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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219화 (219/1,329)

제11화 원칙 (1)

천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정갑수를 바로 보냈을 것이다. 어쩌면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것일지도 몰랐다.

‘으아아! 이건 날벼락이 아니라 재앙이다.’

김지훈이 피곤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정갑수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신현수도 멍청히 입만 벌리고 있었다.

좋은 예감은 틀려도 나쁜 예감은 잘도 맞는 법이었다.

불과 사흘 만에 대장 항문 파트가 난리가 났다.

이제 2주 남짓 남았다고 정갑수가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 대부분의 일을 서도훈에게 시켰고 그나마도 일 못한다고 태우기 일쑤였다.

“도훈아, 조금만 참아, 인마. 어차피 니들 중에 한 명은 정갑수와 만나게 돼 있잖아.”

“예, 선생님.”

서도훈이 거의 울상을 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정갑수가 와서 주중 당직 일을 조금은 덜었다. 대신 정갑수 당직 날은 픽스턴들이 죽어났다. 최철한과 3년차들이 수시로 불러다 경고를 하고 혼을 냈지만 그때뿐이었다.

정갑수가 아무리 용을 써도 빼도 박도 못하는 날이 있었다. 바로 금경태 과장이 당직을 서는 날이었다. 아뻬 하나 들어가면서도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며 의국에 있던 3년차가 쓴 입맛만 다셨다. 그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나 금경탠데 이번 아뻬 정갑수 수술 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시켜.)

당직 3년차가 급히 입을 열었다.

“과장님, 몇 시에 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저도 수술을 들어가야 해서 아뻬 수술에 들어갈 2~3년차가 없습니다.”

(뭐? 아무도 없어? 쯧! 그럼 정갑수하고 인턴만 들여보내.)

급한 일이 있는지 금경태 과장이 수술을 서둘렀다.

“정갑수, 과장님이 수술 주신다니까 준비하고 들어가.”

“예, 선생님.”

3년차의 얼굴이 좋지 못했다. 신현수에게 과하다 할 정도로 많은 수술을 주는 것도 불만이었다. 그런데 이제 정갑수에게까지 수술을 주고 있었다.

“서울에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수술을 주냐. 에이! 아버지 잘 타고난 놈들만 신나는구나. 보사부 국장이면 국장이지. 그러니 저 새끼 눈에 뭐가 보이겠어.”

전공의들 사이에서도 점점 불만이 팽배해지고 있었다.

수술실에 들어온 정갑수가 헤벌쭉 웃었다.

금경태 과장이 먼저 배를 열고 있으라는 연락을 한 것이다.

마취가 끝나고 자신 있게 배를 연 정갑수가 환자의 배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이 정도는 그냥 내가 해도 되는데. 어차피 오시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살짝 배 속만 확인해 볼까?’

간호사에게 롱포셉(long forcep:기다란 집게)을 달라고 한 정갑수가 아뻬를 찾는다고 장을 끄집어냈다. 염증이 심해 상당히 조심해야 했지만 정갑수의 눈에는 다를 바가 없었다.

거칠게 잡아당겨진 소장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졌다.

정갑수가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도훈과 간호사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마취과 전공의는 모니터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씨펄! 이걸 어쩌지? 과장님이 아시면 난리 날 텐데. 소장은 몇 번 실로 봉합을 하더라.’

실제로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보는 일이었다. 허구한 날 딴 짓만 하던 정갑수가 제대로 봤을 리가 없었다. 주변 눈치를 보며 고민하던 정갑수가 간호사에게 조용히 실을 달라고 했다.

“지금 봉합하실려구요?”

간호사가 주저하자 정갑수가 눈을 부라리며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빨리 실이나 줘.”

어쨌든 집도의였고 금경태 과장도 곧 들어온다고 했다. 있는 대로 인상을 쓰는 정갑수에게 은근히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간호사가 머뭇거리면서도 실을 건네고 말았다. 그나마 경험이 있는 간호사였기에 맞는 굵기의 실을 주긴 했다.

“인턴아, 입 꽉 다물어라. 간호사 너도 마찬가지야.”

마침 마취과 전공의도 일이 있어 잠깐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조용히 봉합이 시작됐다. 마음은 급하고 손은 따라 주지 않는지 정갑수의 이마에 땀이 흥건하게 맺혔다.

‘마취과 새끼가 오기 전에 끝내야 하는데.’

불과 0.5센티 정도 찢어졌기에 마취과 전공의가 막 들어왔을 때 봉합을 끝낼 수 있었다. 정갑수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문제없겠지. 이깟 수술이 뭐가 어렵다고,’

잠시 후 금경태 과장이 들어왔다.

“다 열었구나. 시작하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경태 과장이 수술을 도우면서도 자꾸 눈가를 찌푸렸다. 신동석이 개편안 문제로 부른다기에 드디어 결정을 내리는 줄 알고 바삐 이사장실을 찾았다. 그런데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원할 뿐 가타부타 답이 없었다. 뭔가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뭐지? 대체 왜 결정을 안 하는 거야. 전공의들까지 다 뽑았는데 이렇게 되면 배치 결정도 못하게 되잖아. 설마 내가 진평호 회장에게 선을 댔다는 사실을 안 걸까? 아니야. 예전하고 별반 다를 바 없이 만났으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할 텐데.’

심사가 복잡한지 금경태 과장이 자꾸 정신을 딴 데 팔았다. 하지만 금경태 과장 정도면 저절로 손이 움직이고도 남았다. 큰 무리 없이 수술이 진행됐고 곧 아뻬가 제거됐다.

“터지진 않았으니까 별문제 없겠다. 마무리 잘하고 끝내.”

금경태 과장이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아뻬가 확실하다고 해도 주변 구조물들을 확인하는 것은 필수였다. 그런 중요한 일을 정갑수에게 맡긴 것이다.

정갑수가 입을 벌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슬쩍 수술 부위를 벌리기만 해도 소장을 봉합한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 의외였다.

‘야! 나는 운도 좋아.’

정갑수가 좋아하며 배를 닫았다.

무난하게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가 회복실로 옮겨졌다.

수술 기록지를 앞에 둔 정갑수가 태연한 기색으로 소장 봉합 부분을 쏙 뺐다. 곁눈질을 하던 서도훈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인턴아, 내 말 잊지 마. 새나가면 죽어.”

“선생님, 그러다 문제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 새끼가 재수 없게. 문제가 생길 게 뭐가 있어? 인마. 그냥 꿰매면 저절로 붙어. 하여튼 넌 입이나 꽉 다물어.”

정갑수가 장담을 했고 그다지 걱정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아직 수술 기록의 중요성을 모르는 서도훈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뭔가 찜찜한데 무엇을 놓쳤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수술이 끝났고 환자도 별문제를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주말이었다. 김지훈과 정갑수가 주말 당직이었다. 역시나 정갑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응급실에 환자가 있을 때마다 나타나 엄한 소리를 하며 지랄을 해 댔지만 김지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정갑수, 이젠 일해라. 그러다 더 사고 친다.’

귀를 꽉 막고는 밀린 일을 하던 김지훈이 볼펜을 탁탁 쳤다. 하필이면 의국에 비치된 볼펜도 다 떨어졌다. 김지훈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매점으로 향했다. 볼펜을 사는 김에 응급실에서 고생하는 간호사들 생각에 주스 몇 개를 샀다.

응급실 문을 열고 들어선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몇 되지도 않는 환자를 두고 정갑수가 악을 쓰고 있었다. 간호사들의 얼굴에도 짜증과 신경질이 가득했다.

“이 환자 검사 결과는 왜 안 나와? 에이!”

“아까 나왔다고 했잖아요.”

“뭐? 그럼 확실하게 노티를 해야 할 거 아냐? 인턴아, 넌 뭐 해? 인마. 멍청히 서 있지 말고 저 환자 좀 봐.”

누가 보면 환자가 바글대는 줄 알 것이다. 슬쩍 차트를 보니 일반 외과 문제가 없는지 감별만 하면 되는 환자들이었다. 그것도 불과 네 명에 내원한 지 두 시간이 넘은 환자도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휴! 어떻게 지금까지 한 명도 해결을 못 했냐. 아예 능력이 없는 거야 아니면 환자 보기가 싫은 거야.’

김지훈이 주스를 내밀고는 돌아서려 하자 간호사의 눈빛이 간절해졌다.

“선생님, 한두 명만 해결해 주시면 안 돼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정갑수는 트레이닝 좀 시켜야 됩니다. 다행히 별문제가 없는 환자들이니까 조금만 고생해요.”

능력 없는 1년차 하나 때문에 고생하는 인턴과 간호사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대신 환자를 봐주기 시작하면 당연하게 여길 정갑수였다.

막 응급실을 나가려는 김지훈을 본 정갑수가 급히 달려와 당연한 듯이 입을 열었다.

“잘됐다. 김지훈, 환자 몇 명만 해결하고 가.”

“내가 왜?”

“어쭈? 이 새끼가 정말. 왜긴. 응급실이 바쁘면 수술 당직이 받쳐 주는 게 원칙이잖아, 인마.”

“맞는 말인데 하나도 바빠 보이지가 않네.”

‘1년차 다 끝나 가는 마당에 이걸 바쁘다고 해? 아주 지랄을 해라. 도훈아,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다.’

김지훈이 응급실을 쭉 둘러보고는 쓱 나가 버렸다.

“야! 김지훈. 환자 좀 보고 가. 어? 저 새끼가 정말 가네. 야, 이 개…….”

얼굴이 시뻘게진 정갑수가 차마 욕을 하진 못했다.

사람들 눈을 의식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모두 동기들이지. 정갑수 너는 빼고.’

정갑수에게만은 정말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욕을 해 대던 정갑수가 환자들을 서도훈에게 맡기고 밖으로 나갔다.

“개새끼. 넌 정말 가만 안 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꼬투리를 잡은 다음에 아버지에게 말하면 끝날 것 같은데. 후우! 저걸 어떻게 하지?”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이를 갈던 정갑수가 고개를 흔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 한 명이 커피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정갑수가 눈을 부라리며 사람이 없는 곳으로 여인을 끌고 갔다.

“야, 너 다른 데도 아니고 병원 안에서 날 아는 척을 하면 어떻게 해?”

“죄송해요, 갑수 씨.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나 바쁜 거 안 보여?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다음에 해. 서울에 올라온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신경 쓰이게. 쯧!”

정갑수가 짜증을 있는 대로 부리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거의 울상이 된 여인의 눈가가 붉어지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가 보낸 편지 받으셨죠.”

“봤어.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막말로 배 속에 있는 애가 내 앤지 다른 새끼 앤지 누가 알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지워.”

“갑수 씨,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그동안 했던 말은 다 거짓말이었어요? 천안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날 찾아와 일주일 동안이나 함께 있었던 건 다 뭐였죠?”

앳되기만 한 목소리가 거칠게 흔들렸다.

정갑수가 코웃음을 쳤다.

“야, 그게 나 혼자 한 일이야? 갈 데 없으면 오라고 해 놓고 무슨 헛소리야. 솔직히 내가 너 같은 애들 한두 번 본 줄 알아. 몇 번 만나 줬더니 이게 분수를 모르고 덤비네. 어휴! 말하는 내가 다 한심하다.”

정갑수가 짜증을 내며 지갑을 꺼냈다.

“30만 원이야. 이 돈으로 애 지워. 남은 돈은 네가 알아서 쓰고 다신 나 아는 척하지 마. 그리고 중환자실 간호사들한테 나 만난다는 소리 한 것 같은데 조심해. 난 너랑 사귄 적도 없어. 너도 엔조이한 거 아냐? 왜 이제 와 딴소리야.”

“갑수 씨!”

여인이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정갑수의 팔을 잡았다.

정갑수가 거칠게 뿌리치며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수 없게 왜 이래. 여기 병원이야. 참! 데메롤(마약성 진통제) 빼돌린 건 너니까 함부로 입 놀리지 마라. 하긴 네가 말한다고 해도 증거 하나 없는데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지. 이쯤에서 깨끗이 끝내고 다신 보지 말자.”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팔을 툭툭 턴 정갑수가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응급실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여인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정신없이 병원 밖으로 달려 나갔다.

김지훈은 오래간만에 잠을 좀 잤다. 덕분에 컨디션이 조금은 좋아져 오전 드레싱을 시작했다. 손일석과 이경석이 입원한 병실에 잠깐 들르자 둘 다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목은 좀 어때?”

“조금 나지긴 했어. 지훈아, 미안하다. 이놈의 목이 빨리 돌아와야 할 텐데 죽겠네.”

“그런 생각 말고 편하게 쉬어. 끽해야 일하다 죽기밖에 더 하겠어? 편하게 쉬어. 편히. 경석이 형도. 암! 편히 쉬어야지.”

김지훈이 송재덕 과장의 말투를 흉내 내며 웃었다.

정갑수 파트 환자의 치료는 하지 않았다. 깨지든 말든 상관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환자 한 명은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목요일 저녁 정갑수가 수술을 한 환자였다.

갑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며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지?’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드레싱을 하며 진찰을 했다. 수술 부위만이 아니라 우측 배 전체에서 강한 통증을 호소했다. 수술 후 통증이라고 보기에는 정도가 너무 심했다. 이리저리 환자의 배를 만지던 김지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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