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03화 (203/1,329)

제4화 환자는 의사의 힘이다 Ⅰ (1)

하지만 무료하기만 한 병원 생활에서 가끔은 놀랄 일이 있어도 좋을 것이다.

‘오프 때도 보자. 민수야.’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직 1년차들이 잘 치료해 줄 겁니다. 그리고 민수야, 너 지금 치료 방법이 완전히 바뀐 거 알지? 하루라도 빨리 일어나 앉아서 먹고 움직이면 그만큼 퇴원이 빨라질 거야. 하지만 반대라면 너 영영 병원에서 못 벗어난다.”

곧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혁민 교수도 몇 편의 논문에 실린 것을 100프로 확신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하영희에게도 그것만은 설명하지 않았다. 평생 그런 날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주절주절 얘기를 하며 치료를 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사기에서 느껴지는 저항이 약간은 강해진 것 같았다. 흠칫 놀라며 주사기 눈금을 확인했다.

20㏄ 정도 들어가야 느껴지던 저항이 이젠 17-18㏄ 정도만 들어가도 느껴지고 있었다. 십이지장루가 그만큼 좁아졌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오래간만에 환하게 웃었다.

하영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길이 좀 좁아진 것 같네요. 이 상태로만 가면 정말 좋아질 것 같은데요. 민수야, 잘됐지. 자식. 이제 너만 밥 먹고 움직이면 돼. 야! 기분 정말 좋네.”

간호사도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김지훈이 의국으로 달려가 1년차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치료할 때 보다 주의를 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통로가 좁아졌으니까 다음부터는 조금만 더 신경을 써 줘. 야! 정말 고맙다. 일석아, 현수야, 경석이 형. 정말 고마워.”

“어이! 마이 프렌드, 우리가 한 일이 뭐가 있어. 다 네 정성 덕분이지. 그래도 기분은 굿이네.”

“무슨 소리야, 인마. 나 혼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민수 퇴원하면 내가 거하게 한잔 쏠게.”

“오케이! 술 좋다. 현수야, 최선을 다하자. 공짜 술 무지하게 맛있어, 인마. 경석이 형, 이태원 콜?”

“이태원 콜! 탱크 콜! 신현수 콜!”

“형, 나는 술 잘 안 마셔요.”

“현수야, 넌 우리 동기 아니냐? 동기 사랑이 곧 나라 사랑이야, 인마. 까불지 말고 가자. 어? 그런데 일석아, 우리 모두 오프를 동시에 갈 수가 없잖아?”

이경석과 손일석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김지훈 역시 눈을 부릅뜨며 말을 잃었다. 참 심각할 일도 없는 인간들이었다. 신현수가 결국 웃고 말았다.

때아닌 법석에 복도를 지나가던 간호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번 1년차들은 이상하게 웃음도 많았고 의국 안에서는 난리를 치는 적도 많았다. 그간 1년차들이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특히 차갑고 냉정하기로 유명한 신현수까지 가끔 웃음을 터트린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기만 했다.

“정말 희한한 일이네. 그래서 큰소리 한 번 나지 않고 일이 이렇게 잘 돌아가지?”

간호사가 스테이션으로 가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준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장민수를 보는 1년차들의 얼굴이 더욱 심각해졌다.

평소 말없이 드레싱만 하던 신현수까지 빨리 움직여야 퇴원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김지훈의 열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들 말은 못했지만 지금 회복되지 않으면 장민수는 다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드레싱을 마치고 나가는 김지훈을 몰래 보던 장민수가 달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내일이면 2주가 되는 날이었다.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단순한 시간이 장민수에게는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엄마.”

“왜, 민수야.”

2~3일 전부터 은근히 말이 많아진 장민수였다.

하영희의 가슴속에 기대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아들이 벌떡 일어나 걸을 것만 같았다.

“주말에 김지훈 선생님이 정말 안 오실까?”

하영희의 눈이 반짝였다.

“왜, 왔으면 좋겠어?”

“응. 그럼 정말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나 진짜 퇴원하고 싶어. 나도 다른 애들처럼 뛰어놀고 싶어.”

일순 말문이 막힌 하영희가 코를 훌쩍거렸다. 이제는 턱밑이 거뭇해졌지만 중학교 1학년 때가 세상의 마지막인 아들이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간신히 울음을 삼킨 하영희가 장민수의 손을 잡았다.

“민수야, 김지훈 선생님도 쉬셔야지. 우리 아들 치료한다고 잠도 못 주무시잖니. 믿어도 돼. 엄마는 이미 김지훈 선생님이 우리 아들 반드시 퇴원시킬 거라고 믿고 있어.”

“주말에도 날 치료해 줄까?”

7년이란 세월을 잘 버텨 온 장민수였지만 아이와 같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간의 세상이라고는 오직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엄마뿐이었다. TV에서 보여 주는 세상은 다른 사람들의 것이었다.

하영희가 안절부절못했다. 김지훈에게 주말에도 치료해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시뻘게진 눈과 쌓이다 못한 피로가 온몸을 짓누르는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식을 살릴 수 있는 일이었다. 이보다 더한 일도 해야 하는 것이 엄마였다. 결심 끝에 드레싱을 하러 온 김지훈을 쫓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저, 선생님.”

“예, 어머니. 민수 때문에 힘드시죠? 저도 답답하네요. 민수가 의지만 가지면 모든 게 막 풀릴 것 같은데 참 어렵네요.”

“몸은 컸지만 아직도 중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죠.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이혁민 교수가 회진을 올라왔다. 김지훈이 고개를 숙이고는 급히 달려갔다. 하영희가 한숨만 쉬었다. 회진이 끝나고 난 뒤에도 김지훈은 보이지 않았다.

하영희는 이제나저제나 김지훈을 기다렸다. 그런데 김지훈 대신 손일석이 드레싱을 하러 왔다. 그는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웃으며 장민수의 어깨를 쳤다.

“장민수, 이제 좀 일어나자. 너 일어나서 걸으면 김지훈을 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며. 나도 같이 하자. 어때? 한꺼번에 형 둘이 생기는 거야. 잘 생각해 봐라. 손해 보는 장사 아니다. 나 같으면 그냥 일어난다. 어디서 이런 형들을 만나겠어?”

말은 가볍게 내뱉는 것 같지만 눈빛과 손길은 신중하기만 했다. 십이지장루가 생각보다 빠르게 좁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15㏄ 정도로도 저항이 확연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후우! 석 달 전에 이렇게 했으면 지금쯤 얼마나 좋아졌을까? 제길!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미안하기만 하네. 민수야, 제발 일어나자. 안 그러면 평생 네 얼굴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드레싱을 마친 손일석이 밝게 웃으며 하영희를 보았다.

“김지훈 선생은 오프인 거 아시죠? 게다가 지금 응급 수술 들어갔어요. 주말에는 이경석 선생님과 신현수 선생이 치료를 할 겁니다. 시간마다 꼭꼭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민수 좀 일으키세요. 파이팅!”

주먹을 흔들며 나가는 손일석을 보는 장민수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자신은 7년이나 밖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주말 오프를 간다는 소리에 화가 치민 것이다.

“엄마, 결국 마찬가지지? 다 똑같아.”

그날 오후 신현수가 들어오자 장민수가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반응이었지만 심상치가 않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신현수가 이유를 물었지만 하영희는 눈가만 비빌 뿐이었다. 지금 장민수에게 필요한 사람은 김지훈 단 한 명이었다.

응급 수술 때문에 고경아와의 약속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다행히 최철한이 수술 끝나고 바로 오프를 가라고 했다.

일단은 손일석에게 오프 가기 전에 장민수 드레싱을 한 번 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부리나케 고경아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병원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적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즐거운 대화였지만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좌불안석이었다. 장민수 문제에 오늘 마쳐야 할 일도 다 끝내지 못했다. 고경아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원래 6시쯤 들어가기로 했는데 왜 이렇게 불안해해요? 지금 5시밖에 안 됐어요.”

“그러게요. 일이 꼬이려니까 응급 수술에 장민수라는 환자 문제도 있지만 오늘 할 일까지 꽤 남았어요. 마음이 정말 불안하네.”

1년차 사정을 모르면 몰라도 알고 있는 이상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김지훈이 선배들에게 혼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고경아가 김지훈을 째려보았다.

“일 다 끝내려면 얼마나 걸리는데요?”

“글쎄요. 한 두세 시간 정도?”

고경아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음! 그러면 지금 들어가세요. 대신 9시에 만나요. 나 밥 안 먹고 기다릴 거니까 확실히 하셔야 돼요.”

“그래도 되겠어요?”

“아휴! 내가 왜 김지훈이라는 사람을 만나는지 모르겠네요. 나까지 불안하게 만들지 말고 빨리 들어가세요. 시간은 꼭 지켜야 돼요. 아니면 끝이에요.”

“걱정 말아요. 9시에 저녁 뭐 먹을까요? 장충동 족발?”

족발이란 소리에 슬쩍 뒤로 물러나던 고경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장충동에 족발집만 있을까? 모처럼의 데이트를 병원 주변에서 몰래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단히 약속을 한 김지훈이 부리나케 병원으로 향했다.

병동에 도착하자 김지훈이 드레싱 카를 잡았다.

간호사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선생님, 주말 오프 아니에요?”

“오프 맞아요. 일단 드레싱부터 합시다.”

“누구 하시게요? 설마 장민수?”

“그럼 누가 또 있겠어요. 민수, 우리가 퇴원시킵시다. 갑시다.”

드르륵! 드르륵!

드레싱 카 바퀴 소리가 병동을 울렸다.

삐걱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장민수가 고개를 돌렸다.

깜짝 놀란 하영희가 자신도 모르게 장민수의 다리를 툭툭 쳤다. 김지훈이 조용히 간이침대에 걸터앉았다.

“환자분, 치료하러 왔습니다.”

약간은 장난스러운 김지훈의 목소리가 들리자 장민수가 서서히 고개를 돌리며 눈을 떴다. 그 순간 김지훈과 장민수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김지훈은 눈도 깜빡거리지 못했다.

드디어 장민수가 눈을 뜨고 자신을 본 것이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오물거리던 장민수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도 원한 일이었건만 김지훈도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깨물며 드레싱을 했다. 단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만 들렸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되도록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드레싱을 끝낸 김지훈이 장갑을 벗고는 자신도 모르게 장민수의 손을 꼭 잡았다.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촉감과 함께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마음은 여리면서도 뜨거울 것이다.

눈물을 글썽이는 하영희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인 김지훈이 장민수를 보며 말했다.

“민수야, 고맙다. 정말 고맙다.”

장민수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의국으로 돌아온 김지훈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마침 일을 마치고 들어온 이경석과 신현수가 의아한 눈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지훈아, 너 오프잖아? 여기서 뭐 해?”

여전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김지훈이 숨을 고르며 콧등까지 찡그렸다.

“형! 민수가 날 봤어요.”

“그게 뭘 어쨌다고……. 뭐? 지금 장민수가 드레싱할 때 눈을 뜨고 널 봤다는 거야?”

“예. 형, 고마워요. 현수야, 정말 고맙다.”

단지 환자 한 명이 치료를 하는 의사를 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환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장민수였다. 7년의 세월 동안 점점 깊게 빠져 버린 좌절과 절망의 늪에서 한 발을 꺼낸 것이다.

김지훈의 노력이자 동기들의 힘이었다. 신현수마저 두 손으로 입과 코를 감싼 채 김지훈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술을 한 것도 아니고 퇴원은 아직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눈을 뜬 사실 하나가 이렇게 큰 기쁨과 감동을 줄 줄은 몰랐다.

한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웃기만 하던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며 밀린 일을 시작했다. 간간이 장민수가 생각날 때마다 웃음이 나오며 힘이 솟았다. 고경아를 만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만 남았다.

드르륵! 드르륵!

601호 병실 문을 열었다.

김지훈이 아예 목석처럼 굳었다. 장민수가 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장민수의 등을 받치던 하영희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고 있었다.

‘도와줘야 하나?’

김지훈을 본 장민수가 이를 악물고 있었다. 바로 달려가 도와주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침대 손잡이를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김지훈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 없는 응원을 했다.

‘민수야, 힘내. 넌 할 수 있어.’

좀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던 장민수가 눈을 꽉 감고는 마지막 힘을 썼다. 결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던 장민수가 마침내 일어나 앉았다. 장민수를 안은 하영희의 어깨가 들썩였다.

장민수가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김지훈을 보았다.

-형! 나 일어나 앉았어요.-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