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너희들은 서로 배워야 할 동기다 (2)
당직실 문 뒤에 숨어서 눈치를 보던 정갑수가 슬며시 문을 닫았다. 얼굴 보여야 갑갑하기만 하겠지만 그래도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스스로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고 있었다.
“지훈아, 환자 어디 있니? 보자. 보자. 어이구! 이런 날은 환자 보기도 힘들다. 힘들어. 왜 이렇게 힘드니.”
김지훈이 의아한 눈초리를 보이며 물었다.
“과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있긴 뭐가 있어. 그냥 스트레스 좀 받은 거야. 스트레스. 일하기 힘들다. 그지? 힘들어.”
송재덕 과장이 조금은 피곤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진찰을 하기 시작하자 태도는 물론 말투까지 달라졌다. 환자에게 친절하고 세심하게 말을 건네며 최대한 안심을 시키고 있었다.
‘지훈아, 의사도 사람이니까 살아가면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너도 정갑수 때문에 많이 받았겠지. 일도 많고 말이야. 하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환자를 보는 데 영향을 받아서는 안 돼. 그러다 보면 점점 환자의 고통에 무감각지고 죽음마저 당연하게 여길 수 있거든. 지금도 괜찮지만 처음에 봤던 김지훈의 모습을 빨리 되찾아야 한다. 현수, 너도 조금 더 신경을 쓰면 좋겠다. 환자는 정확한 진단만을 원하진 않는 법이야.’
보호자에게도 충분히 설명을 한 송재덕 과장이 빙그레 웃으며 뜻밖의 말을 했다.
“아뻬 맞네. 맞아. 지훈아, 현수야, 스케줄 내고 수술 들어가자. 천천히 해. 천천히.”
뜻밖의 말에 신현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송재덕 과장이 김지훈을 콕 집어 수술을 한다고 했을 때 자존심이 무너지고 화도 난 상태였다. 내색할 수 없어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야 자신만 손해라는 사실을 이젠 충분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같이 들어오라니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갑수를 응급실 당직으로 세우라는 오더도 그래서 내렸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혹시 송재덕 과장이 잘못 알았거나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물었다.
“과장님, 저 응급실 당직입니다.”
“그래? 그랬구나. 못된 놈이 보라고 그래. 버르장머리 없는 놈 있잖아. 응? 가자. 빨리 수술하러 가자.”
송재덕 과장이 허허 웃으며 수술 방으로 올라갔다.
재빨리 수술 스케줄을 챙긴 김지훈이 수술 방으로 향하며 신현수에게 먼저 올라간다는 손짓을 했다.
‘왜 아뻬 수술에 우리 둘 다 들어오라고 하시지?’
김지훈이 뻑뻑한 목을 좌우로 흔들며 입맛을 다셨다. 이제 아뻬 수술 정도는 인턴까지 셋만 있으면 충분했다. 송재덕 과장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신현수도 의아한지 수술실에 들어와 빤히 김지훈을 보았다.
“현수야, 왜 우리 둘 다 들어오라고 하신 걸까?”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말은 심드렁하게 했지만 신현수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잠시 후 마취과 전공의와 함께 송재덕 과장이 들어왔다.
묘한 눈빛으로 김지훈과 신현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누가 먼저 할까? 지훈아? 현수야? 누가 먼저 할래.”
“예?”
둘 다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희들 둘 다 아뻬 잘하잖아. 누가 할래? 누가 할까. 지훈아, 현수야, 누가 할까?”
송재덕 과장이 어려운 선택을 던지고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김지훈과 신현수의 눈길이 마주쳤다. 둘 모두 수술 욕심은 누구보다도 많았다. 더구나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최대 경쟁자로 여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양보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지? 어휴! 어렵다.’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정말 힘든 결정을 내렸다. 당장은 욕심이 앞섰지만 신현수는 경쟁자이기 전에 동기였다. 한 번쯤 양보한다고 해서 뒤처지는 것도 아니었고 수술은 또 받을 수 있었다. 서로 간의 관계를 더욱 좋게 만들 수도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김지훈이 욕심보다는 신현수와의 관계를 택했다.
“현수야, 네가 해.”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웃고 있는 김지훈을 보던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찜찜하다고 해도 수술을 양보할 만큼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고맙다.”
이럴 땐 감정이 충분히 실려도 좋으련만 여전히 냉정하게 들렸다.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표현이 서툰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감정이 그런 것인지 애매모호하기만 했다.
수술 준비를 하는 동안 마취가 진행됐다. 마지막으로 손을 닦고 들어온 송재덕 과장이 집도의 자리에 서 있는 신현수를 보며 웃었다.
“현수가 하기로 했구나. 그래야지. 잘했어. 아암! 잘한 거야. 현수야. 준비하자. 준비해.”
말투가 묘했다.
누구에게 잘했다는 소린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현수야, 세상에는 뛰어난 놈들이 정말 많지만 경쟁자에게 양보하는 놈은 흔치 않아. 이것만은 네가 반드시 배웠으면 좋겠구나. 그래야 진정한 일반 외과 의사가 되고 더 크게 될 수 있는 거야. 경쟁자를 친구로 만들면 그 이상 좋은 것이 없더구나. 너희 둘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송재덕 과장이 수술 가운을 걸치고 수술대로 다가오자 김지훈이 세컨 자리로 옮겨 섰다. 그런데 송재덕 과장이 어깨로 김지훈을 밀며 억지로 세컨 자리에 섰다.
“둘이 해. 둘이. 니들 수술 잘하잖아. 현수가 수술하고 지훈이가 퍼스트 서고. 좋다. 좋아. 아주 좋아.”
그 순간 김지훈과 신현수가 동시에 송재덕 과장을 보았다. 1년차 둘이 집도의와 퍼스트를 서는 일은 결단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송재덕 과장이 웃으며 어서 시작하라는 손짓을 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잠시 묘한 눈빛으로 김지훈을 보던 신현수가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마취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수술하자. 천천히 해. 천천히.”
메스 소리와 함께 수술이 시작됐다.
김지훈은 마치 첫 수술인 것처럼 바짝 긴장했다. 누구와 하건 처음으로 손을 맞출 때가 가장 어렵고 힘들었다. 아무리 가장 기본적인 수술인 아뻬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집도의가 최대한 편하고 정확하게 수술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것이 퍼스트의 역할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현수는 지금 같은 연차도 아니고 내 경쟁자도 아닌 집도의다.’
신현수의 손이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움직였다.
김지훈이 그 손에 최대한 집중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수술 케이스도 좋았고 신현수는 능숙했다. 퍼스트를 서기 가장 좋은 조건이었다. 그 덕인지 처음에는 다소 엇박자가 났지만 김지훈이 곧 자연스럽게 수술을 보조했다.
배가 열리고 아뻬가 제거됐다. 배 속을 살피고 다시 배를 닫는 과정이 물 흐르는 것처럼 진행됐다. 모든 과정을 끝내고 피부를 봉합하던 신현수가 슬쩍 김지훈을 보았다.
‘수술하기가 너무 편하네.’
실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퍼스트를 서기가 도리어 어려운 법이었다. 집도의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수술 과정의 차이와 방법을 그때그때 맞춰야 하기 때문이었다. 내심 김지훈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식, 잘하네. 2년차 선생님들보다 더 매끄럽게 하는 것 같네. 바짝 긴장해야겠다. 에이! 괜히 줬나?’
김지훈도 마찬가지였다. 퍼스트를 서며 보니 신현수가 얼마나 수술을 잘하는지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은근한 긴장이 느껴진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참 피부 봉합을 하고 있을 때 정갑수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흐뭇한 눈으로 수술을 지켜보던 송재덕 과장이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뭐야? 넌 뭐야?”
“예. 42세 된 남자 환잡니다. 아뻬가 의심됩니다.”
“알았어. 곧 내려갈 테니까 꾀부리지 말고 환자 열심히 봐. 현수야, 천천히 하고 오더 내자. 지훈아.”
“예, 과장님.”
“나랑 가서 환자 보자. 아뻬 맞으면 바로 올려서 하자. 천천히 하자. 천천히. 나 시간 많다.”
마지막 봉합 사를 자른 김지훈이 부리나케 응급실로 달려갔다. 뒤따라 온 송재덕 과장이 이번에도 신중하게 환자를 진찰하고는 수술에 대한 설명을 했다.
물끄러미 옆에 서 있던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힘드시고 스트레스까지 받으셨다면서 환자는 참 정성스럽게 보시네.’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 송재덕 과장이 바로 수술하자는 오더를 내렸다. 김지훈이 수술과 마취 동의서를 받고 스케줄까지 다 작성하고 나서야 정갑수가 어슬렁어슬렁 응급실로 돌아왔다.
성격이 느긋한 건지 아니면 이젠 송재덕 과장도 무섭지 않은 것인지 참 희한하게만 보였다. 김지훈이 혀를 차며 송재덕 과장의 눈을 피해 당직실로 숨는 정갑수를 노려보았다.
‘어휴! 정말 정신 못 차리네.’
곧 마취과에서 바로 수술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혹시 이번에도 우리한테 다 주실까?’
수술실에 들어가며 내심 기대를 품은 김지훈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송재덕 과장을 보았다. 이어진 목소리에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감격이었다.
“지훈아, 수술하자. 수술. 현수는 퍼스트 서고. 어디 이번에도 잘하나 보자. 보자.”
똑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이젠 상당히 익숙한 수술인데도 불구하고 문제가 생겼다. 신현수의 손이 간간이 그러나 지속적으로 김지훈의 손과 충돌한 것이다. 누군가의 집중력이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집도의가 김지훈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현수야, 넌 1년차들 중 누구보다도 수술을 잘해. 하지만 환자와 집도의의 손에 집중을 해야지. 집도의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런 문제에 연연하면 얼마 못 가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말 거야. 김지훈을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진정한 라이벌이 돼 멋지게 싸워 봐.’
지금은 물론 환자에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렵고 큰 수술이면 사소한 실수도 재앙이 될 수 있었다. 잠자코 지켜만 보던 송재덕 과장이 간만에 입을 열었다.
“지훈아, 천천히 해. 천천히. 현수야, 퍼스트 잘 서잖아. 잘 서네. 잘 서야지.”
은근한 지적이었다. 신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썼다. 스태프들과 수술을 할 때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수술이든 퍼스트든 김지훈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현수야, 집도의의 손을 잘 봐야지. 교수들은 익숙하고 노련하니까 네 손을 충분히 피하고 고려할 수 있지만 김지훈이나 너나 아직은 미숙해. 그래서 손이 충돌하는 거야. 이걸 빨리 알아야 한다. 허허! 지금도 이렇게 수술을 잘하는 놈들이 4년 동안 뜨거운 경쟁을 벌인다면 정말 볼만하겠어.’
이유를 알고도 남는 송재덕 과장이 수술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지켜만 보았다. 스스로 깨달아 일반 외과 의사로서의 마지막 수술을 할 때까지 절대 잊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수술이 끝난 후 홀로 남은 김지훈이 고민에 잠겼다.
‘현수나 나나 잘못한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왜 손이 안 맞았지? 나도 그렇고 현수도 다른 선생님들과 수술을 했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잖아? 뭘까?’
뻑뻑한 눈을 비비며 김지훈이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만 두드렸다. 한참 동안 이유를 찾았지만 뚜렷하게 잡히는 것은 없었다.
‘에휴! 모르겠다. 다음에 혹시라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나나 현수 둘 중의 한 명은 분명히 잘못했다는 말이겠지. 근데 그런 기회가 있을까?’
급격하게 다가오는 피곤을 느낀 김지훈이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했다. 그 시간 신현수도 응급실로 향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김지훈이 퍼스트를 섰을 때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런데 왜 자신이 퍼스트를 섰을 때는 문제가 생겼는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문득 김지훈이 수술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간단한 아뻬 수술인데도 빠른 듯 느렸다. 좋게 말하면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중간중간 주저했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규칙적이고 정확하게 과정을 수행하는 자신의 방식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 차이가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일까?
‘도대체 이유가 뭐지? 혹시 김지훈이 수술을 미숙하게 했기 때문은 아닐까? 아뻬 정도의 수술에서 막힐 일은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면 전에 농양이 잡힌 아뻬를 수술했을 때는 운이 좋았던 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찜찜한 구석이 남았다. 자신의 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김지훈만 관련되면 명쾌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신현수가 결국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일반 외과에서 가장 흔한 아뻬 수술이 젊은 김지훈과 신현수에게 수많은 고민을 안겼다. 이런 고민을 통해 무엇을 얻을지는 순전히 자신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