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07화 (207/1,329)

제5화 환자는 의사의 힘이다 Ⅱ (3)

크리스마스이브의 날이 밝았다. 누구나 즐거워하는 날이었고 다들 조금씩은 들떠 있었다. 온갖 색깔의 작은 전구로 화려하게 장식된 조그만 트리가 스테이션 앞에 세워졌다.

일찌감치 회진 준비를 마치고 서 있던 김지훈이 물끄러미 신현수와 이경석을 보았다. 오프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얼굴이 무척 밝았다.

‘후우! 동기들 덕에 큰 스트레스 없이 일은 하는데 너무 찜찜하네. 이유가 뭘까? 장민수도 그렇고 수술실에서도 그렇고 뭔가 조금씩 부족해. 한 방에 속 시원하게 풀리는 일이 없어서 그런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사이 금경태 과장이 올라왔다. 일순 싸늘해지는 분위기에 김지훈이 바짝 긴장했다. 첫날을 빼고는 그간 눈길도 주지 않았던 금경태 과장이 묘한 표정으로 김지훈을 보다 회진을 돌았다.

문득 금경태 과장이 답답함의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저한 무관심과 곱지 않은 눈길 때문일지도 몰랐다. 무심코 한숨을 쉬던 김지훈이 급히 차트를 정리했다. 이혁민 교수가 올라온 것이다. 그 뒤에 낯선 얼굴이 보였다.

“철한이나 석재는 잘 알 테고 김지훈, 인사해라. 신기동 교수님이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네가 김지훈이야? 반갑다.”

작고 마른 체격에 눈매가 매서웠다. 나오는 말투도 차갑고 딱딱해 마치 나이 든 신현수를 연상하면 딱 맞을 것 같았다.

이혁민 교수가 길게 숨을 내쉬며 김지훈을 보았다.

“미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일주일 전에 귀국하셨다. 나와 함께 전공의를 했고 아주 훌륭하신 분이야.”

“이 교수, 그냥 본론만 얘기해. 어차피 결정된 거잖아.”

“그럴까, 신 교수. 흐음! 아무튼 다음 주부터 진료를 시작하는데 우리 파트와 함께 일하기로 했다. 그래서 석재가 브레스트 수술을 맡고 지훈이 니는 신 교수 파트를 겸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열심히 해.”

유석재는 물론 최철한까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도 일이 가장 많은 김지훈이었다. 브레스트 수술을 유석재가 들어간다고 해도 환자는 결국 김지훈이 보게 된다. 그런데 신기동 교수 파트까지 맡으라니 이건 죽으라는 말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유석재가 총대를 멨다.

“선생님, 지훈이 일이 너무 과중해집니다.”

“안다. 그러니까 니가 많이 커버해야지. 김지훈,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혈관 수술을 배울 기회라고 여겨. 알았제.”

“예, 선생님.”

대답은 했지만 김지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이런 상황을 꺼벙하게 넘어갈 김지훈도 아니었다. 1년차가 가야 한다면 상대적으로 일이 적은 이경석이나 손일석이 겸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후우! 이렇게 되면 도대체 어떻게 일을 하라는 거지? 이혁민 선생님까지 내게 왜 이러시는 걸까?’

일을 미룰 생각은 없었지만 답답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칫하면 리포트나 발표를 준비할 시간도 없을 것이다. 결국 서울에서 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트레이닝 중 한 부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혁민 교수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김지훈을 힐끗 쳐다본 이혁민 교수가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내가 구미에서 한 말만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엉뚱한 말에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 역시 순간적으로 이혁민 교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슬프다. 나만 믿어라.’

인턴을 시작하자마자 리포트를 준 멘토의 말이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혁민 교수의 눈을 보는 순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영 과장과 송재덕 과장이 생각났다. 그런 의사들과 강한 친분과 신뢰를 유지하고 있다면 최소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공의를 이용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혁민 교수를 믿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어차피 우리 중 한 명이 해야 할 일이라면 가급적 즐겁게 하자. 설마 일하다 죽지는 않겠지.’

“예, 선생님. 기억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힘든 만큼 좋은 일이 생기는 법이다. 회진 돌자. 신 교수, 그럼 월요일에 김지훈이 할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 줘. 회진 돌 때 내가 말할 테니까.”

“지금 얘기하지, 뭐. 김지훈, 내과 신장 파트에 수술할 환자가 두 명 있다. 국소마취로 하니까 수술 방이 나오는 대로 내게 연락해.”

“알겠습니다, 선생님.”

뭔가 희한한 분위기 속에서 회진이 시작됐다. 신기동 교수가 막 돌아서려는 순간 회진을 마친 금경태 과장이 스테이션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서로를 보는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이혁민 교수도 난처한지 금경태 과장을 피해 평소와는 반대로 601호 쪽으로 향했다. 김지훈도 내심 잘됐다 싶었다. 열심히 하겠다고는 했지만 기분도 울적하고 왠지 갑갑해 금경태 과장의 얼굴을 보지 않았으면 생각이 든 것이다.

그때 601호 문이 서서히 열렸다.

앞서 안내를 하던 인턴이 주춤거리며 그 앞에 섰다.

‘무슨 일이지?’

장민수가 입원한 병실이기에 김지훈만이 아니라 다들 신경이 쓰이는지 걸음이 느려졌다. 혹시 뭔가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김지훈이 이혁민 교수를 보며 앞서 나갔다.

김지훈이 돌연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눈만 멀뚱거렸다.

장민수가 하영희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아침에 치료를 할 때까지만 해도 앉아만 있던 장민수였다. 상상도 못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하영희가 김지훈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마침내 장민수가 병실을 나와 복도에 섰다.

이혁민 교수는 물론 모든 전공의들과 교수들까지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1년차들이 자신도 모르게 김지훈 옆에 섰다.

얼굴이 시뻘게진 장민수가 김지훈을 보며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왔다.

말없이 눈길만 오고 갔다.

장민수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장민수의 목소리가 똑똑하고도 분명하게 들렸다.

“형!”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에 김지훈이 아무 말도 못했다.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기쁜 일인데도 눈물만 났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양팔을 벌렸다.

“민수야! 고맙다.”

“형!”

김지훈이 장민수를 품에 꼭 안았다. 회진을 돌아야 한다는 것도 교수들과 전공의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잊었다. 눈가가 벌게진 손일석과 이경석이 김지훈과 장민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눈가에 힘을 주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현수가 장민수의 어깨만 탁탁 두드렸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었다.

드디어 장민수가 자신의 두 발로 걸었다. 네 명의 1년차가 7년의 세월에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던 장민수를 일으켰다. 차갑고 딱딱한 병원 복도에 따스한 온기와 희망이 흘렀다.

손일석이 눈가를 쓱쓱 비비며 뚜벅뚜벅 스테이션으로 걸어갔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이 들어왔다. 반짝이는 오색 전구들 사이로 경쾌한 캐롤송이 울렸다.

한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오직 장민수와 김지훈, 그리고 1년차들만 바라볼 뿐이었다. 단 한순간일지 모르지만 지금은 분명 스스로 바랐던 일반 외과 의사들이 눈앞에 있었다.

눈가가 붉어진 것 같은 이혁민 교수가 웃으며 다가와 김지훈과 1년차들의 등을 두드렸다.

“니들 회진 안 돌고 여기서 뭐 하나?”

이제야 정신을 차린 1년차들이 후다닥 자신의 파트로 달려갔다. 약간은 상기된 것 같은 이혁민 교수가 한동안 하영희와 대화를 나눴다. 답답하기만 한 일들 속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모두 사라졌는지 웃음소리가 유난히도 컸다.

“그러니까 걸은 지는 며칠 되는데 김지훈이 놀래 주려고 숨겼단 말씀이네요. 아이고! 저놈 속을 새카맣게 만들려고 작정을 하셨습니다, 어머니.”

“아니에요, 교수님. 민수가 김지훈 선생님을 형이라고 부르려면 문밖까지 걸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한사코 말을 하지 말라고 해서 그만.”

“하하하! 그랬나요? 내 민수를 그렇게 오래 봤는데 김지훈이를 더 좋아하고 믿나 봅니다. 좋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지훈, 그만 눈물 닦고 회진 돌자.”

김지훈이 쑥스럽게 웃으며 이제야 장민수의 손을 놓았다.

울적하고 갑갑했던 기분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가슴 벅찬 희망과 흥분만이 남았다. 회진을 도는 김지훈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경쾌하고 힘찼다.

신기동 교수가 삐죽이 입을 내밀며 코웃음을 흘렸다. 이혁민 교수가 그간 장민수 때문에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탓에 한때는 함께 술도 많이 마셨었다.

문득 며칠 전 이혁민 교수가 지나가는 말로 김지훈이 장민수를 일으켰으면 정말 좋겠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김지훈이 저런 놈이었어?”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를 보던 금경태 과장이 이제야 외래로 내려갔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신현수가 김지훈과 장민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웃는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김지훈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번쩍번쩍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며 나지막하게 들리는 캐롤송을 따라 흥얼거렸다.

“민수야, 빨리 들어와.”

이젠 병실에서 치료를 하지 않기로 했다. 스테이션에 딸린 작은 처치실까지 장민수를 걸어오게 했다. 가쁜 숨을 내쉬며 간이침대에 누운 장민수가 김지훈을 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형, 나 어제 새벽에 복도 끝까지 걸어갔다 왔었어요. 죽도 한 그릇 다 먹었고요.”

“그랬어? 또 날 감쪽같이 속였구나. 나쁜 놈. 그래도 정말 좋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네가 먹을 만한 음식이면 형이 다 사 준다.”

“정말이죠, 형.”

이렇게 즐거운 치료는 없었다.

하루 종일 일에 지쳐도 펄펄 힘이 날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내내 병원 안을 오가는 사이 새로운 날이 밝았다. 새벽에 응급실로 온 아뻬 환자를 입원시키고 회진을 돌았다. 오늘따라 수술이 일찍 끝났지만 신기동 교수의 수술이 남았다. 아뻬 환자의 수술 준비를 하며 슬며시 빈 수술 방이 있는지 살피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오래간만에 김지훈이 손 좀 보자.”

“예?”

“수술 처음 받는 놈처럼 뭘 그렇게 놀래? 그런데 니 지금도 수술을 어떻게 할지 미리 생각을 하나?”

“예, 선생님.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지훈이 꾸벅 인사를 하며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도 수술 전에 어떻게 수술을 할지 한 번도 잊지 않고 상기했다. 위암 수술은 물론 생소한 유방 수술도 수술 기록지를 봐 가며 암기를 했다. 이혁민 교수의 날카로운 눈이라면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을 보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취가 걸리고 곧 수술이 시작됐다.

퍼스트 자리에 선 이혁민 교수를 보니 가슴이 떨렸다. 이준영 과장과는 상당히 다른 수술 스타일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무슨 일인지 금경태 과장이 신현수에게도 수술을 주지 않아 1년차 중에는 가장 먼저 수술을 받는 셈이었다.

무조건 실수 없이 잘 해내야 했다.

길게 심호흡을 한 김지훈이 인서를 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마취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배운 대로 알고 있는 대로 수술을 진행했다.

김지훈은 흡족하고도 남을 정도로 순조롭게 수술을 하고 있었다. 지적할 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묵묵히 퍼스트를 서던 이혁민 교수의 눈이 반짝였다.

분명 이준영 과장의 손이 보였다. 그런데 송재덕 과장의 손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심지어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고도 할 수 있는 자신의 섬세함까지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 1년차에 해 본 수술이라고는 아뻬가 거의 다일 김지훈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전공의에게서도 보지 못한 일이었다. 문득 다가온 기묘한 느낌에 이혁민 교수가 어깨를 살짝 떨었다.

‘써전으로서의 김지훈의 재능이 이런 것이었나? 신현수처럼 드러나 보이진 않지만 숨겨진 재능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해야 하나?’

잠시 생각을 하는 사이 수술이 끝났다.

장갑을 벗으며 김지훈을 보던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술실을 나갔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구미에서 본 김지훈은 이 자리에 없었다. 한결 발전한 김지훈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것이다.

김지훈도 모처럼 느낀 짜릿함에 싱글벙글 웃다가 어깨를 흠칫거렸다. 근 한 달 만에 수술을 했다는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신기동 교수의 수술을 준비해야 했다.

아무리 국소마취하에 수술을 하고 내과 환자라지만 얼굴도 안 볼 수는 없었다. 시간이 빠듯해 수술복을 입은 채로 내과 병동으로 달려갔다. 병실로 들어간 김지훈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신장 질환은 대부분 만성 질환이었다.

그만큼 장기간 입원하는 사람도 많았고 환자들 역시 무척 예민하기 때문이었다.

푸석푸석하고 새까만 얼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부종으로 부은 팔다리.

무기력한 모습과 무표정한 얼굴.

투석이 필요한 신부전 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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