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픽스턴(fixtern) (1)
늦은 밤 신현수가 신동석과 마주했다.
“현수야, 전화도 없이 집에 오고 무슨 일이야?”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 밤에 날 보자고 한 걸 보니 중요한 일인 모양이구나. 그래, 무슨 일이냐. 말해 봐.”
“제 문제는 아니고 환자 때문입니다.”
신동석의 눈이 반짝였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부탁한 적이 없는 아들이었다. 그런데 환자 때문에 야심한 시간에 불쑥 나타나 부탁을 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허허! 우리 현수가 이제 의사티가 나는구나. 그래. 이 아비가 의사는 아니지만 들어 보마.”
“장민수라는 환자가 있습니다. 입원한 지 7년째 됩니다.”
신현수가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음! 그래서 입원비를 깎아 달라, 이 말이야?”
“예, 아버지.”
“얼마나 깎아 주면 될까?”
“장민수 부모님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선에서 결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던 신동석이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신동석이 탁자 위에 있던 양주를 들며 말했다.
“현수야, 한 잔 받아.”
“아버지, 저 내일 일해야 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는 거 나도 다 알아. 아비가 오래간만에 주는 술이야. 받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양주 한 잔을 비운 신동석이 턱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간 신현수가 고쳤으면 했던 모습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았다. 누구의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금경태 과장은 아니었다.
‘아직 빠를 수는 있지만 이 정도면 의견 정도는 물어보아도 되겠어. 하지만 현수야, 세상은 녹록지 않아.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야.’
신동석이 슬며시 물었다.
“나는 말이다, 현수 네가 최고의 써전이 돼 일반 외과 의사들의 확실한 신뢰를 얻었으면 한다. 그걸 기반으로 우리 병원을 최고의 병원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노력하겠습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래. 자식이라고 너 하나뿐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금경태 과장이 필요하겠지? 이 아비한테도 아직 필요한 사람이기도 해.”
신현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신동석을 보았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누가 널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면 돼. 단,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은 병원 경영은 의사의 실력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배워야 할 것이 한 가지만은 아니지. 네가 그걸 좀 느낀 것 같아서 묻는 거야.”
신현수가 입을 열지 못하자 신동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금경태 과장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직은 젊고 미숙하지만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양주 한 잔을 더 마신 신동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자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마. 그리고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천천히 생각해 봐. 보름 정도면 될까?”
“예, 아버지.”
“그래. 늦었다. 가 봐.”
‘금경태. 잘만 이용하면 크게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섣불리 대하면 도리어 잡아먹힐 수도 있는 사람이지. 내 손에 있다고 느꼈었는데 이번 진평호 회장 문제를 보니까 생각이 더 복잡한 사람이더구나. 흐음! 어느 쪽이 네게 더 유리할지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어.’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신현수를 보는 신동석의 눈빛이 의외로 복잡했다. 세상일은 누구도 모른다. 뒤늦게 얻은 자식이라 가능한 한 빠르게 입지를 굳혀 주고 싶었다.
자신만 건재하다면 금경태 과장은 신현수의 발판이 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물론 적당히 야심과 욕망을 채워 줘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평호 회장이 마음에 걸렸다.
명목상 재단 이사인 진필호는 진평호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무려 30퍼센트에 육박하는 지분이 사실상 진평호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그런 진평호에게 더 이상 돈은 필요 없었다. 남은 것은 명예와 이를 뒷받침할 건강이었다.
‘진평호 회장,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는군.’
알지 못할 불안감에 신동석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장 이식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다음 날 오후 회진을 돌던 이혁민 교수와 김지훈이 당황한 표정으로 하영희만 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오직 그 말만 되풀이하며 엉엉 울고 있었다. 김지훈이 아무리 달래도 하영희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장민수는 이유도 모른 채 엄마가 울자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난감해할 무렵 원무과 과장이 올라왔다.
“이혁민 교수님, 회진 중이셨군요. 장민수 환자 치료 다 끝나셨으면 바로 퇴원시키셔도 되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늘 아침에 이사장님께서 병원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입원비를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수님께도 수고하셨다는 말씀 꼭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허허! 이거 참!”
이혁민 교수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7년 동안 완치를 못 시켰던 장민수였다. 김지훈의 노력으로 퇴원이 가능해진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입원비까지 해결된 것이다. 그런데 신동석이 어떻게 알았을까?
‘설마 현수가? 아니. 맞네. 확실해. 고맙다, 현수야.’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아마 현수가 이사장님께 직접 부탁을 드린 모양입니다. 어제 저희들끼리 입원비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래?”
크게 놀란 이혁민 교수가 회진을 돌다 말고 신현수를 찾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신현수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 사정을 들으신 아버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선생님.”
한참 동안 천장만 바라보던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흔들며 김지훈과 신현수의 어깨를 잡았다.
“고맙다. 내 니들한테 신세를 졌다. 정말 고맙다.”
“아닙니다, 선생님.”
김지훈이 급히 고개를 숙이며 신현수를 보았다.
지금도 냉정하고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분명 뿌듯해하고 있었다. 김지훈이 신현수를 툭툭 치며 밝게 웃었다.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은 날이 왔다.
드디어 장민수가 퇴원을 하게 된 것이다.
7년이나 입었던 환자복 대신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나왔다. 퉁퉁 부었던 얼굴은 본래의 얼굴을 찾았고 옷 속에 숨겨진 팔과 다리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빠르게 되찾고 있었다.
달랑 보따리 하나를 든 하영희가 병실을 나오며 눈물을 쏟았다. 7년의 세월치고는 참 간소한 짐이었다. 장민수도 입술을 꼭 다문 채 뚝뚝 눈물을 흘렸다.
너무도 기쁜 날이었지만 김지훈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환자를 퇴원시키며 눈물이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김지훈이 장민수의 손을 잡았다.
“민수야, 고생했다. 잘 가.”
“형, 보고 싶을 거예요.”
“나도 보고 싶을 거야. 인마, 이렇게 좋은 날 왜 울어?”
김지훈의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졌다.
“형!”
장민수가 와락 김지훈을 안으며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김지훈의 어깨가 뜨거운 눈물로 축축해졌다.
이경석과 손일석이 코를 매만지며 장민수의 등을 두드렸다.
“민수야, 인마, 형들 잊으면 안 돼. 너 지훈이만 기억하면 형한테 죽을 줄 알아. 막내 형은 절대 잊으면 안 되겠지?”
“형!”
장민수가 입술을 꼭 다물고 있는 신현수를 보며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았다. 신현수가 슬쩍 손을 들며 웃었다. 간호사들도 눈가를 찍으며 퇴원을 축하했다.
“장민수 씨, 파이팅!”
하영희가 장민수의 손을 잡고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김지훈과 손일석, 그리고 이경석과 신현수에게 차례차례 고개를 숙였다. 보호자가 아닌 자식을 둔 어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김지훈이 함께 외래로 가 이혁민 교수에게 인사를 하는 모자의 곁을 지켰다. 이혁민 교수도 심사가 복잡한지 표정이 묘하기만 했다. 기뻐만 하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벅찬 모양이었다.
“그 긴 세월을 잘 참아 줘서 고맙다, 민수야. 고맙습니다, 어머니.”
“선생님, 고맙습니다. 덕분에 우리 아들이 건강하게 집에 갑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모두 고맙기만 했다.
하영희와 장민수가 터미널로 가는 택시를 잡는 동안 김지훈이 부리나케 슈퍼에 들렀다. 간단한 요깃거리와 음료수를 장민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청주까지 가려면 두 시간은 걸릴 거야. 갈 때 목마르면 어머니랑 같이 마셔.”
“형!”
장민수가 또 눈물을 흘렸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남자 놈이 뭔 눈물이 그렇게 많아. 인마, 형 일하러 들어간다. 조심해서 가. 어머니, 안녕히 가세요.”
손을 흔들며 병원으로 달려가는 김지훈이 쓰윽 눈가를 훔쳤다. 지금까지 많은 환자를 보았지만 장민수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두 발로 건강하게 걸어 나가는 것보다 고마운 일은 없었다.
***
2월 첫째 주가 지나갔다.
스태프들 사이에 조금은 묘한 긴장 같은 것이 느껴진다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평탄한 한 주였다. 그 와중에도 김지훈의 얼굴은 점점 더 보기 힘들어졌다.
김지훈이 마치 1년차 초반처럼 시도 때도 없이 10분 후에 깨워 달라며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 툭하면 농담을 던져 분위기를 이끌던 손일석도 그때만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김지훈은 결국 주말 오프도 대부분 잠으로 보내고 말았다.
월요일 오후 회진이 끝나고 잠시 틈이 난 1년차들이 의국에 모였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중 이제야 수술이 끝난 김지훈이 의국에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엎어졌다. 다들 피곤했지만 김지훈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경석이 끌탕을 했다.
“저러다 쓰러지겠다. 수술을 대신 들어갈 수도 없고 정말 걱정이네.”
“그러게요. 어제는 신기동 선생님 수술 중에 졸았는지 무지하게 깨지더라구요. 어시스트를 서던 간호사까지 벌벌 떠는데 보는 나도 떨릴 정도였어요.”
“그 정도로 살벌해?”
“어휴! 형도 봤어야 하는 건데. 신기동 선생님 눈에서 레이저가 막 나오는데 지훈이가 그 자리에서 새카맣게 변하더라구요. 난 죽어도 그 파트는 못 돌 거예요.”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발을 다 들었다.
신현수도 뻑뻑한 눈을 비비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머리로는 다행이다 싶었지만 가슴은 이상하게 불안했다. 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배우는 것도 많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손일석이 시계를 보며 김지훈을 흔들었다.
“지훈아, 10분 지났다. 일어나, 인마.”
“응? 으응.”
김지훈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콧등을 찡그리며 고민하던 손일석이 입맛을 다시며 다시 김지훈을 깨웠다. 간신히 고개를 들던 김지훈이 갑자기 머리를 흔들며 눈을 부릅떴다.
유석재가 의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뒤로 잔뜩 긴장한 인턴 세 명이 줄줄이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난 1년차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다 말고 점점 입을 찢기 시작했다.
손일석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선생님, 픽스턴들이에요?”
“응. 이제 니들도 3주만 버티면 1년차 끝이네.”
“푸흐흐!”
김지훈이 시뻘건 눈을 반쯤 뜬 채 기묘하게 웃었다. 드디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1년차 생활의 마지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도진, 서도훈, 안호석.
학교 다닐 때부터 친했던 후배들이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한 인턴들이었다. 2년차가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을 감추기 어려운데 일 잘하는 후배들이 1년차로 들어온다니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유석재가 김지훈을 보며 웃었다.
1년차 말까지 이 정도로 고생하는 전공의도 없었다.
“김지훈, 정신 차려, 인마. 다들 앉아.”
모두 긴 책상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이제 곧 3년차가 되는 유석재의 여유로움.
기대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세 명의 1년차와 파김치가 된 모습으로 실실 웃고만 있는 김지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세 명의 픽스턴.
연차와 상황에 따라 저마다 표정과 얼굴이 달랐다.
“다들 잘 알지? 새삼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도진이하고 도훈이가 정식 픽스턴이지만 호석이 너도 피부과를 도니까 시간이 나는 대로 교육을 받아. 알았어?”
“예, 선생님.”
안호석의 목소리에 기가 바짝 실려 있었다.
“픽스턴들은 앞으로 이틀간 저녁에 세 시간씩 나한테 교육을 받을 거야. 반복은 없으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 1년차들은 픽스턴 들어왔다고 긴장 풀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각자 한 명씩 데리고 다니면서 교육을 시켜.”
“한 명이 부족한데요.”
손일석의 말에 유석재가 바로 답을 했다.
“호석이하고 도진이는 각각 현수하고 지훈이한테 배우고 도훈이 너는 일석이하고 이경석 선생님하고 돌아. 앞으로 3주간 풀 당직이니까 응급실까지 다 따라다니면서 확실히 배워. 그래야 1년차 때 조금이라도 편해진다.”
곧 유석재가 픽스턴들이 알아야 할 것들이 기록된 복사물을 수북하게 쌓으며 교육을 시작했다. 입이 귀에 걸린 1년차들이 스테이션으로 나가 시시덕거렸다. 김지훈은 물론 신현수도 좋기만 한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