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운명의 갈림길 Ⅱ (3)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진평호였다. 그는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놈이 이번 수술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만 김지훈이 정훈철과 아주 각별한 관계입니다. 장례식장 문제도 김지훈이 제보하고 정훈철이 터트렸으니까요. 만일 오늘 무리하게 수술을 진행했다면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닙니다.”
“고작 1년차가 말인가?”
“그렇긴 합니다만 옷을 벗고도 남을 놈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억지로 수술을 받았으면 김지훈이 그 상황을 정훈철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다, 이 말이야? 그걸 과장이란 사람이 못 막아?”
금경태 과장이 슬며시 한숨을 쉬며 정한득에게 눈짓을 했다. 평소 진평호에게 많은 후원을 받았기에 정한득도 한가로운 때는 아니었다.
“김지훈, 그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입니다. 저도 아들놈과 그놈이 엮이는 바람에 고생을 좀 했습니다.”
“회장님, 사람의 입을 막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쫓아낸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잘못하면 회장님은 신장을 얻는 대신 명예를 잃으실 수도 있습니다.”
“고작 의사 몇 놈과 PD 하나 때문에 내가 신장을 포기해야 했다니 우습군.”
진평호의 눈이 금경태 과장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과연 그 말이 합당한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도의와 교수들의 반발, 그리고 입바른 1년차에 방송국 PD가 모두 한통속이 된다면 그간 쌓은 명예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정훈철의 뒤에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현직 국회의원이 있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잘 버티고 있지만 언제까지 투석을 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과 똑같은 일이 다신 안 벌어진다는 확신도 없었다. 죽을 때까지 펑펑 써도 티도 나지 않을 재산과 힘을 이대로 썩힐 수는 없었다.
진평호가 눈가를 좁히며 금경태 과장과 정한득을 보았다.
“금 과장, 이번에는 내가 넘어가지. 하지만 반드시 명심할 게 하나 있어.”
금경태 과장이 내심 크게 안도하며 고개를 숙였다.
“말씀만 하십시오, 회장님.”
“난 빚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야. 자넨 나한테 오늘 큰 빚을 졌어. 갚아야 할지 말지는 자네가 결정해.”
얼토당토않은 말이었지만 진평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안색이 변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이사장이었다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겠지? 내가 연락을 하면 잘 판단해. 인생을 사는 데 기준은 둘 중의 하나 아닌가? 죽든지 살든지. 나가 봐.”
금경태 과장이 깊게 허리를 숙이고는 병실을 나왔다. 진상철과 악어의 의아한 시선을 뒤로하고 자신의 교수실로 향했다. 진평호의 말 속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두 개의 줄을 타려다 반드시 하나의 줄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빠진 것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모험이었다. 신동석이나 진평호는 결코 금경태 자신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생기다니.’
불도 켜지 않고 어둠 속에서 고민을 하던 금경태 과장이 이를 갈았다. 신기동에 이혁민은 물론 김지훈의 꼴도 보기 싫었다. 위기를 모면하려 댄 핑계가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정말 그들의 탓인 것 같았다.
“신동석이 내 개편안을 온전하게 받아들인다면 잡아야 할 줄은 분명해. 그땐 성가시게 한 놈들은 모조리 내 눈앞에서 치워 주지. 하지만 만일 개편안에 손을 댄다면 날 믿지 못한다는 말이겠지? 그때는…….”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두통에 금경태 과장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머리가 지끈거릴수록 자신을 이 지경으로 빠트린 사람들에 대한 분노도 깊어만 갔다.
가장 큰 원인인 자신과 진평호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얼마 후 정한득도 심각한 기색으로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더욱이 자신을 후원하는 사람이 바로 진평호라는 사실을 정한득 역시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다.
***
1995년.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은 힘들고도 즐거웠다.
회진, 수술, 치료, 응급실, 차팅.
끊임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이혁민 교수의 환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여기에 신기동 교수의 수술이 점점 늘어가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활력과 즐거움이 있었다.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가진 지식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혈관 수술은 보면 볼수록 새로운 세계였다. 신기동 교수는 사람의 모든 혈관이 마치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았다.
심지어 다른 과에서도 혈관에 관련된 수술이 어렵다 싶으면 도와달라는 요청을 할 정도였다. 신장 환자들의 수술만이 아니라 망가진 동맥 대신 정맥을 이식하는 우회수술(bypass)까지 혈관과 관련된 수술에 관해서는 최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와! 정말 대단하시다. 혈관 수술도 정말 매력적이네. 열심히 보고 배우면 혈관 손상을 입은 환자들 치료도 문제없을 것 같아.’
감탄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떠 가며 책을 봐야 했다. 신기동 교수의 직선적인 성격은 수술실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가차 없이 살벌한 말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반면 마음에 들면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그 자리에서 바로 칭찬을 하곤 했다. 고경아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누군가 심하게 혼나면 함께 우울해지고 반대로 칭찬을 받은 날이면 함께 웃었다.
‘경아 씨, 파이팅!’
‘지훈 씨도요. 파이팅!’
그 덕에 묘한 동질감까지 생겼다.
몸은 마치 100일 당직을 도는 것처럼 힘들었지만 좋은 일들이 끊이질 않았다. 장민수가 날이 갈수록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수술 후 2주 만에 양순례 환자도 거부반응 없이 무사히 퇴원했다. 다른 환자들 역시 특별한 합병증 없이 무난하게 회복됐다.
무엇보다도 힘이 되는 존재는 동기들이었다. 장민수로 인해 시작된 유대감이 1년차들을 점점 강하게 결속시키고 있었다. 다만 신현수가 조금은 애매모호했다.
가까워질 것 같으면서도 돌아보면 어느샌가 한 발 물러나 있었다. 여기에 금경태 과장의 행동도 한몫 단단히 했다. 신장 이식 수술이 벌어진 다음 주부터 신현수에게 부쩍 신경을 쓰고 있었다.
손일석과 이경석이 참다못해 결국 불평을 터트렸다.
“처음 시작할 때도 그러시더니 이번엔 더하네. 도대체 이번 달에 수술을 몇 개나 주시는 거야.”
“그러게 말이에요. 내가 저 정도 했으면 지금쯤 손이 막 날아다녔을 텐데. 이럴 땐 형도 현수가 조금은 부럽죠?”
“부럽지. 안 부러운 놈이 있겠냐? 지훈아, 너도 그렇지?”
말해 무엇을 할까?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인다고 했다.
김지훈이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손일석을 보며 웃었다.
“나도 당연히 부럽죠.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도 엄청나게 많잖아요. 그리고 형이 좀 나이가 많다고 해도 우린 모두 동기면서 라이벌 아니에요? 저만치 앞서 가는 놈 하나 정도는 있어야 같이 뒹굴면서 싸울 맛이 나죠. 난 현수가 우리를 동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좋아요.”
“어이구! 부처 한 명 또 나왔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저만치 앞에 있는 게 아니라 아예 그림자도 못 봐요. 우리랑은 차원이 달라진다구.”
손일석의 말에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해. 하지만 송재덕 과장님이나 이혁민 선생님은 현수보다는 우리하고 비슷하게 사시지 않았을까? 스승님을 생각하면 배경은 중요한 것 같으면서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해. 결국 똑같은 수술 하나를 해도 누가 더 집중하고 더 많이 배우냐의 차이 아니겠어? 초조해하지 말고 끈기 있게 가다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믿어.”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자식이 왜 갑자기 철학자 흉내까지 내고 지랄이야. 근데 스승님은 또 뭐냐? 지금이 조선시대야? 하여간 너도 가끔 보면 4차원이야.”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이준영 과장을 떠올린 것이다. 귀신처럼 눈치가 빠른 손일석이 지나치다니 웃긴 일이었다. 갑자기 이준영 과장이 보고 싶어진 김지훈이 눈가를 비비며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 어느새 1월도 거의 다 지나고 있었다. 1년차들의 은근한 불평과 불만도 아뻬 한두 개씩 받자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좋아서 웃고 있는 김지훈과 손일석을 본 이경석이 허탈하게 웃었다.
“단순한 놈들. 김지훈이 저 자식도 생각이 좀 깊은 척하더니 일석이랑 똑같네. 어이구! 입 찢어지겄다.”
그동안 신현수는 수술을 받았다는 티를 거의 내지 않았다. 덕분에 1년차들 간의 분위기는 갈수록 좋아지고 있었지만 의국 분위기는 반대로 점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의 말투와 행동에 바짝 날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편안을 낸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신동석은 명쾌한 답을 주지 않았다. 중간에 한 차례 보충 설명을 요구했을 뿐 더 이상의 언급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금경태 과장으로서는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온종일 엄습하는 짜증과 불안, 그리고 초조함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반면 이혁민 교수와 오상익 교수는 묘한 여유와 웃음을 보였다. 개편안 결정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은 신동석이 그만큼 고민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간 금경태 과장이 누려 온 위상을 생각해 볼 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서로 상반되는 생각과 감정에 외래 분위기가 뒤숭숭했고 그 여파가 의국에까지 미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3년차들만의 일이었다. 이번 달은 별일 없이 주말 오프를 갔다는 것만으로도 기쁠 뿐이었다. 함께 신기동 교수의 수술에 들어간 덕분에 고경아와의 대화가 더욱 풍성해졌다.
1월의 마지막 날의 밤이 다가왔다.
일과가 모두 끝나고 밤늦은 시각 김지훈이 다소 흥분된 기색으로 1년차들과 머리를 맞댔다. 장민수의 치료를 맡은 지 두 달 만에 퇴원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제 십이지장루에 박은 관을 가장 가는 것으로 바꾼 거 알지? 이젠 밥도 웬만큼 먹고 운동도 제법인데 퇴원시킬 수 있을까?”
손일석이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최철한 선생님이 준비를 진행시켜도 이혁민 선생님의 최종 오더가 떨어져야 하는 일인데 그게 우리 마음대로 돼?”
“그거야 당연하지. 근데 너도 민수 오더는 우리 의견이 거의 100프로 반영된다는 거 알잖아. 그러니까 퇴원을 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미리 상의 좀 해 보자구.”
이경석이 코를 매만지며 말했다.
“지훈이가 제일 신경도 많이 쓰고 노력했지만 민수는 우리 환자나 마찬가지잖아.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한번 책임져 보자. 난 일단 간 비대가 좋아졌는지 확인하기 위한 복부 CT 검사 추천.”
손일석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타다닥 치며 말을 이었다.
“혈액 검사 싹 긁고 십이지장루 촬영도 해야지. 아직도 십이지장에 미세하게 구멍이 나 있는데 섣불리 관을 뺐다가는 다시 나빠질 수도 있잖아.”
“오케이. 혈액 검사하고 복부 CT에 십이지장 누공 촬영. 그리고 또 뭐가 있지?”
“해야 할 검사가 또 있어?”
손일석과 이경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지훈이 쓰윽 신현수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직 한 가지 검사가 부족하다고 여겼지만 신현수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혹시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한 점이 있을지도 몰랐다.
“방사선 촬영을 해도 미세한 통로는 안 나올 수 있으니까 십이지장루 세척한 식염수에서 소화액 검사를 해야 해.”
역시 신현수였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이지장루에 관한 내용을 완전히 꿰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맞네. 그럼 protease(단백질 분해 효소), lipase(지방 분해 효소) 검사하고 amylase(탄수화물 분해 효소)까지 하는 게 좋겠지?”
기다렸다는 듯이 답이 나오자 신현수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부분에 쓰여 있는 내용인데 그 와중에도 꼼꼼하게 책을 다 확인한 건가? 장민수뿐일까 아니면 다른 환자들의 문제도 그렇게 접근할까? 아마 후자겠지. 정말 넌 날 항상 긴장하게 만들어.’
신현수도 이제는 김지훈을 쉽게 누를 수 없는 매우 강력한 라이벌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일석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성질을 냈다.
“으아아! 이 자식들이 난 생각도 못한 걸 알고 있었네. 김지훈, 신현수, 니들 치사하게 몰래 책 읽을래? 경석이 형, 우리 분발해야겠는데요. 이러다 저놈들이 우리 머리 위에 올라설지도 몰라요. 아우! 쪽 팔려.”
“에휴! 나이만 조금 젊었어도 니들은 상대가 안 되는 건데. 장가를 너무 일찍 갔나?”
김지훈이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경석이 형, 여기서 장가는 왜 나와요?”
“야, 마눌하고 애 새끼 비위 맞추며 살아 봐라. 오프 때 딴 걸 할 시간이 없어. 가뜩이나 얼굴 못 본다고 불평인데 책 펴면 그날로 죽음이다.”
손일석이 이죽거렸다.
“역시 나처럼 프리하게 살아야 해. 괜히 한 여자에게 집중하면 골치가 더 아프다니까. 어디 돈 많고 이쁘고 쭉쭉빵빵한 과부 없나? 내가 잘해 줄 텐데.”
이경석이 뒤통수를 세게 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