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22화 (222/1,329)

제1화 도대체 넌? (1)

정한득을 바라보는 금경태 과장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제길! 걱정은 했지만 이놈하고 계속 같이 가다간 병원장이 아니라 도리어 바닥으로 떨어지겠군. 서로 이용하는 일도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어.’

“정 국장,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정갑수 살린다고 나섰다간 나도 죽을 수 있어. 더구나 이번엔 누가 나선다고 해도 방법이 없는 일이야. 날 원망하기 전에 자식 놈을 그렇게 키운 자넬 원망해.”

“금 과장,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나 보사부 국장 정한득이야. 그걸 잊었어?”

“보사부 국장? 정한득, 그렇게 힘이 있으면 징계 위원회에 누가 참가하는지 알려 줄 테니까 네가 나서서 이 문제를 수습해. 너 같으면 내 자식 일로 네 목을 걸겠어?”

애먼 말을 했다가 정갑수의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시비를 걸 정한득이었다.

되지도 않는 일에 어설프게 손을 대느니 이참에 관계를 끊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정한득은 출세를 위해 만든 많은 발판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냉정한 눈빛으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정갑수 문제는 완전히 끝났다는 표정이었다.

정한득의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금경태, 니가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너는 무사할 것 같아? 내 아들을 살리지 못하면 너도 죽는 거야.’

“금경태, 좋아.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야겠어. 넌 신동석에게만 필요한 패지만, 난 신동석과 진편호 회장에게 모두 필요한 패야. 그리고 내 뒤엔 장관님까지 계셔. 내가 어떤 식으로 나가든 난 살 구멍이 있지만 네겐 없다는 뜻이지.”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그동안 자네와 나 사이에 오간 말과 행동만 얘기해 주면 끝이지. 별게 있겠어. 진평호 회장이야 어차피 저울질 중이니까 미련이 없을 테고, 신동석은 어떨까? 지금처럼 계속 네게 힘을 줄까? 나 같으면 아마 바로 그 자리에서 버릴 거야.”

전세가 역전됐다. 금경태 과장이 정한득을 보며 지그시 이를 물었다.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생각하며 계산에 몰두했다.

정한득은 아들의 장래를 포기하면 되지만, 금경태 과장은 자신의 미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의사로서의 생명이 끝나지는 않겠지만, 금경태 과장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저울이 기울었다. 하지만 정갑수가 치러야 할 대가는 분명했다. 그마저 막으려 했다가는 금경태 과장의 이력에 치명적인 오점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흐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갑수 처벌 문제를 잘 이용하면 내 책임은 저절로 묻힐 수도 있겠어. 오히려 이게 낫겠군.’

“좋아. 허위 기록 문제는 반드시 내가 막아 주지. 하지만 정갑수의 수련은 포기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 전에 먼저 환자의 입을 확실하게 막아야 할 거야.”

“그건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금경태 과장의 입가가 말렸다.

‘미친놈. 자식 놈 일이라면서 손해는 안 보겠다?’

“내가? 무슨 수로? 환자가 의료 기록을 요구하면 그대로 복사를 해 줘야 해. 수술 기록지가 두 개야. 하나는 정갑수가 허위 기록을 한 거고, 또 하나는 김지훈이 제대로 기록한 거야. 수술에 대해 전혀 몰라도 영어만 알면 그냥 드러나게 돼 있어. 지금 내 면허까지 내놓으라고 하는 거야?”

정한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김지훈? 그 자식은 뭔데 내 자식에게 일이 생길 때마다 거론이 되지? 제길! 수술 기록을 빼돌리라고 했다가는 더 난리가 날 테고.’

까닭 없이 치미는 화를 참으며 정한득이 물었다.

“환자의 입을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그걸 일일이 방법까지 알려 주어야 하나? 환자의 입에 돈을 쑤셔 넣든, 협박을 하든 그건 니가 알아서 해. 난 정갑수 문제가 병원의 손을 넘어 소관 부처로 가는 일만 막으면 끝이야. 더 이상 해 줄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정한득이 꿀꺽 침을 삼켰다.

“전문의가 되는 것은 포기해라, 이 말이지?”

“그럴 필요 있나. 군대 갔다 와서 다시 하면 되지. 물론 우리 병원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자네가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받아 줄 병원은 많지 않겠어?”

금경태 과장의 말에 정한득이 눈가를 좁히며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실력도 안 되는 정갑수를 본과 1학년으로 편입시키느라 꽤 많은 돈을 학교 재단에 지불했다.

수차례 유급을 당했지만 결국 의사를 만들었다. 정갑수가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정한득 자신의 노력과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식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금경태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동안 금경태 과장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일반 외과에 합격한 것도 미달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단이탈 역시 금경태 과장이 아니었다면 무사히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병원 내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정한득에게도 차원이 달랐다. 정갑수의 행위가 소관 부처에 오르고, 자칫 형사 재판까지 벌어진다면 국장 자리를 걸어야 할 수도 있었다.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들은 결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힘이 있어야 자식도 지킬 수 있었다.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대신 반드시 병원 내에서 막아.”

금경태 과장이 묘한 눈빛을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정한득을 옭아매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그럼 우리 관계가 지금보다 더 돈독해지는 건가? 허위 기록 문제는 형사 건이 될 수도 있고, 시효 기간이 그렇게 짧지는 않을 거야. 의료법이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거든. 물론 자네가 지금처럼 아들을 지키고 싶어 해야 하지만 말이야. 아! 잘못하면 자네 공직 생활에 영향을 줄 수는 있겠군.”

언제든 터트릴 수 있다는 은근한 협박이었다.

‘금경태, 누가 마지막에 웃는지 두고 보자.’

정한득이 웃으며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도 잘해 보자구. 자네 말대로 갑수가 군대 간다고 해서 우리 관계가 끊어질 일은 없겠지. 내가 보사부에 있고, 자네가 병원에 있는 한은 말이야.”

“서로 돕고 사는 게 친구 아닌가.”

금경태 과장도 웃으며 정한득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럼 잘 있게.”

정한득이 나가자마자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재수 없는 놈. 죽은 자식 불알을 만진다고 살아나나?”

어쨌든 정갑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혁민이라는 벽을 넘어야 했다. 또한 자신에게 물을 수 있는 책임도 확실하게 막아야 했다.

금경태 과장의 이마에 깊은 주름살이 패였다.

‘제길! 그간 교수들에게 들인 공을 고작 이따위 일을 처리하는 데 써야 하나?’

그 시간, 정한득 역시 이를 갈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식 문제로 금경태와의 관계가 완전히 변한 것이다.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던 금경태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금경태, 역시 잔머리는 좋아. 하지만 인생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을 거야. 그나저나 얼마면 환자의 입을 막을 수 있지?’

돌아가는 내내 정한득의 머릿속에 환자에게 얼마를 주어야 하는지만 맴돌았다.

***

월요일 아침, 정갑수는 숙소에 틀어박힌 채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금경태 과장은 물론 교수들도 정갑수를 찾지 않았다.

게다가 금경태 과장과 이혁민 교수가 매우 불편한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분위기가 살벌할 정도였다.

회진을 끝낸 직후, 이혁민 교수가 치프들을 불렀다.

“곧 정갑수의 수련이 취소될 거다. 그러니까 남은 이 주 동안은 지금 인원으로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알고 힘들더라도 최선을 다해라.”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은 신현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이 정갑수가 일으킨 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자 신현수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누굴 탓하겠어. 차라리 잘됐는지도 몰라.”

없느니만도 못한 정갑수였지만 어쨌든 손이 하나 사라졌다. 초비상이 걸렸다. 1년차가 또 둘이 된 것이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아무리 뛰어나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젠 다른 병원에서 불러올 1년차도 없었다. 결국 픽스턴들이 1년차의 일의 일부를 대신하기로 결정을 했다. 아직 전공의 일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픽스턴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픽스턴들 역시 인턴이 해야 하는 일까지 해야 했다.

하루 종일 뛰어다는 일이 다시 시작됐다. 불과 나흘 만에 김지훈과 신현수의 얼굴이 꺼멓게 죽었다.

“선생님, 이건 차팅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님, 이 환자 치료는 어떻게 하죠?”

“선생님, 응급실 기록은 이렇게 작성하면 됩니까?”

유석재가 수시로 교육을 시켰지만 픽스턴들은 1년차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해 댔다. 머릿속으로는 당연한 일이라고 이해를 했지만 몸이 너무 힘들어 짜증이 날 정도였다.

정갑수의 일로 외래는 물론 의국 분위기까지 뒤숭숭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간이 남은 사람들의 일이었다. 김지훈이나 신현수나 정갑수의 정 자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지만, 만약 손일석에게 비슷한 일이 생겼다면 어땠을까? 아마 일을 못할 정도로 걱정을 했을 것이다. 아니,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했을 것이다. 정갑수는 인심을 잃어도 너무 잃었다.

‘정갑수, 넌 사고를 치나 안 치나 똑같은 놈이다. 누가 널 동정하겠어?’

가끔 재수술을 한 환자를 볼 때마다 김지훈이 욕을 해 댔다.

어느새 주말이 다가왔다. 이제 오전 일과를 마쳤을 뿐이었다. 토요일이라고는 하지만 주말도 결코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체력 하나는 자신했던 김지훈마저 혀를 빼물었다. 신현수는 거의 죽음 직전이었다.

“현수야, 이러다 2년차 되기 전에 죽겠다.”

신현수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으응! 그럴 것 같다. 일석이는 어때?”

“아까 보니까 이제야 간신히 목을 가누고 걷더라. 미안해 죽으려고 하던데 어쩌겠냐.”

지난 6일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마침 의국에 아무도 없자 김지훈과 신현수가 거의 동시에 쓰러지다시피 책상에 엎드렸다.

김지훈이 중얼거렸다.

“수술 기록지는 다 작성했어?”

“몇 개 밀렸는지 나도 모르겠다. 넌?”

“뭘 물어봐. 뻔하지.”

천하의 김지훈과 신현수가 1년차에게 가장 중요한 일까지 제때에 하지 못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삼 년차에 죽도록 맞아도 아얏 소리 하지 못할 일이었다.

술에 취한 것처럼 웅얼거리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나란히 엎드려 코를 골고 있었다.

한참 후, 의국에 들어온 최철한과 유석재가 고개를 저으며 앞에 앉았다. 1년차가 절반이나 부족한 상황에 유석재의 얼굴에도 피곤이 잔뜩 묻어 있었다.

“선생님, 깨우기가 참 그렇네요.”

“조금 더 자게 놔둬. 정갑수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린지 모르겠다.”

“참! 이따 오후에 징계 위원회 열린다고 하던데요. 연락 받으셨죠?”

“응. 아뻬 환자 수술 기록지 확실하게 챙겨서 징계 위원회에 내려 보내. 수련 취소가 거론되는 일이 처음이라니까 징계 위원회에 참석하는 선생님들도 최대한 신중을 기하겠지?”

유석재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어쩌다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는지 모르겠네요. 아버지가 국장이고, 과장님이 무단이탈 건까지 무마시켰으면 정신 차리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배경이 좋으면 뭐해? 지가 스스로 똥통에 빠지고 있는데.”

“에휴! 그러니까 더 답답하죠. 그나저나 의료 사고와 허위 기록이 맞물리면 형사 재판 사유까지 된다는데, 설마 면허 취소까지는 안 되겠죠?”

“아마 안 될 거야. 소문 못 들었어? 환자하고 이미 합의가 된 데다 면허 취소는 실형이 나와야 돼. 누가 총대를 메고 고발을 하겠어? 그랬다가는 정갑수 아버지가 평생을 쫓아다닐 거다. 인생 심하게 피곤해지는 거지.”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본 유석재가 가만히 김지훈을 보다 밖으로 나갔다. 그간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자면 잘수록 해야 할 일이 점점 더 밀리겠지만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그래. 둘 다 더 자라.”

신현수가 엎드린 채 코까지 골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구내방송에서 김지훈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1년차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 윗년차들이 가끔 방송을 했다. 특별한 사유 없이 늦게 받으면 욕이 한 바가지는 쏟아질 것이다.

잠결에 손을 뻗어 주섬주섬 전화기를 잡은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송에서 자신을 찾는 곳의 전화번호를 못 들은 것 같았다. 0번을 눌렀다.

“김지훈입니다. 어디서 날 찾는 거죠?”

(외부 전화예요, 선생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몇 번 울리다 말고 누군가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저 경희예요.)

“경희? 웬일이야. 너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빨리 응급실로 가 보세요. 큰일 났어요.)

고경희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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