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15화 (215/1,329)

제9화 고맙다, 민수야. 고맙다, 우리 동기들 (1)

손일석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잡고는 소리를 질렀다.

“아! 왜 때려요, 형.”

“좀 영양가 있는 얘기 좀 해라, 인마. 이태원이나 탱크, 이런 말 얼마나 좋아?”

김지훈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눈을 부라리며 뒷머리를 긁적이던 손일석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경석과 나직한 목소리로 뭔가 속삭이다 말고 씨익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신현수가 고개를 흔들다 말고 결국 웃고 말았다.

각자 느끼고 배우는 것이 다 달랐지만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나누는 일이 점점 늘고 있었다. 동기들에게서 느껴지는 끈끈한 유대감에 김지훈이 활짝 웃었다.

‘이대로만 가자. 정말 좋다.’

손일석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김지훈, 지금 너의 그 알 수 없는 웃음과 끈적끈적한 눈빛의 의미는 도대체 뭐냐? 설마 나를?”

“지랄을 해요. 네가 더 끈적거려, 자식아.”

또 한 번 즐거운 웃음이 터졌다.

의국 앞을 지나던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맨날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을까? 힘들지도 않나?’

정말 이번 텀 같은 1년차들은 처음 봤다. 특히 김지훈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가장 힘들게 일하고 잠도 가장 적게 잤다. 그 정도 되면 말 한마디에도 짜증이 실리기 마련이었다. 물론 가끔은 신경질도 냈지만 잘도 웃었다.

“체력이 좋아서 그런가? 아니면 성격이 좋은 건가?”

그때 손일석이 이경석과 의국을 나오며 중얼거렸다.

“형, 내가 다른 건 다 안 부러운데 지훈이 저 자식 성격하고 체력은 정말 부러워요. 몸이 무쇠가 아니고서는 버티기가 힘들 텐데 지금도 웃고 있잖아요.”

이경석이 입을 모으며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멘탈이 강해서 그런 거다. 혼자 음성 갔을 때 보면 몰라? 너나 나였으면 그때 바로 때려치웠을지도 몰라, 인마.”

“음! 그렇군요. 강철 멘탈에 무쇠 팔 무쇠 다리라니. 어? 그럼 로보트 태권브이가 우리 동기란 말이에요?”

“일석아, 우리 잠시만이라도 진지해지면 안 될까?”

이경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웃고 있었다.

손일석과 김지훈이 아니었다면 참 삭막한 1년차 생활이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됐다.

1년차들의 머리를 모아 낸 오더를 본 이혁민 교수가 흐뭇한 눈으로 최철한을 보았다.

“니 요새 김지훈이 참 잘 가르치네.”

“아닙니다, 선생님. 1년차들이 모두 함께 고민했답니다.”

“그래? 지금도 장민수한테 다들 신경을 쓰고 있었어?”

“예.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저나 석재나 민수에 대한 문제는 1차적으로 지훈이하고 1년차들한테 맡기고 있습니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너무 잘하고 있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힐끗 김지훈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김지훈, 이미 설명하고 동의는 다 받았겠지.”

“예, 선생님. 다 받았습니다.”

대답을 하는 김지훈의 얼굴이 유난히도 밝았다.

오늘 아침 최철한에게 오더를 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후 바로 하영희와 장민수를 만나 설명을 했다. 검사를 또 하자는 말에 하영희의 안색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퇴원을 위한 검사라는 소리에 가쁜 숨을 쉬며 눈시울을 붉혔다.

자식을 향한 엄마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형, 나 정말 퇴원할 수 있어요?’

아이처럼 웃으며 김지훈의 팔을 잡고 채근을 하던 장민수가 너무도 좋은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고 행복한 일이었다.

곧바로 모든 검사가 진행됐다. 십이지장에 난 구멍이 완전히 막혔다는 확실한 결과가 나왔다. 이제 남은 일은 십이지장루에 꽂힌 관을 서서히 제거하는 일이었다.

“민수야, 일주일 안에 퇴원하겠다.”

“으아! 정말이죠? 엄마, 나 정말 퇴원하는 거지?”

“그럼. 김지훈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그런 거잖아. 내 새끼 장하다. 정말 잘했어. 고맙습니다, 선생님.”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다 민수가 노력한 덕분이죠. 민수야, 방심하지 말고 잘 먹고 계속 운동해야 돼. 한영철이 기억나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절대 잊지 말고.”

장민수가 숨을 몰아셨다.

“예, 형. 형하고 그 선생님 아니었으면 나 아직도 누워 있었겠죠? 열심히 노력할게요.”

장민수의 어깨를 툭툭 친 김지훈이 쏟아지는 졸음을 억지로 참으며 병실 문을 열었다. 확실히 하루가 다르게 쌓이는 피로를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마침 손일석이 치료를 하러 들어왔다.

“일석아, 오늘 십이지장루에 박힌 관 4분의 1쯤 자르자.”

“뭐? 결과 다 나왔구나. 좋았어. 이제 빼는 거야?”

“응. 네 덕분이다. 민수야, 치료 잘 받아.”

이제는 굳이 김지훈이 없어도 장민수는 다른 1년차들의 치료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예, 셋째 형.”

병실을 나오던 김지훈이 인상을 썼다.

“뭐? 셋째 형? 그게 뭔 소리야, 인마.”

“경석이 형이 첫째구요. 일석이 형 다음이 형이에요. 헤헤!”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신현수가 막내라니 그게 위안이었다. 밀려오던 졸음이 장민수의 농담에 조금은 사라졌다.

드디어 장민수의 몸에서 관이 완전히 제거됐다. 무려 7년하고도 두 달이 넘는 싸움이 끝나기 직전이었다. 아직은 며칠 두고 봐야 하겠지만 기념하고도 남을 날이었다.

이런 날 술이 빠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간만에 주중 오프를 가 딱 소주 한 병씩만 하기로 손일석과 약속을 했다. 정신없이 일을 마치고 나니 11시였다. 잠시 잠과 술 사이에서 고민하던 김지훈이 책상을 내리치며 외쳤다.

‘잠도 고프지만 술도 고프다.’

“일석아, 가자.”

“아직 차팅을 다 못했는데 어떻게 하지? 넌 다 했어?”

손일석의 걱정에 김지훈이 대범하게 말했다.

“일석아, 골뱅이에 딱 한 병씩만 먹자. 한 시간이면 충분하고 이모 본 지도 오래됐잖아. 남은 차팅은 들어와서 하자. 오늘은 정말 술이 땡긴다.”

“흐흐흐! 골뱅이에 소주 한 잔? 참을 수 없는 유혹이지. 에라, 모르겠다. 일단 가자.”

배 속에서 아우성치는 술 귀신을 이길 수가 없었다.

손일석과 함께 군침을 흘리며 의국을 나서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응급실이었다. 김지훈에게 치사한 놈이라고 소리를 지르던 이경석이 벌떡 일어나 가운을 걸치며 신현수를 불렀다.

“현수야, 응급실 난리 났댄다. 단체 교통사고 났나 봐.”

1년차 네 명이 모두 1층으로 향했다. 두 명은 일을 하러 가는데 술 먹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니 뭔가 찜찜하고 미안했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우린 일하니까 잘 먹고 들어와라. 좋겠다.”

이경석이 응급실 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그때 문 사이로 아수라장으로 변한 응급실 내부가 보였다.

서너 명도 아니고 대충 세어도 열 명은 돼 보였다. 다들 여기저기 깨져 피투성이였고 몇몇은 언뜻 보아도 꽤 심한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두 명이 동시에 본다고 해도 떡을 칠 것이 분명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입맛을 다시며 마주 보았다.

“일석아, 어떻게 하지?”

“에이! 뭘 어떻게 해?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나갔는데 장민수가 우리 발목을 잡네. 급한 환자만 빨리 해결하고 잽싸게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가자.”

두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장민수를 함께 보았다.

그 때문인지 어느 틈엔가 네 일 내 일을 나누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있었다. 함께하면 그만큼 일이 빨리 끝나고 환자들의 치료 결과도 좋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다.

어느새 김지훈과 손일석이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를 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반 외과 문제가 없는 환자들을 가려내고 남은 환자는 단 네 명이었다.

혈복강 한 명에 외상으로 인한 복막염이 발생한 환자가 두 명이었다.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남은 한 명은 다발성 늑골 골절 환자였지만 흉부 외과가 응급 수술을 하고 있었다. 이 역시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흉부 CT를 확인한 김지훈이 부리나케 수술실로 가 노티를 했다. 가뜩이나 손이 부족한 흉부외과였다. 수술실에서 나갈 수 있는 전공의가 없었다. 응급실 흉부외과 교수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 순간 1년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지훈이가 우리 못지않게 튜브를 잘 박습니다. 일단 먼저 흉부 삽관을 하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래? 김지훈, 너 많이 해 봤어?”

“예. 구미하고 음성에서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럼 양쪽에 다 박고 사진 나오면 인턴 선생한테 들려 보내. 혹시라도 힘들거나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연락하고.”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응급실로 내려간 김지훈이 흉부 삽관을 준비하라고 하자 초조한 눈으로 기다리던 응급실 간호사들이 반색을 했다. 흉부외과에서 전공의가 내려온다는 말로 들은 것이다. 그런데 김지훈이 장갑을 끼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이경석이 웃었다.

“뭘 그렇게 놀래. 아마 김지훈이 흉부외과보다 튜브 더 잘 박을걸? 일석아, 안 그래?”

“그럼요. 인턴 때부터 튜브를 박은 놈인데. 간호사들, 던지면 그냥 들어가니까 걱정 말아요.”

손일석이 어시스트를 섰다. 빠르게 양쪽에 각각 관을 삽입하고 사진을 찍었다. 정확한 위치에 잘 들어가 있었다. 일반 외과에서 흉부 도관을 삽입하는 일은 지방 병원에서도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서울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말턴인 인턴조차 다소 놀란 눈으로 김지훈을 보고는 수술실로 올라갔다. 간호사들 역시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남은 환자들이 없었다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지도 몰랐다.

그때 노티를 받은 최철한과 유석재가 내려왔다.

‘한꺼번에 세 명이나 뜨고 이 동네에 뭔 일 났나? 이어서 쭉 한다고 해도 도대체 몇 시간이냐. 이혁민 선생님이나 우리나 죽었다.’

최철한이 난감한 표정으로 당직인 이혁민 교수에게 연락을 했다. 얼마 후 뜻밖에도 신기동 교수가 함께 응급실에 들어왔다. 이혁민 교수가 혈복강 환자의 바이탈을 잡고 있는 1년차들을 보며 묘한 눈빛을 보였다.

‘네 놈이 다 같이 환자를 보고 있어? 정말 다 다시 봐야 할 놈들이었네.’

“철한아, 일단 혈복강 환자하고 복막염 환자 둘 양방하자. 남은 환자는 이어서 바로 하고. 그리고 이거 누구 일복이야? 어떻게 환자 세 명이 한꺼번에 들어와?”

최철한이 눈가를 좁혔다.

“선생님, 당직들 인원이 모자랍니다. 양방은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응급실도 커버해야 하구요.”

“그래? 그럼 응급실은 누가 보나.”

“석재하고 이경석 선생이 오늘 응급실 당직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혁민 교수의 눈길이 서서히 한 곳으로 향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수술도 좋지만 오프는 정말 가고 싶었다. 단박에 오프라는 걸 안 이혁민 교수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니들 수술 들어가야겠다. 오픈 나중에 가라. 철한이하고 현수는 나하고 혈복강 들어가자. 김지훈.”

“예, 선생님.”

“넌 인턴 데리고 신 교수 수술에 들어가. 신 교수, 김지훈이 퍼스트 한번 세우지.”

신기동 교수가 지그시 김지훈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놈 손이 어떤지 좀 볼까?”

“좋지. 그럼 손일석 너는 마지막 복막염 환자 수술할 때 퍼스트 서라. 오프 가는 놈들인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않겠나.”

수술 팀이 깔끔하게 정리됐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서로를 보며 씨익 웃었다. 세컨이라면 모르지만 소주 한 병과 퍼스트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퍼스트였다.

이경석이 부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쳤고 신현수도 세컨을 서야 한다는 사실에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 모습에 이혁민 교수가 웃고 말았다.

“신 교수, 이번 1년차들은 욕심이 너무 많지? 이거 좋은 건가?”

“이 교수, 좋아하면서 왜 물어?”

신기동 교수가 김지훈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수술 방으로 올라갔다. 마치 손을 보긴 하는데 마음에 안 들면 죽을 줄 알라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소름이 돋은 김지훈이 복막염 환자의 사진을 보며 여러 가능성을 생각했다.

‘위냐. 소장이냐. 대장이냐. 도대체 어디가 터졌을까?’

김지훈이 고민 고민하며 수술 방으로 올라갔다.

그 시간 마취과 전공의의 입이 오리 주둥이처럼 나왔다.

흉부외과의 응급 수술도 드문데 일반 외과에서 한 번에 세 건을 올리다니 정말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최철한이 인턴을 시켜 맥주 한 박스를 보냈지만 얼굴이 펴지질 않았다.

“철한아, 양방도 아니고 쓰리 방이야. 한 박스로 되겠어?”

“우리가 만들어서 수술하는 게 아니잖아, 인마. 좀 봐줘.”

“한 박스 더. 콜?”

잠시 고민을 한 최철한이 힐끗 마취과 전공의를 째려보며 외쳤다.

“콜! 다음 응급 수술까지야.”

“오케이! 두 박스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마취한다.”

마취과 3년차의 얼굴이 확 펴졌다.

다들 선후배가 아니면 동기였다. 밤 12시가 넘어 수술을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었다. 맥주 한두 박스로 즐거울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빠르게 혈복강 환자의 수술 준비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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