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05화 (205/1,329)

제5화 환자는 의사의 힘이다 Ⅱ (1)

일반 외과 개편안 및 음성 병원에 관한 안건.

1. 금경태 과장이 맡고 있는 간담도 파트와 이혁민 교수의 위장관 및 유방 파트를 형식과 내용 면에서 모두 완전히 통합한다.

2. 오상익 교수의 대장 항문 파트 강화를 위해 천안의 구영선 교수를 서울 병원으로 발령하고 연수를 끝내고 귀국한 신기동 교수의 혈관 파트와 통합한다. 신기동 교수의 경우 환자가 부족할 수 있기 때문에 3~4개월 동안은 전공의 한 명만 배정한다.

3. 천안 병원의 발전을 위해 구영선 교수를 과장으로 임명하거나 혹은 구영선 교수를 서울로 발령을 낼 경우 새로운 인재를 추천받아 임명한다. 송재덕 과장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해 부병원장으로 추천한다.

4. 구미 병원은 현 체계를 그대로 가져간다.

5. 지역 의료 발전을 위해 인수한 음성 병원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폐쇄한다. 그중 필요한 의료 인력은 혁신위원회에서 선별해 재배치한다.

별첨 1. 현재 일반 외과를 비롯한 모든 과는 각각의 영역을 세분해 보다 전문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급하게 이를 시행할 경우 향후 3~4년 후에는 도리어 일반 외과를 통제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별첨 2. 현직 보사부 국장인 정한득 문제에 유의해야 한다. 곧 차관 대우까지 승진이 예상되므로 현재까지 맺은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할 필요가 있다. 병원 확장에서 전공의 인원 배정까지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이기에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사람이자 관계이다.

신동석이 향후 3~4년이란 말에 눈길을 주었다.

신현수가 전문의가 되는 때였다. 일반 외과가 확실한 기반이 되지 못하면 어떤 자리를 준다고 해도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나이와 경험 부족은 분명한 약점이었다.

‘역시 금경태야. 경쟁이 될 만한 사람은 모조리 힘을 꺾어 놓는군. 오상익 교수와 송재덕 과장에 이혁민 교수는 그렇다 쳐도 이준영 과장까지? 우리 현수를 이용해 최소한 4~5년은 일반 외과를 한 손에 쥐고 싶다 이거지. 현수에게는 이혁민 교수의 안보다 이게 유리하긴 하겠군. 하지만 이 안을 어떻게 실행시키려고 하지? 현재로는 이 정도의 힘까지는 없는데 말이야.’

신동석이 팔짱을 끼고는 고민에 잠겼다. 금경태 과장의 반응을 보며 한참 시간을 끈 후에야 입을 열었다. 어딘가 조급해 보이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일반 외과 내에서 반발은 없겠습니까?”

“큰 반발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오상익 교수의 경우 파트가 강화되니 충분히 설득할 수 있습니다. 송재덕 과장도 실권이 거의 없다지만 부병원장 자리에 임명하면 별다른 말은 안 할 것 같습니다. 평소 보직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과장 자리에 있으면 과 내의 일도 있지만 전체적인 상황을 봐야 하는데 그게 좀 부족해서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신기동 교수는요? 미국 연수까지 다녀왔는데 전공의 한 명만 배정하면 불만이 있지 않겠어요?”

“지금도 전공의들이 모자라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환자를 얼마나 볼지 모르는데 성급하게 파트를 만들면 인력 낭비가 발생할 겁니다. 차후 환자 상황을 보며 파트 독립 문제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럴듯한 논리였다. 하지만 세상일이 마음대로 된다면 실행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재단 이사장의 힘으로도 병원 개혁을 하지 못해 금경태 야심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신동석이 어딘지 모르게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금경태 당신이 원하는 건 뭐지? 이 정도로 만족할 사람이 아닌데.’

“말을 들어서는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하나만 뒤틀려도 실행하기 쉽지 않을 텐데 대비책이 있습니까?”

금경태 과장의 눈이 번쩍였다.

지금이야말로 가장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야 할 때였다.

“역시 이사장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군요. 정말 예리하십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신현수 선생의 입지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지 않으면 보고드린 것처럼 의사들이 갖는 조그만 자존심도 꺾지 못합니다. 당연히 누군가는 안에서 확실하게 밀어야 합니다. 그래서…….”

금경태 과장이 말꼬리를 흐렸다. 이제 본격적인 말을 꺼낸다는 생각에 신동석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죠?”

“사실 일반 외과를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서는 과장의 권한만으로는 밀어붙이기가 힘듭니다. 또한 병원의 발전을 위해서는 보사부 정한득 국장을 확실하게 잡아야 하는데 그 역시 과장의 힘으로는 힘든 면이 많습니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강한 힘을 실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사장님의 전적인 판단과 결정에 달린 일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흐음! 틀린 말도 아니군요. 보사부 국장 눈에는 재단 이사장도 별거 아니니 말입니다. 허허허!”

“그렇습니다. 저도 친구라고 하지만 여간 껄끄럽고 힘든 게 아닙니다. 뭔가를 얻으려면 줄 게 있어야 하는데 지금 제 능력으로는 요구 조건을 맞추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신동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금경태 과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 병원 내 개혁조차 상당히 미진했다. 물론 신상민 과장과의 의견 충돌이 주요한 이유였지만 의도적인 면도 있었다. 아직도 금경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신동석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병원장을 하고 싶다, 이 말이군. 금 과장을 병원장에 앉힌다? 손해보다는 득이 클 수도 있겠지.’

“알겠습니다, 금 과장. 그럼 일 보세요. 충분히 고민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예, 이사장님.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전 상관이 없습니다. 이사장님과 신현수 선생, 그리고 병원만 발전한다면 기쁘게 결정을 따를 수 있습니다.”

“금 과장 말을 들으니 든든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이사장실을 나온 금경태의 얼굴이 상기됐다.

지금까지 봐 온 신동석이라면 자신이 제출한 안에 상당히 긍정적이라는 말이었다. 신현수의 장래와 정한득 문제를 감안하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설혹 자신의 야심을 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서로를 이용해서 최대한의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던 신동석이 책상 서랍에서 또 하나의 문건을 꺼냈다. 이혁민 교수가 제출한 개편안이었다. 금경태 과장과는 정반대의 개념이 담겨 있었다. 금경태 과장은 이혁민 교수가 다른 개편안을 만들었는지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과를 세분해 전문성을 강화해야 병원이 산다. 당장 서울도 네 파트로 나눠야 하고 천안 병원 역시 똑같이 진행시켜야 한다? 음성 병원의 보고서를 볼 때는 확실히 살아난 것 같지만 여기에 이준영 과장까지 서울로 불러? 현수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고 오로지 병원만 생각한단 말이지. 이 방안대로 하면 내가 은퇴할 때가 돼도 현수가 병원장이 되기 힘들겠어.’

신동석이 두 개의 안을 앞에 두고 고민을 하다 창가로 다가갔다. 처음 설립했을 때보다 몇 배 이상 커진 서울 병원의 규모는 신동석 자신의 자부심이었다.

그러한 자부심을 마지막으로 완성시키는 열쇠는 신현수였다. 금경태 과장은 이를 알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충분히 충족시켰다. 하지만 이혁민 교수는 신현수에 관한 문제는 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신상민 과장과 이혁민 교수라! 금경태의 야심을 적절히 이용하고 통제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군.’

창밖으로 들리는 요란한 앰뷸런스 소리에 신동석이 한동안 응급실 쪽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또 어떤 환자가 왔을까?

신동석의 눈에 신현수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의사로서의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고 수많은 의사들의 지지를 받아야만 병원 전체를 운영하고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신동석의 눈에도 많은 약점이 보였지만 끈기 있게 신현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젊기에 수많은 실수와 착오를 거치며 단단하게 성장할 것이다.

훗날 능력이 부족하다면 재단을 쉽게 물려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신동석은 자신의 자식이 최고의 의사가 되리라는 사실만은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김지훈이 답답한 신음을 터트렸다.

비경구 영양 요법을 중단했지만 장민수는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이제는 김지훈을 완전히 믿는지 복부 팽만과 소화불량 등 자신의 고통과 불편까지 호소하고 있었다. 그게 도리어 더 김지훈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내과와 상의를 하고 장기 입원이 많은 신경외과까지도 찾아갔다. 하지만 뾰족한 답이 없었다. 한 발만 내디디면 모든 문제들이 차례로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장민수가 걷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오늘 입원한 신환들을 확인하던 김지훈이 모처럼 웃을 수 있었다. 올겨울에 위암 수술을 한 한영철의 이름이 보인 것이다. 6개월에 걸친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마치고 3개월이 지나 정기검진을 받으러 온 것이다.

급히 예전 차트를 확인했다.

3개월 전에 시행한 내시경과 복부 CT는 깨끗했다. 이번에도 같은 결과를 보인다면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한달음에 한영철이 입원한 병실을 찾았다.

“영철아!”

“지훈아! 야! 이게 얼마 만이야?”

“너 수술하고 처음 보네. 어디 아픈 데는 없고?”

“그럼. 이젠 팔팔해.”

많이 야위었지만 혈색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그동안 한 번도 찾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미안하기만 했다.

“연락 한 번 못해서 미안해. 항암 치료 받을 때 힘들지는 않았어? 지금 밥은 잘 먹고? 하루 다섯 끼 이상은 먹고 있지?”

한영철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지훈아, 한 가지씩만 물어봐, 인마. 다른 건 몰라도 항암 치료는 정말 힘들더라. 나중에는 먹을 것만 봐도 토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나도 명색이 의사잖아. 환자들이 겪는 고통을 미리 아는 것도 나쁘지 않지, 뭐.”

“오더 보니까 내일 검사를 미리 다 예약했던데 괜찮으면 모레 퇴원하나?”

“그래야지. 환자로 병원 생활 오래 하는 건 솔직히 아니더라. 지겹고 힘들고 아픈 사람만 보이니까 그냥 나도 따라 아픈 것 같았어. 지훈이 너는 잘하겠지만 환자들 정말 열심히 봐. 인턴만 했지만 의사일 때와는 병원이 완전히 다르게 보여. 솔직히 무서운 곳이거든.”

김지훈이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환자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이고 무섭기까지 하다는 말에 더욱 강한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영철이 치료 과정과 자신이 회복될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넋두리처럼 늘어놓았다. 자신의 고통을 알아달라는 말이 아니라 환자의 아픔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김지훈이 한영철의 어깨를 잡았다.

“알았어. 네 말 명심할게. 근데 너 내년에 어떻게 할 거야? 편한 과에 들어가면 괜찮지 않을까?”

“야, 김지훈, 나도 일반 외과 지원했던 사람이야. 골방에 박혀 일하는 건 싫다. 어쨌든 외과 쪽은 체력이 받쳐 주질 못할 테니까 그냥 조금 더 배워서 개업이나 하려고. 군대 면제에 전공의도 안 하니까 시간은 엄청 많잖아. 나 개업하고 혹시 환자 보내면 잘 봐줘야 된다.”

“당연히 그래야지. 근데 전공의 때는 몰라도 나중에는 병원에 남아야 그것도 가능하지.”

“아이고! 천하의 김지훈이 엄살을 떠네.”

한영철의 말에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일어났다. 너무 반가워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급히 손을 흔들며 나가는 김지훈을 보며 한영철이 씁쓸하게 웃었다.

‘하필이면 지훈이를 보냐. 제일 좋아하고 부러워했던 놈인데. 에이! 나도 일반 외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문득 자신의 꿈이 다시 생각난 것이다.

다음 날 한영철의 검사 결과가 바로 나왔다. 다른 환자들의 검사 결과보다 훨씬 빠르게 나온 편이었다. 한영철이 의사라는 사실을 무시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김지훈이 급히 병실로 달려가 한영철에게 결과를 알려 주었다.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인 한영철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보는 것은 좋았지만 그 이상으로 병원이 지긋지긋한 모양이었다. 뒤늦게 달려온 손일석이 혀를 찼다.

“영철아, 뭐가 그렇게 급해? 그래 봤자 내일 퇴원이야.”

“일석아, 환자라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잖아. 나 몸 회복시키느라고 거의 매일 이를 악물고 운동했다. 밥 다섯 끼 먹어 봐라. 냄새에 질려. 그래도 억지로 먹었어. 환자로 병원에 있는 건 단 한 시간이라도 적으면 적을수록 좋아, 인마.”

“하긴 그렇겠지. 나도 어떤 때는 이놈의 허연 벽이 보기 싫을 정도니까. 가끔 환자한테 문제라도 생기면 정말 도망가고 싶더라. 그러니 아픈 놈은 오죽했겠어.”

“그러니까 넌 아프지 마라.”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김지훈이 고개를 반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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