인정하나?”

정갑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예,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좋아. 자리에 앉아 있어.”

모든 사실을 명확하게 확인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달린 일이었기에 처벌 문제는 신중하게 접근할 일이었다.

징계 위원들이 다양한 목소릴 냈다. 누군가는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했지만, 누군가는 가혹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정갑수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다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움직이기 마련이지. 미리 손을 쓰길 잘했어. 이렇게 되면 내 책임 문제는 자연스럽게 묻히겠군. 하긴 보사부 국장의 아들 문젠데 부담이 클 수밖에 없겠지.’

조용히 듣고만 있던 금경태 과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수련 취소라는 말이 갖는 부담 때문인지, 미리 손을 쓴 탓인지 자신의 책임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일단 우리 과 내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정갑수의 일은 명백합니다. 원칙대로 하면 수련 취소를 건의하고, 허위 기재 건까지 확실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환자와 합의를 했고, 본인도 충분히 반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쨌든 우리 병원에서 함께 근무했던 의사입니다.”

목이 타는지 금경태 과장이 물 한 잔을 마셨다.

“참 착잡합니다만, 제 입장에서는 수련을 취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면허 취소까지 된다면 너무 가혹한 데다, 만일 허위 기재로 인한 의료 사고가 외부에 알려진다면 병원의 위상도 크게 떨어질 겁니다. 더구나 정한득 국장이 아버지라는 사실도 감안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들을 참작하시면 좋겠습니다.”

징계 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경태 과장의 말이 기폭제가 된 것처럼 그들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단 한 명만이 반대를 할 뿐이었다.

중립적 위치에 선 위원장이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가급적 만장일치를 원했다.

회의가 점점 길어지자 위원장이 이혁민 교수에게 물었다. 정갑수의 수련을 관장하는 일반 외과 교수이자, 누구보다도 원칙에 철저한 이혁민 교수가 대세에 따른다면 한 명의 반대 정도는 무시해도 좋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혁민 교수님은 특별히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금경태 과장이 매서운 눈초리로 이혁민 교수를 보았다.

처음에는 환자 문제만 해결된다면 물러설 것 같았다. 하지만 수련 취소로 끝내자는 말에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했다. 징계 위원회가 열리기 직전까지 설득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지금 확실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제이, 제삼의 정갑수가 또 나온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짐작은 했지만 정말 원칙에 위배되는 일은 단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 교수, 계속 고집을 부리면 정말 곤란해.’

‘과장님, 원칙은 지키라고 있는 겁니다.’

어떤 결정이 나든 원칙을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눈빛을 굳힌 이혁민 교수가 일어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금경태 과장의 바람과는 달리 강경한 말을 쏟아 냈다. 마지막으로 한 말에 징계 위원들이 흠칫거렸다.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기에 최선을 다해 거짓 없이 치료에 임해야 합니다. 불행히도 정갑수는 그 부분을 어겼고,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원칙입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금경태 과장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이혁민 교수를 보았다. 자칫 자신의 책임 문제까지 불거질 수도 있었다.

정갑수의 눈은 분노로 번들거렸다.

의외로 회의가 길어졌다. 금경태 과장을 비롯해 징계 위원들이 분분히 병원 내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강하게 개진했다. 하지만 이혁민 교수는 뜻을 꺾지 않았다.

원칙은 반드시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정갑수가 이번 일까지 피해 간다면 그 결과는 결국 환자들의 피해로 이어질 것이 뻔했다. 그간의 정갑수를 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운 지 오래였다. 중립적인 위치에서 원만하게 회의가 끝나기를 바랐던 징계 위원장까지도 결국 부담을 떨치지 못했다. 금경태 과장과 정한득의 위세는 생각보다 강했다.

“좋습니다. 이만큼 의견들을 나눴으니 이제 결정을 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만장일치로 결정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의견이 다르니 투표로 결정하겠습니다. 그럼 정갑수의 수련 취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금경태 과장이 힐끗 이혁민 교수를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 남은 징계 위원 일곱 중 6명이 손을 들었다. 불안에 떨던 정갑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직 이혁민 교수만이 착잡한 표정으로 손을 들지 않았다. 징계 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여덟 명의 위원들 중 일곱 분이…….”

그때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심상치 않은 표정의 신기동 교수와 여기저기 피가 묻은 가운을 입고 있는 전공의들이 보였다. 그 뒤로 정한득이 초조한 표정으로 금경태 과장을 보고 있었다.

웬만한 일로는 신기동 교수가 이런 자리에 얼굴을 들이밀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금경태 과장이 인상을 썼다.

“신 교수, 지금 회의 중인 거 안 보여?”

“알고 있습니다, 과장님. 저도 그 때문에 왔습니다. 이 교수, 이것 좀 봐야겠어.”

의아한 표정을 짓던 이혁민 교수가 신기동 교수가 내미는 이명희가 남긴 편지를 받아 들었다. 이혁민 교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거 유서 아닌가? 환자가 중환자실 간호사라고? 괜찮아?”

“요골 동맥이 반쯤 잘렸지만 다행히 살렸어. 걱정하지 말고 이 문제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어.”

“정말 다행이네. 정갑수, 어떻게 이런 짓까지.”

이혁민 교수가 정갑수를 노려보며 피 묻은 편지를 징계 위원들에게 보였다.

징계 위원들이 신음을 터트렸다. 금경태 과장이 눈을 감은 채 연거푸 한숨을 터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일이 터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정갑수를 계속 보호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정갑수, 이 자식이 정말 데메롤까지 건드렸다면 이렇게 지나갈 일이 아니잖아. 제길! 어떻게 해야 하지?’

유서로 남긴 한 장의 편지에 담긴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정갑수가 중환자실 간호사와 결혼을 약속했든 안 했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임신까지 했다고 쓰여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사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데메롤은 마약성 진통제로 불법 사용 시 형사적인 처벌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운이 온통 피로 젖은 전공의들의 모습을 보니 응급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바로 감이 왔다.

‘이건 완전히 내 손을 떠났어.’

금경태 과장이 슬며시 밖으로 나가 정한득을 만났다.

“정 국장, 아들 똑바로 키워. 데메롤까지 손을 댔어.”

“뭐?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어. 누가 그래?”

“들어와서 직접 확인해.”

모두들 정한득의 얼굴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징계 위원장이 말없이 신기동 교수가 들고 온 편지를 내밀었다. 다행히 중환자실 간호사가 살았기에 망정이지, 유서가 될 뻔한 글이었다. 편지를 읽은 정한득이 소리를 질렀다.

“이건 아무런 증거도 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사귀다가 헤어진 문제로 앙심을 품고 이럴 수도 있는 일이 아닙니까? 멀쩡한 내 아들을 데메롤 중독자로 몰다니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갑수야.”

정한득이 소리를 치자 정갑수가 급히 달려왔다.

‘개 같은 년! 날 아주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이걸 어떻게 하지? 그래, 증거가 없어. 아버지 말대로 그냥 앙심을 품고 한 짓이야.’

편지를 읽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극도의 흥분을 불러왔다. 이를 바득바득 갈던 정갑수가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그년이 날 모함한 겁니다. 난 절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배 속에 있는 게 내 애인지도 모른다구요. 이 씨발! 그 개 같은 년이 날 모함한 거야. 맞아. 아버지, 과장님, 난 몰라요! 모른다구!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주변에 누가 있는지, 어떤 자리인지도 잊은 것 같았다. 너무도 어이없는 행동에 모두들 놀란 눈으로 정갑수를 지켜볼 뿐이었다.

정갑수는 숨도 쉬지 못했다. 눈에서는 광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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