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12화 (212/1,329)

제8화 운명의 갈림길 Ⅱ (1)

12월 31일.

1994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묵은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설렘이 답답한 공기 속에 묻혔다. 올해의 마지막 밤을 고경아와 보내기는 글렀다. 다행이라면 고경아 역시 신장 이식 때문에 계속 대기 상태라는 점이었다. 신기동 교수와 혈관 수술을 함께한 덕이었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도 조용한 의국을 울렸다.

벌써 3일째 비상 대기였다. 차라리 몸은 힘들더라도 하루 종일 움직이는 게 덜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갑갑하고 무료한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기저기서 불평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남으면 잡념이 많아지는 법이었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던 김지훈이 금경태 과장을 떠올렸다. 음성으로 가게 된 일부터 자신을 믿으라는 이혁민 교수의 말과 이태원에서 손일석에게 들은 말까지 온갖 생각이 다 났다.

‘분명 과장님은 날 좋게 보지 않아. 내게 문제가 있었다면 이혁민 교수님이 이미 말씀을 해 주셨겠지. 그렇다면 결국 내가 아니라 다른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도대체 뭐가 문제지?’

매듭을 풀 부분을 찾지 못하면 결코 풀지 못할 엉킨 실타래였다. 혼자서 골머리를 싸맨다고 답을 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참 동안 끙끙대던 김지훈이 무심코 시계를 보았다.

시침과 분침이 일직선으로 서며 6시를 알리고 있었다.

신장 이식을 하기로 한 시한이 막 지난 것이다.

최철한이 책상을 탁 치며 일어섰다.

“쯧! 끝났다. 석재야, 다 들어오라고 해. 오더들 내고 오프 갈 사람들 가자. 3일 동안 헛수고만 한 모양이다.”

의국원들이 모두 모였다. 3일간이나 기다려서인지 다들 맥이 다 풀려 있었다. 그래도 어찌 됐든 이젠 끝난 일이었다.

최철한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선생님, 보호자가 동의했답니다. 지금 바로 수술 방으로 다 내려오랍니다.”

“뭐? 지금 수술을 한다고?”

최철한도 다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잠시도 지체할 틈이 없었다. 일반 외과 전공의 전체가 수술 방을 향해 달려갔다. 드디어 신장 이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수술 방 앞이 울음바다로 변했다.

뇌사 상태에 빠진 스물네 살의 젊은 환자가 중환자실을 나와 수술 방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소리 없이 줄줄 눈물만 흘리는 아버지와 차마 자식의 손을 놓지 못하는 어머니의 오열이 가슴을 후벼 팠다.

조용히 서서 환자를 기다리던 신기동 교수와 이혁민 교수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한참 동안 조금이나마 슬픔과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린 신기동 교수가 김지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르륵!

수술 방의 자동문이 나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환자가 누워 있는 중환자실 침대가 무거운 소리를 내며 수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점점 커지던 울음소리가 통곡으로 변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문이 닫히자마자 천천히 수술실로 향하던 김지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뇌사 환자의 육체적인 죽음을 생각하기에 앞서 조금이라도 더 건강한 신장을 얻는 것이 목표였다. 의사이기에 감정을 죽이고 수술의 목적을 위해 움직여야 했다.

환자가 수술대 위에 옮겨졌다.

장기를 적출해야 하는 수술에 참가한 전공의들이 빠르게 수술 준비를 했다. 신기동 교수가 잠시 환자의 얼굴을 보고는 수술대 앞에 섰다.

“메스.”

좌측 신장을 적출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이어졌다. 이혁민 교수가 조용히 수술을 지켜보았다. 환자의 마지막 가는 길이었다. 모니터 소리와 조직을 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수술실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금경태 과장이 가끔씩 들어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확인하고는 수술실을 나갔다.

좌측 신장이 완전히 노출됐다.

신중하게 신장 동맥과 요관을 충분하게 확보한 후 신장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수시로 수술 진행을 살피던 금경태 과장이 부리나케 환자 대기실로 갔다.

첫 이식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 전공의들도 바빠졌다. 신기동 교수의 신호가 떨어지면 첫 번째 신장을 이식받을 진평호 환자를 바로 수술실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좌측 신장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적출된 신장을 받아 든 2년차가 잘게 간 얼음을 채운 생리 식염수 안에 신장을 넣었다. 신기동 교수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이혁민 교수도 어두운 표정으로 적출된 신장을 한참 동안 살폈다. 복부 CT상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미세 낭종(물혹)이 가득해 이식이 불가능한 신장이었다.

“이 교수, 안 되겠지?”

“광범위한 미세 낭종도 금기 아니가?”

“맞아. 포기해야겠다. 이런 신장 억지로 심어 봐야 기능도 못하고 환자만 고생하겠지.”

눈빛을 굳힌 신기동 교수가 수술을 지켜보며 대기하고 있던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 진평호 환자 올리고 다음 환자 내리라고 해.”

“예, 선생님.”

정말 뜻밖의 상황이었다. 진평호 환자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환자에 대한 인상과는 상관없이 안타깝기만 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신장 이식 수술의 원칙은 확실했다.

진평호는 좌측 신장을 이식받기로 했다. 첫 번째로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우측 신장까지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측 신장은 양순례 환자에게 이식될 신장이었다.

환자 대기실로 간 김지훈이 갑갑한 표정을 지었다. 보호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었지만 사람들로 가득했다. 금경태 과장과 진상철 교수는 물론 다른 과 교수들까지 여럿 보였다. 후배들에겐 그렇게 기세가 등등한 악어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금해야 하지만 의사들의 출입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옆에 낯선 사람이 둘이나 더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상당히 여유로운 태도로 보아 병원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 같았다. 김지훈이야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재단 이사인 진필호와 보사부 국장인 정한득이었다.

‘환자 대기실에 많이도 들어와 있네. 아무리 힘이 있어도 그렇지, 여기는 이렇게 막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인데.’

금경태 과장까지 있는 자리에서 1년차 주제에 함부로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진평호 환자가 입을 정신적 충격까지 생각하면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진평호를 수술실로 옮길 준비를 하던 최철한에게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좌측 신장은 이식하기에 부적합하답니다. 신기동 선생님께서 이 환자 올리고 다음 환자 내리랍니다.”

진평호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수술 걱정은 절대 하지 말라며 덕담을 건네던 사람들도 깜짝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옆에 서 있던 금경태 과장이 크게 놀라 소리쳤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과장님,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이식을 할 수 없는 신장이랍니다.”

“그래서 신 교수가 환자 올리라고 했어?”

“예. 다음 환자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환자 내리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

금경태 과장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갑갑한 일이었다. 다행히 환자 상황이 걱정됐는지 이혁민 교수가 직접 나와 상황을 설명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금경태 교수가 이혁민 교수와 함께 수술실로 향했다.

진평호의 눈짓에 진상철 교수가 급히 뒤를 따랐다.

“이 교수, 정말 이식이 불가능해?”

“보시면 아실 겁니다. 불가능합니다.”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좁히며 슬쩍 말을 던졌다.

“혹시 회장님에게 우측 신장을 주는 것이 가능할까?”

이혁민 교수가 놀란 표정으로 금경태 과장을 보았다.

“과장님, 수술의 원칙을 아시지 않습니까? 환자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나도 그건 알지. 하도 답답해서 하는 소리야. 회장님은 우리 병원에 상당히 중요한 분이고 솔직히 다음 환자가 이 상황을 어떻게 알겠어?”

“과장님.”

단 한마디였지만 이혁민 교수의 말은 명확했다. 금경태 과장이 다소 초조한 표정으로 눈가를 찌푸리며 수술실로 들어갔다. 신기동 교수가 우측 신장을 적출하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이 이미 적출된 좌측 신장을 보며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제길! 사진상에서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지? 아무 잡음 없이 우측 신장을 진평호 회장에게 이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나?’

금경태 과장이 필사적으로 방법이 없는지 머리를 굴렸다.

반드시 진평호가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진평호는 일반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한 부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 덕에 정관계에도 상당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다. 사실 재단 이사인 진필호도 진평호를 대신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안 이후 진평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진상철과 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주치의를 자청할 정도로 많은 노력을 했다. 만에 하나 곧 정식으로 재단 이사장에 앉을 신동석의 마음이 변할 때를 대비한 포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이식 수술은 정말 하늘이 준 기회였다. 하지만 그게 발등을 찍는 결과를 가져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신기동 교수를 앞에 두고 진평호 회장에게 별문제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만 하지 않았어도 발을 뺄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올해 들어서 정말 잘되는 일이 없군. 제길!’

아무리 생각해도 금경태 과장 자신에게 가장 이상적인 결과는 진평호가 이식 수술을 받는 것뿐이었다. 애써 속마음을 감춘 금경태 과장이 신기동 과장 뒤에 서서 넌지시 말했다.

“신 교수, 우측 신장은 괜찮아?”

신기동 교수가 손을 쉬지 않으면서도 눈가를 찌푸렸다.

금경태 과장의 의도는 분명했다.

진평호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며 굽실거릴 때 이미 알아봤다. 서울 병원에 근무한 이래 그런 모습을 자주 보아 왔었다. 아예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수술에만 전념했다.

드디어 우측 신장이 적출됐다. 밝은 선홍색의 탄탄하고 건강한 신장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눈을 번쩍이며 입을 열려다 말고 주춤거렸다. 이혁민 교수부터 전공의들까지 눈이 너무 많았다.

일반 외과 과장으로서 수술의 원칙을 보란 듯이 깰 수는 없었다. 그런 무리수가 진평호의 눈에 들지는 몰라도 결국 부메랑이 돼 날아올 것이 뻔했다. 의사로서의 기반과 기본적인 신뢰까지 무너진다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래도 진평호의 아들인 진상철 교수까지 보고 있는 마당에 에둘러서라도 시도는 해 봐야 했다.

금경태 과장이 수술실에 들어와 있던 전공의들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하며 최대한 목소리를 죽였다.

“회장님이 진필호 재단 이사님의 형만은 아니야. 어떻게 보면 이사로서의 실권은 회장님에게 있다고 봐야 해. 병원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분이야, 신 교수.”

신기동 교수가 인상을 구겼다.

“그래서요?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제 눈에는 똑같은 환자일 뿐입니다. 김지훈, 넌 할 일이 있으니까 나가지 마.”

돌아온 말이 심상치가 않았다. 게다가 수술에 참가한 전공의들은 어쩔 수가 없다고 해도 김지훈까지 남아 있었다. 금경태 과장이 슬쩍 물러서며 진상철 교수에게 눈짓을 했다.

“신 교수님, 무리한 일인 줄은 알지만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주십시오. 다음 환자는 우리가 문제없도록 잘 처리…….”

신기동 교수의 얼굴이 아예 일그러졌다.

“뭐? 진 교수, 수술 원칙이 무엇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해진 신기동 교수가 아예 쐐기를 박았다. 수술에 대한 결정과 책임은 오직 집도의만이 갖는 권리이자 의무였다.

“과장님, 그런 문제는 나중에 듣겠습니다. 이번 수술은 원칙대로 진행합니다. 김지훈.”

“예, 선생님.”

“다음 환자 10분 내로 내리라고 하고 수술 들어와. 이 교수, 이식할 신장 정리하는 동안에 미리 준비 좀 해 줘.”

이혁민 교수가 바로 옆방에서 빠르게 이식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금경태 과장이 더 이상 말을 붙일 여지도 없이 단칼에 말을 자른 신기동 교수를 보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의도적인지는 몰라도 목소리가 상당히 컸다. 수술실에 있는 모든 의료진들에게 똑똑하게 들렸을 것이다. 아야 소리 한 번 못하고 물러나야 할 상황이었다.

‘신기동, 네가 감히 내 말을 이따위로 잘라?’

환자 대기실로 향하는 금경태 과장의 표정이 복잡했다. 초조함 속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수술의 원칙이 있고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진평호는 곱게 수긍할 사람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원망과 분노의 화살이 모조리 자신에게 꽂힐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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