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평생 간직해야 할 마음 (3)
“소장을 그렇게 많이 잘라도 괜찮나요?”
“워낙 길이가 길어서 회복만 잘 되시면 생활에는 아무 지장도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오늘은 편히 쉬게 하시고 내일부터는 힘들더라도 바로 움직여야 하니까 보호자분들도 같이 노력해 주셔야 합니다.”
“내일 바로 움직여도 되나요?”
“예. 그래야 회복이 빨라지고 합병증도 막을 수 있습니다. 안 움직이면 그만큼 고생을 더 하세요.”
걱정이 가득한 보호자들이 쉴 새 없이 질문을 했다. 김지훈은 시간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자세히 설명을 했다. 보호자들이 조금씩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왠지 어제 보았던 보호자들의 표정과는 다른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별말씀을요. 밤중이라도 괜찮으니까 환자분이 힘들어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보호자들이 병실 밖에까지 따라 나와 인사를 했다.
김지훈이 뻣뻣해진 목을 만지며 웃었다.
마음을 담아 환자를 대하자 어딘가 허전했던 구석이 사라지고 있었다. 일반 외과 의사로서 갖는 보람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수술 후 환자가 순조롭게 회복되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수술을 받거나 퍼스트를 서며 얻는 성취감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보람이자 의미였다.
‘내가 요새 점점 힘들다고 느낀 진짜 이유가 이거였나? 일을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환자들이 주는 힘을 못 느껴서 그랬던 모양이야. 후우! 역시 이런 기분이 최고네.’
할 일도 많고 배워야 할 것은 더 많은 1년차가 매사에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환자를 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느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수술은 물론 어떤 배움과 지식도 그 앞에 놓을 수는 없었다.
‘고맙습니다, 과장님.’
선배 의사들에게 배워야 하는 것은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김지훈에게 송재덕 과장이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날 밤 모든 일과를 마친 신현수가 응급실 밖으로 나가 찬바람에 멍한 머리를 추슬렀다. 김지훈과 함께한 네 개의 수술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수술을 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혼란스러웠다.
무난하게 한 수술은 자신이 집도한 아뻬뿐이었다.
‘수술은 둘이 한다. 집도의가 더 중요하고 퍼스트의 역할은 따로 있다. 다 맞는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왜 이번에는 이런 일이 생긴 거지? 과장님 말씀을 들어 보면 김지훈이 미숙해서 벌어진 일도 아니잖아.’
뒤집어 생각하면 김지훈의 수술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말이 될 수도 있었다. 자존심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경우가 달랐다.
더 노력하고 많은 경험을 쌓는다고 저절로 해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럴 것 같았으면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반드시 이유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 무너지는 자존심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신현수가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주말에 벌어졌던 네 개의 수술에 대한 기록지를 펼쳤다. 하나하나 다시 기억을 되살렸다. 송재덕 과장과 김지훈의 손에서 무엇을 놓쳤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다음 날 새벽 첫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병동 의국에 들어선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신현수가 탁자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신현수를 깨우기 위해 손을 내밀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차트에 꽂혀 있어야 할 수술 기록지 네 장이 눈에 보였다. 모두 자신의 파트 환자들의 수술 기록지였다.
파트가 다른 신현수가 다시 확인할 이유가 없었다.
‘이 자식이 왜 남의 파트 수술 기록지를 보고 있어. 차트에 없으면 나만 깨지는구만.’
설마 깨지라고 그랬을 리는 없었다. 별생각 없이 수술 기록지를 들던 김지훈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모두 주말에 한 수술 기록지잖아. 이걸 왜 본 거지? 가만. 과장님도 현수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셨겠지. 그렇다면 그걸 잊지 않기 위해서 다시 봤다는 말이네. 어라? 이것 봐라.’
갑자기 후끈 달아오른 김지훈이 가운을 풀어헤쳤다.
평소 자신의 깔끔한 침대 아니면 절대 눕지 않았던 신현수가 의국에서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것도 밤새 송재덕 과장에게 배운 것을 머릿속에 확실하게 박기 위해서 말이다.
비상이었다.
신현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력뿐이었다. 그런데 산현수가 이 정도로 노력을 기울인다면 앞선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신현수를 보던 김지훈이 두 눈에 힘을 꽉 주었다. 전에 없던 투지가 활활 타올랐다.
‘좋아, 신현수. 새롭게 한번 해 보자. 일단 지금 내가 풀어야 할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알았으니까 다음 목표는 너야. 죽었어.’
“현수야, 일어나. 인마, 드레싱해야지.”
귀청을 울리는 소리에 신현수가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김지훈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입에 침이나 닦고 나와, 인마. 더럽게.”
“뭐? 침?”
1년차를 하며 많이 망가져서 그렇지 원래 깔끔하면 신현수였다. 깜짝 놀란 신현수가 후다닥 세면대 앞으로 갔다. 거울에 얼굴을 비추던 신현수가 인상을 팍 썼다.
“김지훈, 너 뭐야?”
“농담도 못하냐.”
‘남자 놈이 침 좀 묻었다는 소리에 호들갑을 떨기는. 자식.’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이기고 싶어도 경쟁은 경쟁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사람을 잃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은 그렇게 믿었다.
***
외래 휴게실에 앉아 있던 구영선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 교수, 요새 수술실에서 현수 태도가 좀 달라졌는데 혹시 백 교수 수술 때도 그래? 응급 수술 떴을 때 봤을 거 아냐?”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전에 세컨을 설 때는 집중력이 떨어졌던 것 같은데 요샌 어느 자리에서도 눈이 번쩍번쩍 빛나는 것 같습니다. 김지훈, 그놈은 아예 말할 것도 없고요. 하여간 둘이 경쟁을 하는 모양인데 재밌는 일입니다.”
구영선 교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김지훈? 뭐, 열심히 하긴 하지만 현수만 하겠어?”
백무용 교수가 모른 척하며 되받았다.
“글쎄요. 길고 짧은 건 재 봐야 알겠지만 이 상태로 가면 김지훈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아! 그게 말이 돼? 타고난 재능에 노력까지 하는 놈이 제일 무서운 법이야. 신현수가 딱 그렇잖아. 김지훈처럼 열심히만 해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마침 휴게실로 들어오던 송재덕 과장이 혀를 찼다.
“구 교수, 눈 크게 뜨고 잘 봐. 둘 다 일반 외과 새끼야.”
구영선 교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외래 교수들 간의 분위기가 확실히 예전과는 달라지고 있었다. 백무용 교수가 한숨을 쉬다 말고 웃으며 커피 한 잔을 탔다.
“과장님, 드시던 대로 다방 커피요?”
“백 교수, 왜 이래. 왜 이래. 내가 타 마실게. 아! 덥다. 이제 곧 겨울인데 왜 이리 더워? 냉커피 마셔야겠다.”
잠시 후 주니어 스태프들이 들어왔다. 누군가 재밌는 일을 꺼냈는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홀로 진료실에 앉아 있던 구영선 교수가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눈가를 찌푸렸다.
***
마지막 한 주를 남겨 두고 김지훈과 신현수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더욱 심해졌다. 마치 누가 더 잠이 없는지 시합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송재덕 과장이 김지훈과 신현수를 볼 때마다 이름을 물어보았다.
“네가 지훈이지? 그래, 지훈이. 현수구나. 맞지? 네가 신현수지? 허허! 그래. 지훈이, 현수. 좋아. 좋다.”
그렇게 천안 근무가 막바지로 향할 쯤 응급실 당직이었던 김지훈이 산부인과 1년차에게 콜을 받았다. 임신 8개월째인 산모로 복통이 심해 외과적인 문제를 배제해 달라고 했다.
응급실로 향하던 중 구미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임신 중독증에 걸린 산모가 출산할 때까지 꼬박 하루를 뜬눈으로 지새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땐 정말 피곤도 몰랐던 것 같았는데. 엄마도 애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겠지?’
하품을 하며 응급실에 들어선 김지훈이 산모를 찾았다.
산부인과 전공의가 보이지 않았다. 급한 분만이 있어 일반 외과 문제가 없으면 자신들이 입원시키겠다는 오더를 남긴 후였다. 그 밑에 단순 장염이 의심된다는 내과 전공의의 기록이 보였다.
김지훈이 난감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산모에게 할 수 있는 검사라고는 혈액과 소변 검사뿐이었다. 8개월이라고 해도 태아에게는 상당히 유해하기 때문에 복부 X-ray 촬영은 금기였다. 시간이 늦어 그나마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초음파도 할 수 없었다.
‘산모들은 보기 힘든데 하필이면 이럴 때 급한 분만이 있어. 사진을 찍어 볼 수도 없고 난감하네.’
배가 볼록한 산모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수액 하나 달랑 달았을 뿐 다른 약제는 투여되지 않았다. 혹시 태아에게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산모와 보호자들의 걱정과 불안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의사들도 반드시 필요하거나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권하지 않았다.
“산모분, 일반 외과에서 왔습니다. 어디가 아프세요?”
산모가 우측 옆구리와 복부를 만지며 통증을 호소했다.
“언제부터 아프셨어요? 토하거나 설사는 없으셨고요?”
“이틀 전부터 아팠어요. 토하지는 않았고 변은 약간 묽게 보긴 했어요.”
김지훈이 부드럽게 배를 촉진하며 물었다.
“8개월이시면 꽤 힘드시죠?”
“날씨가 선선해서 괜찮아요. 배만 안 아프면 좋겠는데.”
“전에 보니까 엄청 고생하시던데 다행이네요.”
살짝 통증 부위를 압박하자 산모가 얼굴을 찡그렸다.
외과적인 문제가 있으면 거의 대부분 손을 갑자기 뗄 때 느껴지는 통증인 반사 통이 동반된다. 김지훈이 지그시 압박했던 손을 빠르게 뗐다.
산모가 통증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의미 있는 징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통증을 느끼는 부위가 문제였다. 산모의 경우 임신 개월 수가 진행될수록 자궁이 커지면서 내부 장기를 위쪽이나 바깥쪽으로 밀게 된다.
아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상적으로 위치하는 부위보다 외상방으로 밀려 통증 점이 변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게 접근해야 했다.
김지훈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수차례 촉진을 반복했다.
보호자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산부인과 선생님들은 진통은 아니고 내과 아니면 외과 문제라고 하셨는데 어디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장염이 조금 심하게 발생해도 지금과 같은 증상을 보이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산모분이 아파하는 위치에 맹장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맹장염을 완전히 배제하기도 좀 힘드네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우리 과에서 다시 한 번 진찰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진찰하는 게 훨씬 더 정확하니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김지훈의 노티를 받고 내려온 2년차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뻬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배제하기도 상황이 애매모호한 모양이었다.
“지훈아, 일단 산부인과에 입원시키라고 하고 내일 복부 초음파 하고 컨설트 꼭 내라고 해. 하루 지나면 지금보다는 확실해지겠지?”
“예, 선생님.”
산부인과 문제가 없더라도 다른 과 질환이 명백하지 않는 한 입원은 산부인과로 하는 것이 안전했다. 때 이른 진통이나 태아에 문제가 생길 경우 산부인과 이외에는 어떤 과도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2년차의 오더를 받은 김지훈이 산모와 보호자를 찾았다.
“당장은 맹장을 완전히 배제하기 힘들겠습니다. 일단 산부인과에 입원하시고 내일 다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생님, 만일 맹장이면 배 속에 아이도 있는데 꼭 수술을 해야 하나요?”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아니면 산모만이 아니라 아이까지 다 위험해집니다.”
보호자가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럼 마취도 해야 하고 약도 써야 할 텐데 그건 괜찮겠습니까? 혹시 유산이라도 할 위험은 없을까요?”
“제가 확답은 못 드리지만 산부인과는 물론 마취과하고도 충분히 상의해 최대한 안전하게 수술을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의심되는 것뿐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산모분, 한 번만 더 진찰해 보겠습니다.”
김지훈이 아무래도 찜찜한지 다시 복부를 촉진했다. 그 짧은 사이에 큰 변동이 있을 리 없었다. 불안해하는 산모와 보호자에게 충분히 설명을 하고 응급실을 나왔다.
마음을 담아 환자를 본 모양인지 기분도 좋고 편했다.
병동으로 올라간 김지훈이 남은 일을 하다 말고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가 조금 넘었다. 산모를 본 지 4시간 정도 지났다.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이 응급실에 전화를 걸어 입원실을 알아냈다.
‘태아까지 걸려서 그런지 찜찜하네. 너무 늦기 전에 한 번 더 보자.’
뚜벅뚜벅 복도를 지나 산부인과 병동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