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21화 (221/1,329)

제11화 원칙 (3)

뒤늦게 연락을 받은 금경태 과장이 병원에 들어오자마자 이혁민 교수를 찾았다. 아뻬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합병증이 생겨 응급으로 수술을 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교수,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혁민 교수가 모든 일을 상세히 설명하며 말미에 김지훈을 언급했다. 금경태 과장이 조금이라도 김지훈을 다시 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김지훈이 빨리 발견해서 그렇지, 파트가 다르다고 정갑수에게 맡겼으면 더 큰 문제가 생겼을 겁니다. 그 덕에 1차 봉합만 하고 소장을 자를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금경태 과장의 귀에 김지훈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집도의가 정갑수라고 해도 자신의 주관하에 한 수술이었다. 이번 문제는 금경태 과장 자신의 책임도 작지 않았다. 그나마 집도의를 자신으로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기껏 무단이탈한 걸 살려 줬더니 이런 문제를 일으켜?’

어이가 없는지 허탈한 얼굴로 입도 열지 못했다.

“이번 일은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징계위원회에 회부해야 합니다.”

“이 교수, 일단 찬찬히 생각 좀 하자구.”

“과장님, 이유야 어찌 됐건 무단이탈 건도 유야무야 넘겼습니다. 과장님을 속인 것도 모자라 허위 기록까지 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찌푸렸다. 정갑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대로 모든 일을 묻고 조용히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정갑수를 징계하다가는 자칫 자신에게도 불똥이 튀길 수 있었다.

“이 교수, 정갑수가 문제긴 하지만 이번 일을 공론화하면 우리 과 전체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일단 단단히 정갑수를 주의시키고 조용히 넘어가지.”

“안 됩니다. 이대로 넘어가면 정갑수는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를 겁니다. 무슨 짓을 저질러도 책임을 묻지 않는데 자기 잘못을 알겠습니까? 우리 모두 옷을 벗어야 할 일을 저지른다면 그땐 누가 책임을 집니까?”

금경태 과장이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자신의 기록에 오점을 남길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이혁민 교수를 설득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 교수, 솔직히 말해 내게도 책임이 일정 부분 있어. 꼭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어야 하나?”

이것이 바로 금경태 과장의 본심일 것이다.

이혁민 교수가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신장 이식에 이어 이번 환자의 문제까지 금경태 개인의 사적인 욕심을 앞세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과장님, 정갑수를 왜 싸고도시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처리하시면 과장님에게 더 큰 문제가 생길 겁니다. 그리고 환자에게도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미 배를 다시 열었고 코 줄까지 끼웠는데 뭐라고 말씀하실 생각이십니까?”

금경태 과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환자에게 솔직히 말하자구?”

“허위 기록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소장에 손상을 준 경위는 말해야지요. 아무리 과실이라고 해도 고의성이 들어가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일 아닙니까?”

“허어! 자네 일 아니라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지금 내게 책임을 묻는 거야?”

너무 몰아붙이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금경태 과장이었다. 도리어 정갑수를 싸고돌며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다. 아직 신동석 이사장의 의중도 모르는 상태였다. 최악의 경우 유야무야 처리될 수도 있었다.

이혁민 교수가 타협안을 제시했다. 전 같았으면 환자에 관한 한 결코 물러서지 않았겠지만 정갑수는 반드시 퇴출시켜야 했다. 금경태 과장의 문제는 다음이었다.

“환자에 관한 문제는 과실을 인정하고 적절한 보상을 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습니다. 단, 환자가 충분히 납득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정갑수 문제는 이해하거나 양보할 일이 아닙니다. 그놈은 결국 환자를 죽일 놈입니다.”

이혁민 교수가 환자 문제까지 일정 부분 양보를 했다. 이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였다. 금경태 과장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정갑수의 말을 들어 볼 필요도 있었다.

“알았네. 일단 내일 다시 얘기하지. 난 정갑수를 만나 보고 더 확실하게 상황을 파악해야겠어.”

“그렇게 하십시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던 금경태 과장이 외래에서 나오자마자 주먹을 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가뜩이나 주변 상황이 꼬이고 있는데 정갑수까지 돌이킬 수 없는 문제를 일으켰다는 생각에 치미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이 자식은 도대체 생각이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나한테 숨긴 것도 모자라 허위 기록까지 해? 죽일 놈의 새끼. 이혁민이 말한 게 모두 사실이면 넌.’

병동 의국으로 올라간 금경태 과장이 눈빛을 굳힌 채 정갑수와 독대를 했다. 두 장의 수술 기록지를 보며 꼼꼼하게 확인한 결과 빼도 박도 못할 일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지체 없이 징계위원회가 열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 일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갑수,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과장님, 잘못했습니다.”

“그걸 아는 놈이 일을 이따위로 벌여? 너 허위 기록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몰라? 왜 나한테는 노티 안 했어?”

사색이 된 정갑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무 문제 없을 줄 알았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고? 뚫린 입이라고 나오면 다 말인 줄 알아? 이 자식을 그냥.”

금경태 과장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정갑수가 고개를 푹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이제 와 죄송하면 뭐해? 옷이나 안 벗으면 다행인 줄 알아. 기껏 살려 줬더니 스스로 죽지 못해 안달이 났구만.”

금경태 과장마저 옷을 벗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최악의 경우 면허까지 박탈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정갑수에게 남은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과장님,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과장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순간 금경태 과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반 외과 전공의가 과장인 자신보다 아버지의 힘을 더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자식이 감히 내 앞에서 지 아버지를 찾아? 그동안 웃어 줬더니 내가 안중에도 없어? 이놈의 새끼를 그냥.’

정한득에게 쌓였던 스트레스가 폭발했다. 금경태 과장이 벌떡 일어나 온 힘을 다해 정갑수의 뺨을 때렸다.

짝! 짝!

정갑수가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다 시뻘게진 뺨을 잡고는 벌벌 떨었다.

“너 이놈의 새끼! 그 정도 나이를 처먹었으면 생각을 해. 생각을. 네 아버지가 나서면 병원 일이 그냥 해결되는 줄 알아? 싸가지 없는 새끼.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잘못했습니다, 과장님.”

“나가, 이 자식아. 내 눈에 보이지 말란 말이야!”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정갑수가 의국에서 나왔다. 금경태 과장이 의국 문이 부서져라 닫으며 외래로 내려갔다.

김지훈이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 의국 쪽을 보았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던 정갑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다 저 새끼 때문이야.’

정갑수가 김지훈 탓을 했다. 만일 자신과 금경태 과장이 수술을 들어갔다면 이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갑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개새끼. 고소해? 내 환자한테 문제가 생겼으면 먼저 나한테 연락을 했어야 하는 거 아냐? 이 씨발 놈아.”

잠시나마 정갑수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던 김지훈이 지그시 이를 물었다. 그렇게 찾을 때는 코빼기도 안 보였던 정갑수가 할 말이 아니었다.

“왜 말이 없어, 이 개 새끼야.”

정말 자기 잘못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걸까?

일이란 일은 다 쳐 놓고 남 탓만 하는 정갑수는 동정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욱하고 올라왔다. 김지훈이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며 일어섰다.

“넌 정말 의사가 돼서는 안 되는 놈이었어.”

그때 상황을 정리하느라 홀로 처치실에 있던 최철한이 스테이션으로 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정갑수, 정신 차려! 이 병신 같은 새끼야. 김지훈 탓은 왜 해?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고 책임을 져. 너 애야? 나이 먹은 게 아깝지도 않아? 어떻게 애 새끼가 창피한 걸 몰라.”

“뭐? 이런 씨발. 너도 똑같아, 이 개 새끼야!”

최철한의 눈이 돌았다. 같은 연차인 김지훈도 쌓인 게 많았다. 지지리도 말 안 듣고 뺀질거리는 아랫년차를 보는 것은 치프들에게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간호사들까지 있는 앞에서 욕을 해 대는 정갑수를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이 새끼가 아직도 똥오줌을 못 가리네. 그래. 오늘 둘 다 옷 벗자.”

최철한이 정갑수의 멱살을 잡고 의국으로 질질 끌고 갔다.

가운을 벗어 내팽개치며 넥타이까지 풀었다.

퍽! 퍽! 퍽! 와장창!

의자 넘어가는 소리에 뭔가 깨지는 소리까지 난리가 났다. 김지훈이 인상을 쓰며 급히 달려 들어갔다. 입만 산 정갑수였다. 최철한이 정갑수를 깔고 뭉갠 채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러다 일 난다. 정갑수 때려야 최철한 선생님만 손해야. 어휴! 그래도 다행히 얼굴은 안 때렸네.’

김지훈이 최철한의 가슴에 깍지를 끼고 억지로 둘을 떼어 놓았다. 최철한이 씩씩거리고 널브러졌던 정갑수가 버둥버둥 몸을 일으켰다.

“선생님, 그만하시죠. 이래야 선생님만 손햅니다.”

“김지훈, 이거 안 놔? 오늘 저 새끼 안 죽이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네가 일 치면 수습하려고 우리가 있는 줄 알아? 양심이 있으면 최소한 조용히 찌그러져 있기나 해, 이 개새끼야.”

정갑수가 완전히 당황했다. 최철한이 주먹까지 휘두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치프로서 의국 원을 대표해 몽둥이를 들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문득 의국에서 자신을 보던 금경태 과장의 눈빛이 떠올랐다.

등짝이 서늘해진 정갑수가 정신없이 숙소로 달려가 전화기를 붙들었다. 여기저기 연락을 한 끝에 정한득과 연결이 됐다.

“아버지, 빨리 와서 과장님 좀 만나요.”

“왜 그래?”

“문제 좀 생겼으니까 일단 병원으로 와요. 나 지금 동기 새끼한테까지 맞았어.”

“뭐야? 또 어느 놈이야? 당장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자 자신감이 생겼는지 정갑수가 이를 갈며 아버지만 찾았다. 전화를 끊은 정갑수가 머리를 감싼 채 숨을 헐떡였다.

오늘 벌어진 상황에 화만 치밀었다. 김지훈이 제때에 연락만 했어도 이런 문제는 없었을 것이란 생각만 들었다.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최철한을 용서할 수 없었다. 순간 옷을 벗으라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돌며 두려움까지 몰려왔다.

몸을 떨고 있으면서도 으드득 이를 갈던 정갑수가 가방을 뒤졌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였다.

주사기와 고무줄 하나, 그리고 주사제 하나.

“개새끼들.”

정갑수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간신히 금경태 과장과 통화를 한 정한득이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왔다.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웬만한 일로는 정한득 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정한득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금 과장, 갑수 목소리도 안 좋고 동기한테 맞았다는 소리까지 하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또 김지훈하고 일이 생긴 거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의료 사고에 허위 기록까지 겹쳤어.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선을 넘었어?”

“뭐? 의료 사고?”

정한득이 크게 놀랐다.

금경태 과장이 피곤한 듯 한참 동안 눈가를 문질렀다.

‘이혁민이 안 이상 이 문제는 잘못 처신하면 나까지 문제가 된다. 정한득이고 뭐고 일단 정갑수를 버리는 게 맞아. 제길! 소장을 찢어 먹었을 때 내게 말만 했어도 이런 문제는 없었잖아. 전공의 한 놈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야.’

“지난 목요일에 맹장 수술 하나를 줬어. 그때 정갑수가 실수를 했어.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내게 말만 했어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일이었네.”

금경태 과장이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는 결론을 얘기했다.

“일단 징계위원회에 넘길 수밖에 없어. 의료 과실뿐이라면 병원 차원에서 환자와 합의를 하고 큰 징계 없이 넘어가겠지만 이건 사고에 허위 기록까지 겹친 문제야.”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허위 기록이라는 말에 그나마 여유를 보이던 정한득의 표정이 돌변했다. 명색이 보사부 국장인데 이번 사안의 중대성을 모를 리 없었다.

“일단 수련은 끝났어. 환자가 허위 기록을 물고 늘어지면 형사 재판까지 갈 수 있어. 결과에 따라 면허 취소까지 가능한 사안이라는 건 자네도 잘 알잖아.”

“그건 안 돼. 어떻게든 병원 내에서 해결해야 돼. 자네가 반드시 막아야겠어.”

무릎을 꿇고 부탁을 해도 모자란 일인데 정한득의 말투는 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더구나 무리하게 일을 끌고 가다가는 금경태 과장도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였다.

‘자식새끼 살리겠다는 놈의 태도가 참 가관이군. 이런 상황에서도 네놈이 보사부 국장인 줄 알아? 게다가 내가 입어야 할 피해는 안중에도 없군.’

금경태 과장이 눈을 치켜떴다.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공연히 미래를 대비한답시고 정갑수 문제를 어설프게 처리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초래될 수도 있었다.

“맹장염 환자가 소장에 구멍이 나서 재수술까지 받았어. 그리고 만일 이걸 무리하게 덮었다가 일이 더 커지면 한둘이 책임지고 끝날 문제처럼 보여? 이런 사안을 어떻게 병원 내에서 해결을 해? 아무리 자식 일이라지만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이러면 안 되지.”

“금 과장, 왜 이래? 내 자식 일이야. 자네가 당연히 힘을 써야지. 병원 내에서 해결될 수 있도록 잘 막아. 만에 하나 일이 커지면 환자하고 소관 부서는 내가 막을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금경태 과장이 허탈하게 웃었다. 정한득이 그동안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피차일반이었지만 그래도 정한득의 목을 대놓고 요구한 적은 없었다.

어차피 먹고 먹히는 관계라면 먹힐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상은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을 기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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