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환자는 의사의 힘이다 Ⅰ (2)
눈가가 벌게진 김지훈이 딴청을 부리며 조용히 간이침대에 앉았다. 하영희가 눈물을 닦으며 김지훈을 보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에이 씨! 눈물 나려고 하네. 의사가 창피하게 환자 앞에서 울면 안 되는데.’
흠흠 소리를 내며 목을 돌린 김지훈이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수야, 힘들게 앉았는데 어떻게 하냐. 치료하게 다시 눕자. 그리고 아직 형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 알지. 네가 일어나 걸을 때까지는 선생님이야. 어머니, 전 민수가 일어나 앉을 줄 이미 알고 있었는데 왜 울고 그러세요? 웃어야죠. 민수야, 눕자.”
마치 산을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더 힘든 것처럼 몸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눕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등을 받쳐 주다 말고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미역처럼 늘어졌을 때는 장민수가 아직은 체중을 유지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스스로 힘을 주며 움직이려 하자 생각보다 너무 가벼웠다. 부종이 아니었다면 앙상하게 뼈만 남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너 퇴원시키고 말 테니까.’
이제는 모두들 웃을 만했다. 하지만 아무도 입조차 열지 못했다. 즐거우면서도 먹먹한 가슴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탓이었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기쁨과 함께 한 줄기 빛을 본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했다.
토요일 두 번째 데이트 시작이었다.
억지로 끌려간 장충동 족발집에서 고경아가 어마어마한 족발의 크기에 소리까지 질렀다.
“아우! 징그러워서 이걸 어떻게 먹어요?”
“경아 씨, 이거 하나만 먹어 봐요. 만일 맛없으면 다신 안 오고 맛있으면 가끔씩. 어때요?”
김지훈이 온갖 감언이설로 고경아를 현혹했다.
결국 고경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기름기가 적당히 빠진 살 한 점을 새우젓에 살짝 찍고는 고추와 양념장을 둘러서 상추쌈을 만들었다. 마늘이 빠진 것이 아쉬웠지만 싫어하는 사람에겐 마늘 맛이 고통일 것이다.
“경아 씨, 아!”
마치 못 먹을 걸 먹는 것처럼 눈을 꼭 감고 입을 벌린 고경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한 입 씹었다. 족발에서 발 냄새가 날 리가 없다. 새우젓과 양념장의 맛에 고추와 고소하고 쫄깃한 고기가 어우러졌다. 고경아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맛있다!
한마디로 이거였다. 맛있고 좋은 안주는 술 도둑이었다. 맥주 한 병과 소주 한 병이 금세 사라졌다. 술기운이 기분 좋게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족발집을 나왔다.
이제는 한 발 더 진도를 나갈 때가 됐다.
남자의 본능이 이를 알려 주고 있었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슬며시 고경아의 손을 잡았다. 어색한 듯 고개를 돌리던 고경아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고경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맥주 때문일까? 김지훈도 고경아도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어느새 병원에 도착했다. 김지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쉬운 작별을 하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한참이 지나도 고경아의 손에서 느껴진 감촉이 지워지질 않았다.
가슴이 은근히 설레었다.
‘내일 훈철이 형까지 만나면 이번 주말은 정말 최고네. 내일은 뭐 먹지? 어라? 그럼 경아 씨 손을 못 잡을 수도 있네. 제길!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그나저나 치료할 때 술 냄새가 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나.’
장민수 앞에서 술 냄새를 풍길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이 수술 방으로 내려가 마스크 한 장을 집어 왔다. 병실 문을 열자 김지훈을 본 장민수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하영희의 손을 잡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
이마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
이번에는 정말 도와주고 싶었지만 술 냄새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끝까지 문 앞에 서서 장민수가 앉기를 기다리던 김지훈이 아무 말도 없이 치료를 시작했다.
최대한 숨을 참았다. 숨이 턱 밑에 차면 최대한 태연하게 문밖으로 나와 숨을 쉬었다. 하영희가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술을 마신 상태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도리어 웃기만 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니었고 김지훈이 애쓰는 모습은 고맙기만 했다. 1년차에게는 귀하기만 한 주말 오프 때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밤 12시가 넘어 왔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행복한 일이었다.
마지막 숨을 크게 들이마신 김지훈이 잠시 장민수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히터에서 나오는 열기에 술기운이 다시 오르며 눈가까지 뜨거워졌다. 공연히 미안해진 김지훈이 장민수를 눕히고는 어깨를 툭툭 치며 돌아섰다.
문밖으로 나와서야 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머니, 저 곧 동생 하나 생길 것 같지 않습니까? 형 소리 빨리 듣고 싶네요.”
김지훈이 사라지자 장민수가 하영희를 보았다.
“엄마, 나 잘했지?”
“그럼, 우리 아들. 정말 잘하고 있어. 조금만 더 노력하면 금방 걸을 수 있을 거야.”
“근데 이 냄새 술 냄새 아냐?”
“설마. 소독용 알코올 냄새겠지.”
장민수가 미심쩍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나 앉았다. 베개를 등에 받치고는 한참 동안 TV를 보았다. 재밌는 영화라도 보는지 하영희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장민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김지훈은 다음 날 오전에만 세 차례 드레싱을 했다. 보통 주말 오프 때는 다른 파트 1년차들이 대신 드레싱을 했지만 이번 주는 아예 파트 전체 환자 드레싱까지 했다. 평소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장민수에게 한두 번은 빠질지 모른다는 말을 하고는 급히 병원을 빠져나왔다.
‘어휴! 오프도 아니고 근무도 아니고 내 인생도 참 힘들다. 그래도 민수야, 너만 일어나면 난 좋다.’
그 후 정훈철 가족을 만났다. 여기에 고경희까지 나왔다. 점심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다 굴을 먹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 겨울이 제철이긴 했지만 시간도 그렇고 해서 망설이는 찰나 정훈철이 동대문 시장을 외쳤다.
성인 다섯 명에 승희까지 한 차에 탔다.
일요일의 한적한 거리에 동대문 시장까지 편하게 갔다.
정훈철을 따라 의류와 장신구들로 가득한 시장을 구경하며 해산물 시장에 도착했다. 시장 입구에 굴 껍데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한눈에도 족히 칠팔십 개 정도 되는 좌판에서 온갖 해물을 팔았다.
“역시 겨울에는 굴이야. 생으로 먹고 찜으로 먹고 그것도 싫으면 구워 먹고. 하하하. 오늘 지훈이가 사는 거니까 마음 놓고 먹자.”
생굴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소주 한잔을 했다. 약간은 철이 지났지만 냉동 꽃게 찜을 곁들였다. 새우와 약간의 회까지 정말 배터지게 먹었다. 여자들이 수다를 떨며 한참 먹고 있을 때 끝에 앉아 있던 김지훈과 정훈철이 나직한 목소리로 실랑이를 벌였다.
“형, 미리 나한테 말은 했어야죠.”
“야, 인마, 의료 봉사 왔을 때 이미 게임 끝난 거야. 거기서 뭉그적대면 그게 양다리지. 그리고 솔직히 너도 처제 보는 눈이 심상치 않던데 뭘 그래? 도리어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결과적으로는 그런데 다른 여자 얘기는 왜 해요?”
“어라? 그럼 대충이라도 알아야지. 그래야 처제도 확실하게 결정을 할 거 아냐. 넌 나한테 물어본 그때부터 고민을 해야 됐어, 인마. 하여튼 난 네가 제대로 선택한 것 같아서 기분 좋다. 동생하고 처제를 다 잃을까 봐 걱정했거든.”
입을 내밀던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형, 정말 그렇죠?”
“그럼, 인마. 너 많이 행복해 보인다.”
“요새 같으면 일할 맛이 나요. 존경하는 선생님에 윗년차 선생님들도 잘해 주시고 환자까지 힘을 준다니까요. 경아 씨하고 형도 자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좋네요.”
“자식이 말로만 좋대요. 전화 한 통 안 한 놈이.”
김지훈이 꽃게를 집으며 딴청을 부렸다.
“야! 철 지났다고 하는데 속이 꽉 찼네요.”
“철에 잡은 걸 얼렸으니까 그렇지.”
정훈철이 눈을 부라리면서도 소주잔을 내밀었다. 결국 참는다 참는다 하면서도 한 병을 비웠다. 알딸딸한 느낌까지 겹치자 기분이 붕 뜬 김지훈이 동대문 시장을 가리켰다.
싸고 질 좋은 옷에 눈이 돌아간 여자들이 여기저기 둘러보며 옷 하나씩을 골랐다. 마지막까지 승희에게 무엇을 입힐지 실랑이를 벌인 끝에 돈을 내는 사람 마음대로 하기로 했다.
고경아와 충분히 상의한 김지훈이 예쁜 원피스 하나와 반짝이는 구두 한 짝을 샀다. 승희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자랑을 하다 펄쩍 김지훈의 목에 매달렸다.
“어이쿠! 이제는 무겁네. 그새 승희가 엄청 컸구나,”
“삼촌, 난 조금 있으면 학교 가.”
“벌써? 초등학교를 가? 야! 대단하네.”
“삼촌, 나 일곱 살이야.”
술도 깰 겸 카페에 들러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어둠이 몰려왔다. 시계를 보니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간에 한 번은 이경석에게 부탁을 했지만 이젠 들어가야 할 때였다.
정훈철이 웃으며 고경아와 둘이 택시를 타고 가라고 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 고경희만 태우고 사라졌다. 황당한 일이었지만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고경아의 손을 잡았다. 라디오와 길가 상점에서 틀어 대는 캐롤송이 경쾌했다. 택시를 탄 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병원에 도착했다.
한적한 길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지훈 씨, 다음 주가 크리스마슨데 못 보겠네요?”
“그러게요. 하지만 신정 연휴 때 오프라는 사실을 우린 잊으면 안 됩니다. 새해를 함께 맞을 수 있잖아요. 그게 더 낫지 않아요?”
“생각해 보니까 그게 훨씬 좋겠네요.”
고경아가 밝게 웃었다. 김지훈이 순간 어깨를 움찔거렸다. 사람들의 눈만 아니었다면 입술을 훔쳤을지도 몰랐다.
‘웃는 모습은 정말 미스 코리아다.’
정말 즐겁고 기분 좋은 주말 오프가 그렇게 지났다.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1년차에게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는 다른 세상 일이었다. 오로지 일과의 사투를 벌일 뿐이었다. 김지훈도 분위기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침대에 앉는 것까지 해낸 장민수가 일어서질 못했다.
간신히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설 수는 있었지만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그나마 채 2~3분을 버티지 못했다. 하영희가 하루 종일 다리를 주무르고 근육을 풀어 준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 밥 먹는 양은 좀 늘었나요?”
“두세 숟갈 정도 먹고 나면 더는 못 먹네요.”
“민수야, 조금 더 먹을 수는 없을까?”
장민수가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젠 십이지장루도 많이 좁아졌다. 장민수의 의지도 돌아왔다. 입맛이 문제가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난관이었다. 입맛 돌아오는 약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만 깊어졌다.
그 시간 금경태 과장도 고민에 빠져 있었다.
드디어 신동석 이사장이 일반 외과 개편안을 요구한 것이다. 요즘 일반 외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이준영 과장이 다시 수술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꿈자리까지 뒤숭숭할 판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해결해야 두 다리를 뻗고 잘 상황이었다.
이사장실로 올라가는 금경태 과장이 몇 번이나 자신의 개편안을 확인했다. 신동석이 재가를 하는 순간 이준영 과장 문제는 물론 다른 걱정들까지 깡그리 사라질 것이다. 이미 많은 교수들에게 병원장으로 자신을 추천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았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내년에 2년 임기의 병원장만 되면 일반 외과는 당연히 내 것이 된다. 큰 과오가 없는 한 연임은 당여한 일이니까 확실하게 병원을 장악할 수 있어. 그때는 신동석이라고 해도 날 함부로 대하진 못하겠지. 이번에 기필코 개편안을 통과시키고 병원장이 돼야 해.’
눈빛을 굳힌 금경태 과장이 노크를 했다. 들어오라는 신동석의 목소리에 복장을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어서 와요, 금 과장. 혁신위원회 일로 바쁠 텐데 개편안까지 짜려니 힘들었겠습니다.”
“아닙니다, 이사장님. 병원과 이사장님을 위한 일이라면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고마운 말이네요. 그럼 어디 좀 볼까요.”
금경태가 공손하게 개편안을 건넸다.
신동석이 입술을 모은 채 찬찬히 개편안을 살폈다.
마지막에 큰 구미가 당기는 내용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