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픽스턴(fixtern) (2)
그날 밤 응급실 당직이었던 김지훈이 서도진을 찾았다.
서도진이 1분도 안 돼 의국 문을 열며 소리쳤다.
“선생님, 찾으셨습니까?”
“응. 응급실 가자.”
이맘때면 극심한 피로와 졸음 때문에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런데 픽스턴인 서도진이 옆에 있어서인지 한결 몸이 가벼웠다. 어째 피곤까지 덜한 것 같았다.
‘이제 3주 남았단 말이지. 없던 힘이 다 생기네. 도진이 불쌍해서 어쩌나. 그래도 열심히 하면 보람도 크다.’
김지훈이 서도진을 힐끗힐끗 보며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서도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유를 묻지 못했다. 픽스턴이 감히 1년차에게 왜 웃냐고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단 1년이었지만 둘 사이의 차이는 그만큼 컸다.
더구나 김지훈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서도진의 눈에는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정도로 피곤이 심해 보였다. 음성에서부터 서울까지 김지훈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각오는 했지만 체력 하나는 끝내 준다던 선생님 얼굴이 정말 장난이 아니네. 설마 저렇게 꼬박 1년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서도진이 한결 좋아 보이는 손일석의 얼굴을 떠올리며 애써 불안감을 지웠다. 응급실로 들어가는 김지훈의 어깨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내과에서 아뻬인지 아닌지 감별해 달라는 환자였다.
김지훈이 변했다. 환자를 보는 김지훈의 태도는 신중하고도 진지했다. 환자의 질문에 일일이 답을 할 때는 방금 전의 피로까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서도진이 바짝 귀를 열고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도진아, 나 잠깐 쉬고 있을 테니까 내과에서 낸 검사 결과 나오면 깨워.”
“예, 선생님.”
당직실로 들어간 김지훈이 침대에 눕자마자 코를 골았다.
얼마 후 서도진이 조심스럽게 김지훈을 깨웠다.
잠깐 눈만 감은 것 같았는데 벌써 30분이나 지났다.
김지훈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검사 결과와 복부 X-ray를 모두 확인했다. 아뻬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환자분, 현재로서는 맹장염을 의심할 만한 소견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증상이 변하거나 악화되면 꼭 다시 내원하셔야 합니다. 맹장염의 초기 증상은 단순 장염과 아주 비슷하기 때문에 지금은 놓칠 수가 있습니다.”
다소 불안해하는 환자에게 유의할 점 등을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한 후에야 김지훈이 외과 소견을 차팅했다. 아뻬도 아닌 환자를 보는 데 근 한 시간이 걸렸다. 이미 1년차들의 생활이 어떤지 알고 있던 서도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잠깐 잔 시간을 빼도 30분은 걸렸잖아. 지금도 음성에서처럼 환자를 정말 꼼꼼하게 오래 보시네. 모두들 김지훈 선생님을 칭찬하는 이유가 이걸까?’
다른 건 몰라도 서도진의 눈에 김지훈만큼 환자에게 열성을 다하는 의사는 없었다. 그렇게 피곤해하면서도 막상 환자를 볼 때는 힘이 넘치는 것 같은 모습이 서도진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박혔다.
의국으로 올라가던 김지훈이 서도진을 보았다.
눈이 거의 반쯤 감겨 있었다.
“도진아.”
“예, 선생님.”
“일일이 설명하면서 알려 주기에는 요새 내 상태가 너무 안 좋아. 그러니까 1년차들이 환자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처리하는지 잘 보고 익혀야 돼. 일석이나 경석이 형한테 배워도 되니까 눈치 보지 말고 너 좋을 대로 해.”
“아닙니다, 선생님.”
김지훈이 또 피식피식 웃었다.
서도진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모양이었다.
픽스턴이 있다고 1년차의 일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도리어 일하는 법부터 환자를 보는 법까지 설명을 하느라 시간이 더 부족할 판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1년차가 끝난다는 사실에 1년차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밤늦게까지 옆에 앉아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모습을 보면 힘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차팅을 하고 있는 김지훈을 보던 서도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1년차 때는 차팅할 때 끝까지 약자를 못 쓰나요? 수술 기록도 거의 다 똑같은데 모두 수기로 하시네요.”
“유석재 선생님한테 못 들었어? 이게 기본이야. 기본이 몸에 배지 않으면 환자 보면서 일하기 힘들다. 이제 곧 저절로 알게 될 거야.”
서도훈이나 안호석도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열심히 질문을 했고 다들 성의껏 대답을 했다. 가뜩이나 좋았던 1년차들의 분위기가 점점 더 좋아졌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당직이었던 손일석이 신현수에게 오프를 바꿔 달라는 말을 했다.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오신 부모님이 잠깐 얼굴이라도 보자고 한 것이다.
“현수야, 부탁 좀 하자. 주말 오프 때 안 내려갔더니 아주 난리를 치시네. 어떻게 안 될까?”
신현수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너 오늘 수술 당직이지?”
“응. 고맙다.”
의외로 흔쾌히 대답이 나오자 손일석이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통화 내용을 듣던 이경석이 자기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하자 손일석이 좋아 죽었다.
“내가 정말 형하고 동기들 때문에 산다. 감사합니다, 이경석 선생님.”
“몇 시에 나가야 돼?”
“일은 마치고 나가야 하지만 10시에는 나가야 할 것 같은데요. 좀 빡빡하죠?”
“오케이! 그럼 빨리 마무리하자.”
부리나케 차팅과 남은 일을 마친 손일석과 이경석이 오프를 갔다. 오늘따라 응급실이 조용해 김지훈도 간만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야 불과 한 시간이었다.
응급실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던 김지훈이 소리를 지르며 의국을 뛰쳐나갔다.
“현수야, 큰일 났어. 응급실에 일석이하고 경석이 형이 실려 왔대.”
“뭐?”
신현수도 깜짝 놀라며 급히 김지훈의 뒤를 따랐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응급실에 도착한 김지훈이 허탈하면서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 외견상으로는 별 사고가 아니었다.
신호 대기 중에 뒤에서 달려온 차에 받힌 것뿐이었다.
어디 한 군데 찢어진 곳도 없었고 눈만 또랑또랑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온 부모님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만 차가 좀 크게 부서졌고 그 탓에 목이 심하게 꺾였을 뿐이었다. CT를 본 신경외과 3년차가 가볍게 3주 진단을 내렸고 최소한 2주 정도의 안정 가료가 필요다고 말했다.
문제는 손일석과 이경석이 1년차라는 사실이었다.
“목의 염좌가 너무 심해서 이 상태로는 일하기 힘들 거야. 잘못하면 디스크 온다. 목 디스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전 괜찮습니다, 선생님.”
억지로 몸을 일으키던 손일석이 인상을 쓰며 목을 잡았다.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이경석도 마찬가지였다.
당직 2~3년차들이 내려와 한숨을 쉬었다. 대체할 인력이 있다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2년차들이 그나마 여유가 있다지만 나름의 할 일이 있었다. 1년차의 일을 모두 떠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손일석이 억지로 일어나다 말고 소리를 질렀다.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낀 것이다.
“일석아, 그냥 누워 있어. 움직이지 마, 인마.”
김지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일석과 이경석의 목에 필라델피아(목 고정대 혹은 목 깁스)를 댔다. 입맛을 다시며 그 모습을 보던 2~3년차들이 신경외과 3년차와 상의를 했다.
“일도 일이지만 생각보다 많이 다쳤어. 무리하면 문제 생긴다는 거 잘 알잖아. 1년차들 잡고 싶지 않으면 2주는 무조건 안정시켜야 돼.”
난감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일단 일반 외과 병동의 2인실에 입원을 시켰다. 1년차들이 모두 한 병실에 모였다.
김지훈이나 신현수나 할 말이 없었다. 픽스턴이 들어왔다고 좋아한 지 단 3일 만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김지훈이 손일석에게 푹 쉬라는 말을 하며 신현수에게 눈짓을 했다.
단둘이 의국에 앉았다.
“현수야, 2주 조금 넘게 남았는데 버틸 수 있을까?”
“지금도 힘든데 두 몫을 하긴 힘들 것 같다.”
“어휴! 어디 부러지진 않아서 다행인데 하필이면 요때냐.”
대장 항문 파트 환자만 보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수술은 차치한다고 해도 풀 당직을 서야 했다. 가뜩이나 한계에 몰린 김지훈으로서는 엄두도 나지 않는 일이었다.
밤늦도록 한숨 소리만 들렸다.
픽스턴들이 김지훈과 신현수의 눈치만 보았다,
다음 날 금경태 과장이 노발대발했다.
“두 놈이나 한꺼번에 빠지면 어떻게 해? 에이! 요새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쯧!”
이혁민 교수나 오상익 교수도 난감하기만 했다. 이경석과 손일석의 상태를 보니 굳이 CT 소견이 아니더라도 일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목의 통증만이 아니라 심한 두통까지 유발돼 밤새 진통제를 여러 번 맞아야 할 정도였다.
회진도 미루고 스테이션에 서서 한동안 상의를 하던 스태프들이 결론을 내렸다. 천안도 두 명으로 끌고 가기에는 무척 힘들겠지만 여러모로 서울이 우선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송재덕 과장을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제길! 개편안 결정은 계속 미뤄지고 송재덕 과장에게는 아쉬운 소리나 해야 하다니 정말 재수 옴 붙었어. 그래도 이런 일 때문에 내가 그 인간하고 직접 말을 섞을 필요는 없지.’
“이 교수, 자네가 송 과장님하고 통화를 해. 천안 사정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신기동 교수까지 온 마당이라 어쩔 수 없다고 이해를 구해.”
“알겠습니다, 과장님.”
곧 회진을 마친 이혁민 교수기 급히 전화를 걸었다.
마침 송재덕 과장도 외래에 있었다.
“과장님, 이혁민입니다.”
(어! 이 교수. 웬일이야, 웬일. 무슨 일 있어? 나쁜 일은 아니지? 지훈이. 그래. 지훈이는 잘 있고?)
“예. 지훈이는 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서울에 문제가 좀 생겨서 연락드렸습니다.”
(문제? 무슨 문젠데. 뭐야?)
이혁민 교수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손일석과 이경석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전했다.
(뭐? 그래서? 애들은 괜찮지? 괜찮아야 돼. 음! 괜찮지?)
“예. 크게 다친 곳은 없는데 2주 정도는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탭니다. 그래서 1년차 중 한 명을 서울로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신기동 교수까지 근무를 시작했기…….”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재덕 과장의 말이 들렸다.
(좋아. 좋아. 보내야지. 암! 보내야지. 그럼 당연히 보내야지. 여긴 걱정하지 말고 신경 쓰지 마. 애들이나 잘 치료해. 알았지?)
“어이쿠! 감사합니다. 과장님. 그런데 누굴…….”
뭐가 그렇게 바쁜지 전화가 툭 끊어졌다. 이혁민 교수가 전화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송재덕 과장이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1년차는 한 명이라도 부족하면 일 전체에 문제가 생기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그날 저녁 녹초가 된 김지훈과 신현수가 3년차들의 오더를 받을 때가 돼서야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하루 종일 함께 한 픽스턴들의 얼굴에도 피로가 가득했다.
김지훈이 오더를 받다 말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최철한이 잠깐 고민을 하는 사이 깜빡 잠이 든 것이다. 유석재가 김지훈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소스라치게 놀란 김지훈이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니다. 조금 쉬자. 으휴! 김지훈이 일하는 걸 보는 내가 다 힘드네. 인턴 선생, 시원한 주스 하나 김지훈한테 가져다줘. 아! 현수 것도.”
최철한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흔들었다. 1년차 두 명의 힘으로는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송재덕 과장님이 한 명을 보낸다고는 했다지만 언제 보낼지 모르는 일이잖아. 응급실은 2년차들이 커버한다고 해도 대장 항문 파트 환자는 또 어떻게 하지? 당장 하루가 급한데 죽겠네.’
그때 의국 문이 덜컥 열렸다.
고민을 거듭하던 최철한이 멍하니 입만 벌렸다.
정갑수가 씨익 웃으며 들어서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송재덕 과장님이 올라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하필이면 차라리 없는 게 도움이 되는 정갑수라니!
모두들 오더를 내다 말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득 최철한의 뇌리에 이혁민 교수의 말이 스쳤다.
‘이상하게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