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원칙 (2)
‘이 정도면 복막염 증센데 아뻬를 제거한 부위가 터졌나? 아니면 고름이라도 잡힌 걸까?’
수술 후 합병증은 언제 발생할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수술을 잘한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어쨌든 치료 중에 벌어진 일이기에 빠르고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면 문제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비상이었다.
김지훈의 노티를 받은 최철한이 다시 환자를 보았다. 역시 복막염을 강하게 의심했고 결국 주말 당직 교수인 이혁민 교수까지 나왔다.
“차트 갖고 와 봐라.”
수술 기록지를 봐서는 단순한 아뻬였다. 그런데 집도의가 정갑수였고 금경태 과장이 퍼스트로 기록돼 있었다.
“정갑수가 수술을 했어? 흐음! 일단 CT부터 빨리 찍자.”
이혁민 교수가 금경태 과장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그런데 급한 일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나가 연락을 할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난감한 일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정갑수를 찾았다. 수술을 한 정갑수가 환자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정갑수는 어디 갔나?”
안 그래도 복막염이 의심되자마자 정갑수를 찾았다. 그런데 어디에 숨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김지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감싸주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연락이 안 됩니다, 선생님.”
“뭐? 당직 1년차가 연락이 안 돼? 이노무 자식이. 최철한, 어떻게 된 거야?”
꿀 먹은 벙어리였다. 치프도 통제하지 못하는 1년차가 있다는 사실에 입을 열지도 못했다. 이혁민 교수가 대충 짐작을 했는지 최철한을 잠시 노려보다 고개만 저었다.
“참 말썽 많이 부리는 놈이네. 설마 정신 못 차리고 또 도망간 건 아니겠지?”
그걸 누가 알까?
답답한 시간만 흘렀다. 얼마 후 CT가 나왔다. 모두들 할 말을 잃었다. 고름 덩어리로 보이는 부분이 떡하니 보인 것이다. 이혁민 교수가 계속해서 금경태 과장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두세 시간이 지나도록 연결이 되질 않았다.
실질적인 파트는 명확하게 달랐지만 이혁민 교수는 지금도 금경태 과장 파트 소속이었다. 전에도 주말에 금경태 과장 환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대신 수술을 하곤 했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저으며 환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안녕하십니까. 이혁민입니다. 아무래도 수술 후 합병증이 생긴 것 같습니다. 지금 배 속에 고름이 잡혔는데 재수술을 해야 합니다. 과장님에게 급한 일이 생겨 제가 대신 수술을 바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환자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수술의 필요성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다행히도 불가피한 합병증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수긍했다. 평소 이혁민 교수가 회진을 도는 모습을 보며 신뢰를 가진 점도 다행이었다. 곧 수술 동의서를 받고 재수술에 들어갔다.
“김지훈하고 인턴만 들어가자. 철한이 너는 과장님에게 연락 오면 똑바로 노티하고 정갑수 빨리 찾아.”
“예, 선생님.”
수술 방으로 향하던 이혁민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정갑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김지훈이었다. 그런데 금경태 과장에게는 노티조차 하기 힘들다는 사실에 도리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놈의 돈과 알량한 권력이 뭐라고.’
김지훈을 보는 이혁민 교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떤 검사를 해도 수술 후 어떤 합병증이 발생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때문에 복부 하복부 정중앙을 10센티 정도 열어야 했다. 배를 열자마자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굉장히 드문 일인데 아뻬를 절제한 부위가 터졌나?”
이혁민 교수가 중얼거리며 수술 부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뻬를 절제한 부위는 깨끗했고 도리어 엉뚱한 부위에 고름집이 잡혀 있었다. 소장 말단 부위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름집을 제거하던 이혁민 교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뭔가를 집어 올렸다.
소장을 봉합할 때 사용하는 실 쪼가리였다.
“이게 여기서 왜 나오나?”
덕지덕지 붙은 고름을 제거하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정확하게 찾았다. 소장에 구멍이 나 있었고 봉합했던 실들이 다 풀려 있었다.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수술을 하다 말고 마취과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 이 환자 수술 기록지 좀 펼쳐 봐요.”
다시 한 번 꼼꼼하게 확인을 했지만 어디에도 소장을 봉합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당시 수술에 참가했던 금경태 과장과 정갑수만이 이유를 알 것이다. 그때 퍼스트를 서며 함께 수술 기록지를 보던 김지훈이 세컨을 서는 서도훈을 보았다.
“도훈아, 이 수술 네가 들어갔었네? 소장 봉합하는 거 못 봤어?”
서도훈이 움찔거렸다. 입단속은 했지만 소장 봉합에 관한 기록까지 빼먹을 줄은 몰랐다. 인턴의 생각으로도 이는 중대한 문제였다. 서도훈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봤습니다.”
“자세히 얘기해 봐.”
“정갑수 선생님이 아뻬를 확인하다가 소장에 손상을 줬습니다. 금경태 과장님이 들어오시기 전에 봉합을 했고 저희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서도훈의 말을 듣고 있던 이혁민 교수가 눈가를 좁혔다.
“그때 과장님이 확인을 안 했나? 확실히 얘기해라.”
잠시 머뭇거리던 서도훈이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갑수로 인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 어시스트를 섰던 것만으로도 책임을 느낀 것이다.
“과장님께 노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기억으로는 급한 일이 있으셨는지 아뻬를 제거한 후 마무리는 정갑수 선생님에게 맡기고 바로 나가셨습니다.”
다들 할 말을 잃었다.
모든 상황이 확연하게 보였다. 정갑수가 실수를 감추기 위해 수술 기록까지 고의로 누락시킨 것이다. 이혁민 교수가 주먹만 꽉 쥔 채 수술을 진행하지 못했다. 마스크에 가려져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눈빛만 봐도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혁민 교수가 입을 열었다.
“수술하자.”
다행히 수술 후 이틀 만에 발견한 덕에 소장을 절제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수술은 소장 천공 직후에 하는 수술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조직이 약해져 조금만 힘을 잘못 주어도 장이 찢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특히 퍼스트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다. 이혁민 교수가 신중하고도 확실하게 어시스트를 하는 김지훈을 보며 잠시나마 화를 삭일 수 있었다.
‘참 잘하네. 이렇게만 가자.’
염증이 심한 부위를 제거하고 건강한 부분을 다시 연결시켰다. 배 속을 깨끗이 씻어 낸 후 드레인을 박고 수술을 끝냈다. 김지훈이 환자를 깨우려는 마취과 전공의에게 부탁을 했다.
“선생님, 잠깐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코 줄을 끼워야 하는데 아무래도 지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소장 천공을 수술했다. 아뻬와는 달리 코 줄을 끼고 상당 기간 금식을 해야 할 것이다. 환자의 고통이 이만저만 가중되는 것이 아니었다. 제때 노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김지훈이나 이혁민 교수나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이혁민 교수가 평소와는 달리 보호자들에게 수술이 잘됐다는 말만 하고 의국으로 올라갔다. 소장 천공에 관한 부분은 금경태 과장과 함께 설명해야 할 부분이었다.
아직도 정갑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갑수 빨리 찾아라.”
이혁민 교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상황을 전해 들은 최철한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술 기록을 누락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갑수, 이 자식 정말 황당한 놈이네. 어떻게 그런 짓을 하지? 오자마자 사고를 치냐. 난리 나겠네.”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정갑수가 나타났다. 김지훈이 상황을 설명하자 사색이 됐다.
“야, 이거 어떻게 해야 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의국에 들어가 봐.”
입술이 바짝 마른 정갑수가 한동안 망설이다 의국으로 들어갔다. 이혁민 교수가 최철한은 물론 김지훈까지 들어오라고 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긴장이 가득했다.
“정갑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틀리거나 다른 점이 있으면 말해라.”
당장 펄펄 뛰며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는데 이혁민 교수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분위기가 삭막해졌다.
“예, 선생님.”
“아뻬를 제거하기 전에 네 실수로 소장이 찢어졌는데 과장님에게는 말도 안 하고 봉합을 했고 이후 노티도 안 했지? 여기까지 사실이야?”
정갑수가 고개만 푹 숙인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좋아. 다음. 수술 기록지에 소장 봉합을 누락시킨 것도 사실이지? 맞나? 아뻬를 절제한 것보다는 소장을 봉합한 게 훨씬 더 중요한 수술이라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을 테니 실수로 빼먹었다는 핑계는 대지 마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과 최철한을 보았다.
“김지훈, 오늘 수술 내용 상세하게 기록하고 철한이 너는 당시 수술에 들어왔던 간호사를 찾아 다시 한 번 확인해.”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정갑수, 잘 들어라. 네가 소장을 찢어 먹은 것까지는 의료 과실이고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네 행동이 과실을 의료 사고로 만들었다. 더구나 의료 기록을 허위로 작성했다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정식으로 징계위원회를 열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옷 벗을 각오해라.”
징계위원회도 모자라 옷까지 벗어야 한다?
김지훈과 최철한이 깜짝 놀랐다. 이혁민 교수는 아무리 화가 나도 허튼소리를 할 사람도 아니었다. 사안이 가볍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갑수가 눈을 부릅뜬 채 입도 열지 못했다. 이혁민 교수가 냉정한 눈으로 일어섰다. 하지만 정갑수를 보는 눈초리는 사납기만 했다.
“최철한, 외래에 있을 테니까 혹시 과장님에게 연락 오면 전화해.”
“예, 선생님.”
멀뚱멀뚱 이혁민 교수를 보던 정갑수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매달렸다. 어떻게든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여기서 막아야 했다.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을 줄 알았습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건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넌 의사가 가장 확실하게 지켜야 할 원칙을 깼어. 네 실수나 잘못을 감추기 위해 허위 기록을 하면 네 선에서 끝날 줄 알았나? 환자는 물론 네 동료들까지 모조리 피해를 입는 문제다. 비켜라.”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혀를 차며 매몰차게 외면을 했다.
김지훈과 최철한은 할 말이 없었다. 환자에 대한 허위 기록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힐끗 정갑수를 본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국을 나갔다.
‘후우! 노티만 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왜 능력도 안 되면서 소장을 봉합해. 정말 답답하네. 허위 기록은 또 뭐야.’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던 정갑수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0번을 누르며 외부 전화를 해 댔다.
‘빨리 좀 받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버지, 나 죽게 생겼다구.’
전화기를 든 정갑수의 손이 벌벌 떨렸다.
가슴이 답답해진 김지훈이 손일석과 이경석을 찾았다.
상황을 전해 들은 손일석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따위로 일을 하니 사고를 안 치고 배겨? 환자만 힘들게 됐네. 아니, 근데 능력도 없으면서 왜 노티를 안 했데. 지가 대단한 줄 아나 보네.”
“그러게 말이다. 이거 일이 커지겠어.”
이경석의 말에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경석이 형, 일이 커지는 정도가 아닌 것 같아요. 이혁민 선생님이 정갑수에게 옷 벗을 각오하라는 말씀까지 하셨어요.”
“뭐? 옷을 벗어야 한다고?”
손일석과 이경석이 서로를 보며 눈만 껌벅거렸다. 의사에게 허위 기록이 얼마나 무서운 행위인지 피부에 와 닿은 것이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않은 대가는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