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환자는 의사의 힘이다 Ⅱ (2)
한영철은 의사이자 환자였다. 누구보다도 환자의 고통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위암으로 수술까지 받았다. 어쩌면 한영철의 경험이 장민수에겐 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영철아, 부탁 하나 하자.”
“지훈이 네 부탁이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퇴원하지 말라는 것만 빼고. 뭔데?”
“환자 한 명만 봐줘.”
“환자를?”
한영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지훈이 장민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뭐가 문제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네가 어떻게 병을 이겨 냈는지 말해 주면 도움이 될 것 같아.”
“내가 그래도 될까? 의사 생활이라고는 인턴 1년이 다잖아. 가벼운 질환을 앓는 환자면 몰라도 그런 환자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하나도 몰라.”
“넌 암을 이겨 냈잖아. 그보다 더 큰 경험이 어디 있어? 그냥 형이 동생한테 조언해 주는 것처럼 편안하게 생각해. 영철아, 부탁한다.”
환자를 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주저하던 한영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훈은 곧바로 한영철과 함께 장민수를 찾았다. 그리고 하영희를 밖으로 불러냈다. 옆에 사람이 있으면 창피할지도 모르는 경험까지 꺼내기는 힘들 것이다.
근 한 시간이 지나서야 한영철이 나왔다. 흐뭇해하면서도 눈가가 벌게져 있었다. 장민수 역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민수야,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도움이 됐기를 바란다.’
김지훈은 간절한 마음으로 장민수를 보았다. 그날 밤 하영희가 병원 밖에서 죽을 사 왔다. 흔하게 보는 일이라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한영철이 퇴원을 하며 먼저 장민수에게 들렀다.
마침 시간이 난 김지훈이 함께 따라나서자 한영철이 손을 들어 막았다.
“환자들끼리만 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잠시 빠져 주세요.”
멀뚱멀뚱 밖에서 기다리던 김지훈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한영철은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렸다. 조기 위암이라고 하지만 진행된 암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치료에 5년 생존율도 95퍼센트를 조금 넘는 정도였다. 백 명 중 다섯 명은 사망한다는 말이었다.
한영철은 누구보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밝게 웃으며 암이란 질병에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치료는 의사의 몫이지만 그 이후는 환자의 몫일지도 몰랐다. 한영철은 그 두 가지를 모두 뼈저리게 경험했다.
한영철은 과연 어떤 의사가 될까?
그날 오후 수술 방에서 올라온 손일석이 김지훈의 목을 조르며 난리를 쳤다.
“이 자식들이 간댕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구나. 감히 내게 보고도 안 하고 퇴원을 한 놈이나 시킨 놈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로다. 내 분노를 어찌 감당할 생각이더냐.”
그놈의 무협이 또 나왔다.
김지훈이 캑캑거리며 소릴 질렀다.
“난 너 꼭 보고 가라고 했지. 근데 영철이가 그냥 간 거야. 난 죄 없어, 인마.”
“어쭈! 영철이를 팔아? 넌 죽었어. 이건 배신이야, 배신.”
혹 떼려다 혹 붙였다. 마침 유석재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손일석에게 죽을 뻔했다. 손일석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
주말이 성큼 다가왔다. 바깥은 온통 다가오는 연말과 크리스마스로 들떠 있었다. 의사나 간호사들도 은근히 분위기에 휩쓸려 조그만 일에도 크게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일반 외과 병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개는 손일석이 주범이었고 간간이 이경석이 웃음을 유발했다. 김지훈 역시 즐겁게 웃고는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을 떠나지 않는 장민수 때문에 불현듯 다가오는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십이지장루는 이혁민 교수도 놀랄 정도로 좁아졌다.
온몸을 퉁퉁 붓게 했던 부종도 많이 빠졌다. 하얗고 동그랬던 얼굴에서 제법 각이 진 턱을 볼 수도 있었다. 이젠 앉는 것도 상당히 수월해져 혼자서도 가능했다. 그런데 식사와 거동 문제가 해결이 되질 않았다.
“민수야,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 그래야 걸을 힘이 생기지.”
“노력하고 있는데 먹고 싶질 않아요.”
“그래? 혹시 뭐 먹고 깊은 거 없어? 있으면 형이 사다 줄게. 민수가 먹고 싶다면 내가 뭐든지 사 온다.”
“지금은 다 별로예요.”
김지훈으로서도 장민수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볼 때마다 죽이라도 한 그릇 다 먹었는지 혹시 한 걸음이라도 걸었는지 묻는 것이 일과였다.
환자는 장민수만이 아니었고 1년차로서 해야 할 일과 욕심도 김지훈을 힘들게 했다. 수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이혁민 교수는 가뭄에 콩 나듯 퍼스트만 세울 뿐이었다.
“김지훈, 수술에 욕심만 낸다고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시스트를 서며 많이 보는 것이 지금은 네게 더 필요해. 지금은 열심히 보고 배워야 할 때다.”
김지훈의 눈치를 알았는지 수술을 끝낸 이혁민 교수가 조용히 말했다. 웃고는 있었지만 이번 주 내내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좋지 않았고 말수도 사라져 함부로 입을 열 분위기도 아니었다.
“예, 선생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오늘 회의가 있어서 오후 회진은 못 도니까 철한이하고 돌아.”
회진까지 못 돈다면 꽤 중요한 회의인 모양이었다.
이래저래 심난한 나날이었다.
그날 저녁 외래에서 중대한 회의가 열렸다.
일주일 전에 1년간 미국 연수를 떠났던 신기동 교수가 돌아왔다. 주 전공이 혈관 수술 및 신장 이식으로 파트 하나를 더 만들어야 하는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 문제를 사전에 상의하던 중 이혁민 교수는 뜻밖에 문제에 직면했다. 그 때문에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막 귀국한 신기동 교수에게 환자가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과 신장 파트와 협진을 시작하면 상당히 많은 환자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게 언제이냐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일이긴 했다.
그렇다고 혼자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1, 2, 3년차를 모두 배정할 여력이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최소한 전담 전공의 두세 명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금경태 과장이 전공의 배정에 제동을 건 것이다.
모든 교수들이 전공의를 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금경태 과장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회의실에 무거운 분위기만 감돌았다.
금경태 과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혁민 교수와 오상익 교수를 보았다. 아무리 과장이라고 해도 무작정 혼자 밀어붙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기동이도 조심해야 할 놈이야. 일단 개편안이 내 뜻대로 관철되기 전에는 최대한 묶어 놔야 돼. 섣불리 마음대로 환자를 보게 했다가는 변수가 너무 커질 수 있어. 아직도 결정을 안 하다니 신동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제길! 임동완. 뭐 해?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싶으면 이럴 때 나서야지.’
금경태 과장의 눈짓에 임동완 교수가 가세했다.
“과장님 말씀대로 당장 전담 전공의를 배치하고 싶어도 그럴 여력이 없습니다. 환자가 많을 것이란 확신도 없고요. 일단 제 생각에도 1~2년차 중 한 명 정도만 신기동 선생님의 파트를 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차후 환자가 늘면 내년에 다시 배정을 논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상익 교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임동완 교수가 대장 항문 파트의 주임 교수인 자신의 뜻을 정면에서 반대한 것이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이혁민 교수가 눈가를 좁혔다.
‘금 과장님, 임동완 교수와 나를 믿고 오상익 선생님과 신기동 선생님을 견제하시려는 것 같은데 욕심을 너무 내시는 거 아닙니까?’
중대한 기로에 섰다.
금경태 과장의 말을 수긍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 불가함을 말했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내년 개편안이 확정되기도 전에 섣불리 의중을 드러냈다가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금경태 과장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 그만한 힘과 배경이 있었고 한번 작정을 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했다. 지금은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과장님, 그럼 어느 파트 몇 년차가 파트를 겸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혁민 교수의 말에 금경태 과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혁민 교수는 자신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여겼다.
이제 오상익 교수만 확실하게 견제하고 개편안만 승인되면 완벽하게 일반 외과 전체를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누구를 보내지? 오상익 파트에서 빼낸다면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개편이 결정된 후라면 신경 쓸 이유도 없지만 그 전에는 오상익과 필요 이상으로 등질 수는 없지. 일단 2년차 이상은 안 되니까 1년차를 보내야 하는데 그렇다고 신현수를 보낼 수도 없고.’
답은 하나였다. 나직한 콧소리를 내며 고민하던 금경태 과장이 이혁민 교수를 보았다.
“이 교수, 자네 파트 1년차가 누구지?”
“김지훈입니다.”
“아! 김지훈이었지? 나도 이제 늙었나 봐.”
마치 다른 뜻은 없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톡톡 친 금경태 과장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1년차의 능력과 업무량을 볼 때 두 파트를 동시에 맡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트레이닝조차 제대로 받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김지훈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상관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이준영 과장에게 수술을 배웠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어떻게든 구석으로 치워 버리고 싶었다.
‘걸리는 일이 생기면 꼭 그 안에 이놈이 있다니 웃기는 일이군. 네가 애를 쓴다는 것은 안다만 내게는 아무 소용없는 일이야. 감당할 수 없는 업무를 주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배울 수 없는 게 현실이지. 꼴도 보기 싫은 놈.’
“그럼 김지훈을 보내지.”
“예? 1년차에게 두 파트를 맡기신다구요?”
이혁민 교수는 물론 임동완 교수조차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여러 문제가 걸렸다지만 이제 1년차인 김지훈에게 이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다.
‘금 과장님, 이 정도까지 나오다니 도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입니까? 김지훈이 당신에게 무슨 위협이 된단 말입니까?’
이혁민 교수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과장님, 그건 안 됩니다. 1년차에게 두 파트를 맡긴다면 어느 쪽도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고 트레이닝을 시킬 수도 없습니다.”
당연히 예상한 반발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의자에 몸을 묻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빠르면 한 달 내에 개편안이 최종 확정된다. 아무리 길어도 3개월만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오 교수님 파트에서 전공의를 뺄 수도 없고 내 파트도 조금 그래. 그리고 이참에 브레스트(유방)는 2년차에게 맡겨.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1년차와 수술하기는 그렇잖아?”
“그래도 과장님, 이건 아닙니다.”
“어허! 이 사람아, 나도 힘들어. 하지만 전체를 봐야지. 여력이 있는 파트는 대장 항문 파트뿐이지만 우리 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커. 게다가 당장 환자가 확장될 가능성도 신기동 교수 파트보다는 훨씬 큰데 어떻게 하겠어. 일단 초반에만 맡기고 정 힘들다 싶으면 다시 논의하자구. 내 뜻은 이러니까 이만 끝내지.”
길게 끌어야 금경태 과장에게는 좋을 일이 없었다. 이혁민 교수가 채 반박을 하기도 전에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잠시 고민을 하던 오상익 교수도 나직한 한숨만 내쉬고는 이혁민 교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금은 금 과장 뜻대로 하는 게 좋겠어, 이 교수.’
오상익 교수마저 물러난다면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회의에 참석했던 교수들이 묘한 소리들을 내며 하나둘 자리를 떴다. 임동완 교수만이 줄을 잘 잡았다며 남몰래 웃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의 힘과 권위를 새삼 느낀 것이다.
홀로 남은 이혁민 교수가 멍청히 천장을 보다 말고 웃었다.
“김지훈, 일복을 타고났구나.”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작 일복을 핑계로 대는 것뿐이었다. 유방 파트를 2년차가 맡는다고 해도 무리인 것은 확실했다. 신기동 교수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귀국하기 전에 이미 환자에 대한 문제는 생각을 해 두고도 남았다.
이혁민 교수의 시름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