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운명의 갈림길 Ⅱ (2)
아들인 진상철 교수마저 대기실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펴지질 않았다.
‘진 회장은 수술의 원칙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게 분명해. 이 상황을 어떻게 피해야 하지? 신기동과 이혁민에게 화살을 돌리면 될까? 그것으로 충분할지 모르겠군. 진 회장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야 해.’
그때 막 병동에 연락을 하고 수술실로 향하는 김지훈이 보였다. 금경태 과장의 눈이 번쩍였다.
그 시간 김지훈이 양순례 환자를 기다리며 눈가를 찌푸렸다. 목소리를 낮춘다고 했지만 금경태 과장의 말을 똑똑하게 들었다.
‘아무리 잘 알고 힘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과장님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의사라면 절대 꺼낼 수 없는 말이잖아.’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일반 외과 과장이기에 존경하는 마음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득이 있는지 몰라도 원칙을 깨려 했고 이는 곧 환자를 차별한다는 말이었다.
금경태 과장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금이 가고 있었다. 수술을 잘한다고 해서 훌륭한 일반 외과 의사로 불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양순례 환자가 수술실로 옮겨졌다. 김지훈이 눈웃음을 보이며 환자를 안심시켰다. 세상 일이 참 묘했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진평호는 수술실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반면 수술비조차 정말 어렵게 마련한 양순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세상이 공평한 건가? 아니면 양순례 환자의 운이 좋은 걸까? 후우! 그래도 둘 다 이식을 받았으면 얼마나 좋아.’
마취가 시작됐다. 초초하고 불안한 눈으로 김지훈을 보던 양순례 환자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정맥 마취에 이은 호흡 마취가 깊은 잠을 유도했다.
이혁민 교수의 집도 아래 배를 열었다.
우하복부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 확인한 후 장골 동맥과 정맥을 찾아 신중하게 주변 조직과 박리했다. 거의 출혈 없이 모든 과정이 진행됐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야! 이럴 때 보면 정말 손이 대단하시네. 이래서 신기동 선생님이 이혁민 선생님과 함께 이식 수술을 하시는구나.’
김지훈은 내심 탄성을 터트리며 감탄을 하고 말았다.
1년차의 눈에도 참 아름답게 보일 정도였다.
배를 여는 동안 적출된 신장을 깨끗하게 정리한 신기동 교수가 이혁민 교수와 손을 바꿨다. 본격적인 이식 수술이 시작됐다. 이혁민 교수와 전공의들이 수술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접근해 수술을 참관했다.
적출된 신장 정맥과 양순례 환자의 장골 정맥이 연결됐다.
이어 신장 동맥과 장골 동맥이 연결됐다.
장골 동맥의 혈류를 일시 차단했던 겸자가 풀렸다.
순간 빠르게 혈관을 따라 흐른 혈액이 강한 압력으로 신장을 통과했다. 회색빛을 띠던 이식된 신장이 선명한 분홍색으로 변하며 정맥이 부풀어 올랐다. 혈관 연결이 완벽하게 시술됐다는 증거였다.
신기동 교수가 이식될 신장에 이어진 요관을 마른 거즈 위에 올려놓았다. 수술의 성패는 소변이 제대로 만들어지는지에 달렸다. 수술 팀은 물론 참관하는 의사들의 눈이 일제히 요관 끝에 쏠렸다.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신기동 교수가 힐끗 시계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치 1초가 한 시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리게 흘렀다.
바짝 긴장한 채 입술을 깨물던 김지훈의 눈이 커졌다.
‘나온다!’
마른 거즈가 서서히 젖어 들고 있었다. 신기동 교수가 요관을 살짝 들어 올리자 맑은 액체가 똑똑 떨어졌다. 이식된 신장이 빠르게 양순례 환자의 탁한 피를 깨끗하게 걸러내고 있는 것이다.
“휴우! 좋았어. 신 교수, 첫 이식 수술이 무난하게 끝난 거 축하해. 오자마자 큰 건 하나 했네.”
이혁민 교수의 말에 신기동 교수도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방광에 요관 잇고 끝내자.”
첫 번째 신장을 이식 못해 아쉬웠지만 두 번째 신장은 건강했고 양순례 환자의 몸에 무난히 이식됐다. 마지막 봉합 사를 자르고 소변을 확인했다.
뚝뚝뚝!
맑은 액체가 소변 줄을 따라 규칙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수술실의 엄숙함을 깨는 박수를 쳤다.
이런! 김지훈과 손일석이었다.
손일석이 자라목을 한 채 재빨리 사라졌다.
신기동 교수가 김지훈을 째려보다 말고 피식 웃고 말았다.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를 옮기던 김지훈이 수술실을 나가다 말고 멈칫거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뇌사 환자의 신장을 꺼냈던 수술실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자신의 생명을 내주고 떠난 사람의 자리에 꽃 한 송이 없었다. 가능했다면 심장과 간, 그리고 자신의 두 눈까지 내주고 갔을 사람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고맙습니다.’
김지훈이 숙연해진 마음을 안고 양순례 환자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 속에서 떠난 사람의 흔적이 진하게 느껴졌다.
이식을 받은 양순례 환자도 받지 못한 진평호도 모두 병동으로 올라갔다. 수술 후 오더를 내고 양순례 환자 상태를 확인했다.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었다.
모두 의국으로 올라가 하루를 정리하고 있을 때 신기동 교수에게 연락이 왔다. 밤 11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최철한 선생님, 중환자실로 모두 오랍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막 오프를 가려던 전공의들이 일제히 김지훈을 보았다.
“이유는 말씀 안 하셨는데요. 그냥 다 내려오라는 말씀만 하시고 끊으셨습니다.”
“에이, 또 뭐지? 설마 뇌사 환자가 또 있는 건 아니겠지?”
몇몇은 투덜거리고 몇몇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기다리고 있던 신기동 교수가 손짓을 했다. 이혁민 교수도 함께 있었다.
“모두 따라와.”
자신의 신장을 내준 스물네 살 젊은 남자 앞에 섰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이 주변에 둘러서서 마지막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긴 투병으로 퉁퉁 부은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편안해 보였다. 환자의 몸을 덮은 하얀 천이 유난히도 맑고 깨끗해 보였다.
가족들이 일일이 환자와 이별을 나눴다. 마지막으로 환자의 어머니가 자신을 내주고 떠나가는 아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신기동 교수가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
“환자분은 1994년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에 운명하셨습니다. 고인과 가족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정말 떠나보내야 할 때였다.
가족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를 악문 아버지와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흐느끼는 어머니의 모습이 가슴 아프도록 시렸다. 코끝이 찡해진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북받치는 눈물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어디에선가 엄숙하면서도 나직한 종소리가 울렸다.
뎅! 뎅! 뎅! 뎅!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종소리가 이어졌다.
서른세 번의 종소리가 모두의 가슴에 박혔다.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날.
한 명의 환자가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주고 떠났다. 비록 다른 한 명의 삶은 변함이 없었지만 숭고하고 고귀함은 변치 않을 것이다.
신기동 교수와 이혁민 교수를 보며 진정한 의사는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느 틈엔가 수술 방 간호사들도 와 눈가를 붉히고 있었다.
김지훈과 고경아의 눈길이 마주쳤다.
먹먹하고 아픈 가슴속에서 한 줄기 따스한 기운이 올라왔다. 한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떤 사랑을 해야 할지 마음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 시간 별관 501호는 죽음과도 같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입을 꽉 다문 채 눈가를 부들부들 떨며 수술실로 들어가는 양순례를 노려본 진평호였다. 그 순간부터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수술 방에서 올라온 이후 진평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급한 일 때문에 수술 직전에야 병원에 온 진필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위로의 말을 전하려 한 신동석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금경태 과장은 좌불안석이었고 진상철과 악어는 진평호의 눈치만 보았다. 정한득이 혀를 차며 고개만 흔들었다.
“형님, 또 기회가 있을 겁니다.”
진필호가 어떻게든 진평호의 마음을 풀어 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 복도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렸다. 진평호가 눈살을 찌푸리자 재빨리 밖을 내다본 악어가 급히 문을 닫았다. 502호 환자가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있으면 무엇을 할까?
새로운 삶을 돈과 권력으로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인생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진평호의 눈에 강렬한 분노만이 보였다.
“금 과장.”
무려 세 시간 만에 입을 열었다.
금경태 과장이 급히 일어나 진평호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신장 이식만 하면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진 돈과 인맥의 힘으로 의사 하나쯤은 매장시키고도 남을 위인이기도 했다.
“예, 회장님. 오늘 일은 어쩔 수가…….”
“정말 방법이 없었나?”
“회장님, 수술에는 원칙이 있는 데다 신기동과 이혁민은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그 두 사람이 문제였단 말이야? 저깟 무지랭이 같은 것도 이식을 받았는데 나 진평호가 수술을 받지 못한 이유가 고작 원칙과 의사 두 놈 때문이었어?”
“여긴 대학 병원이고 전 외과 과장입니다. 그런 문제를 무시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 그럼 금 과장의 장담은 뭐였나?”
진평호의 눈살이 마치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떨렸다.
올 게 왔다. 사실 책임질 일은 없었지만 말이 화근이었고 하필이면 상대가 진평호라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금경태 과장이 일순 입을 열지 못했다.
진평호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우습게 보인 모양이군.”
“아닙니다, 회장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날 위해 소리라도 질렀어야지. 어떻게든 그 신장을 내게 줬어야지. 겨우 외과 과장 자리 하나에 연연하다니 우습군. 그깟 자리는 언제든지 주고 뺏을 수 있는 사람이 나 진평호야.”
금경태 과장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고 그럴 능력도 있었다. 만일 신동석을 강하게 압박한다면 지금까지 쌓아 온 것이 한순간이 사라질 판이었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어. 이혁민이나 신기동으로 안 된다면 김지훈 그놈이라도 이용해야 해.’
“회장님, 저라고 왜 그러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신기동과 이혁민만의 문제라면 당연히 모든 힘을 다해 회장님이 수술을 받으실 수 있도록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놈이 있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진평호의 눈이 번쩍였다. 일반 외과 과장이 집도의와 교수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하는 놈이 있었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김지훈이라는 놈이 있습니다.”
“김지훈? 그놈이 누군데?”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악어가 목소리를 높였다.
“과장님, 이제 1년차에 불과한 놈입니다.”
금경태 과장이 눈을 부라리며 악어를 보다 진평호의 앞이라는 생각에 급히 안색을 바꿨다. 정한득도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 시선을 주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이 진평호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진평호의 입가가 말렸다. 고작 1년차를 언급하는 금경태 과장이 가소로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들어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이번 일로 그간 마음속에 두고 있던 계획을 실행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금경태 과장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
“다들 나가 봐.”
진평호의 말 한마디에 모두들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정한득이 머뭇거리자 금경태 과장이 눈짓을 주며 나가지 말라고 했다.
‘제길! 이 말도 안 통하면 더 이상 방법이 없지만 정한득도 손을 못 쓴 문제라는 걸 강조해야 해. 장례식장 문제가 터졌을 때 만일 정훈철에게 별 신경을 안 썼다면 큰일인데.’
금경태 과장이 긴장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회장님, MBS 방송국의 정훈철 PD를 기억하십니까?”
“정훈철? 장례식장 문제를 보도했다는 그놈?”
천만다행이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분명 진평호에게 어떤 식으로든 좋지 않은 기억을 남겼다는 말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힐끗 정한득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예. 맞습니다. 정 국장도 고개를 흔든 사람입니다.”
“음! 그놈도 배경이 만만치 않긴 했어. 아버지가 장성 출신의 국회의원이더군. 하지만 언젠가는 내 말을 무시한 대가를 치러야 할 놈이야. 그런데 그게 뭘 어쨌다는 거야?”
진평호의 얼굴을 보던 금경태 과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지못해 꺼낸 말이 뜻밖에도 가장 확실한 구명줄이 되고 있었다. 진평호는 자신의 자존심을 구긴 사람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감히 회장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장례식장 문제를 보도했었군요. 저도 이리저리 선을 대 봤지만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아 의아했는데 정말 만만치 않은 놈이 분명합니다.”
금경태 과장이 슬쩍 자존심을 건드리자 진평호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