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너희들은 서로 배워야 할 동기다 (1)
슬쩍 눈치를 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건 백무용 교수가 수술 두 개를 연달아 끝낸 후 부리나케 나갔다. 그 뒤를 당직들이 졸졸 따라 나갔다. 다행히 식사를 하다 말았기에 김지훈도 함께 갈 수 있었다.
“쫄쫄 굶겨야 되는데.”
삽교 곱창으로 가는 동안 내내 구박만 받았다.
이미 식사를 끝낸 송재덕 과장이 최철한과 유석재를 붙들고 대작 중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탓에 오프인 전공의들의 얼굴도 벌게져 있었다. 신현수와 정갑수는 보이지 않았다. 전체 회식이라고 해도 할 일이 잔뜩 남은 1년차들은 밥만 먹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백무용 교수를 본 송재덕 과장이 어느 때보다도 기분 좋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백 교수 왔어. 앉아. 앉아. 먹자. 아줌마, 여기 대자로 하나 더 주세요. 우리 맛있게 먹자. 인생 뭐 있니. 수술하면서 살면 되지. 우리 일반 외과 의사들이잖아. 그치? 백 교수.”
술안주로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당직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백무용 교수만 맥주로 입가심을 했다. 항상 배가 고픈 1년차에게 술은 필요조건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눈치를 보면서도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위 연차들이 한숨을 쉬면서도 왕성한 식욕에 웃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응급실에서 또 연락이 왔다. 당직 3년차가 무시무시한 눈길로 김지훈에게 고갯짓을 했다. 흠칫 놀란 김지훈이 부랴부랴 전화를 받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오프인 신현수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현수야, 너 오늘 오프잖아?”
“정갑수가 나한테 당직 넘기고 도망갔어.”
그간 김지훈이 오프일 때 배 째라는 식으로 당직을 넘기고 병원을 나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래도 신현수에게는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신현수도 완전히 포기한 모양이었다. 도리어 김지훈이 더 성질을 냈다.
“뭐? 이젠 너한테까지 당직을 넘겼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확 패 버릴까?”
“빤뻬리 떴으니까 노티하고 바로 들어와.”
이럴 때 맞장구를 치면 얼마나 좋을까?
입맛을 다시며 노티를 하자 백무용 교수까지 김지훈을 노려보았다. 당직들 모두 다시 응급실로 갔다.
원래 응급 수술이 많다고는 하지만 곱창의 복수라는 생각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날 무려 다섯 개의 수술이 떴고 백무용 교수마저 눈이 빨개졌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김지훈이 밤새 재가 되도록 새까맣게 탔다.
결국 등에 분노의 주먹이 작렬하고 말았다.
‘아! 오늘 와야 세컨만 서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김지훈도 후회의 눈물을 처절하게 흘려야 했다.
처음으로 다신 근처에도 가지 않아야 할 음식이 생겼다.
그것도 무척이나 좋아했던 메뉴였다.
아! 그래도 먹고 싶다.
***
천안에서의 마지막 주말 근무가 시작됐다.
일과가 끝나자마자 2~3년차들이 각자 다음 근무지로 출발했고 천안에는 1년차들만 남았다. 공백이 생긴다고 해도 순환 근무를 해야 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응급실 당직은 신현수였고 수술 당직은 정갑수였다. 하지만 이번 주말은 송재덕 과장이 당직인 데다 미리 김지훈을 수술 당직으로 세운다고 말했기에 정갑수가 자연스럽게 오프를 가는 꼴이 됐다.
2~3년차들이 하나둘 출발할 때마다 정갑수의 입이 점점 크게 찢어졌다. 1년차들만 남으면 스스로 오프를 간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 만고 땡이었다. 하지만 송재덕 과장이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최철한이 출발 직전 정갑수를 불렀다.
“정갑수, 과장님께서 주말 동안 현수하고 같이 응급실 당직 서라고 하셨으니까 농땡이 부리지 말고 제대로 서.”
“예? 현수가 있는데 나까지 근무하라구요?”
“과장님 오더니까 알아서 해. 한 번만 더 문제 생기면 정말 옷 벗게 될지도 몰라.”
생각지도 않았던 오프 기회에 한껏 들떴던 정갑수가 우거지상을 하며 인상을 썼다. 아무리 아버지에게 영향력이 있다고 해도 송재덕 과장에게 두 번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씨펄! 셋이 다 남아서 뭐 하라는 거야? 응급실 근무면 빠져나가기도 어려운데. 에이! 재수 없어.’
기분이 확 잡친 정갑수가 숙소로 올라가 대자로 뻗었다.
그 시간 김지훈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어제 회식을 한 데다 밤새 수술로 떡을 쳐 이제야 고경아에게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경아 씨, 정말 미안해요. 과장님이 주말 동안 수술 당직을 서라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어요.”
(정말이죠?)
“그럼요. 당연하죠. 나도 경아 씨 만나고 싶어요.”
(아이 정말! 친구들이 만나자는 것도 거절하고 시간 다 비워 났는데 이제 전화를 하면 어떻게 해요?)
10분이 넘도록 사정을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 했다. 서늘하면서도 뾰로통했던 고경아의 목소리가 이제야 좀 누그러졌다. 고경아도 과장의 오더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이상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그런데 지훈 씨, 천안도 응급 환자는 낮보다 밤에 많이 오죠?)
엉뚱한 물음에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말이라고 해도 대개 그렇긴 하죠. 하지만 천안은 예측 불허예요. 언제 어떤 환자가 올지 몰라서 24시간 내내 대기를 해야 하는 병원이에요.”
(그래요? 시간 내서 가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요.)
“어휴! 그건 모험이에요. 얼굴 한 번 못 볼 수도 있어요. 하여튼 근무하기 힘든 곳이에요. 다음 주도 텀 교대라 시간을 내기 힘든데 어쩌죠? 미안해요. 참! 그리고 이제부터는 수술 방에서 자주 마주칠 텐데 그것도 문제네요.”
고경아가 묘한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함부로 아는 척을 했다가는 어색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동안 보아 온 병원의 분위기상 같은 직장 동료라는 사실 자체가 은근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병원 내 연애는 항상 뒷말이 많았고 그 탓인지 안 좋은 결말이 나는 경우도 많았다.
(병원 안에서는 모른 척하고 살아요. 그것도 재밌겠네요.)
은근히 당찬 구석이 있었다.
“그게 좋겠죠?”
(사실 난 상관없는데 지훈 씨가 문제 아니에요?)
“제가요? 왜요?”
(지훈 씨에게는 저랑 함께 마주치면 입장 곤란한 분이 계시잖아요.)
절로 ‘윽’ 소리가 나왔다. 정훈철이 자세히도 말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한수임을 타고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이마에 맺혔던 식은땀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아니, 뭐 그걸 어떻게……. 그리고 꼭 이 시점에서…….”
(어쨌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알기 전까지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지훈 씨, 내 말 신경 쓰지 말고 근무 잘하세요.)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할 거면서 말은 왜 꺼냈을까?
어째 함께하는 마지막 날까지 졸졸 따라다닐 것 같은 말을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윤서연을 생각하니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시간을 끈 대가는 고경아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1년차들만의 주말 근무가 시작됐다. 슬슬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신현수가 병동 의국으로 올라오지를 못했다.
평소 수술 환자가 아니면 거의 콜을 하지 않았던 신현수가 정갑수에게 빨리 내려오라는 연락까지 했다. 응급실이 미어터질 지경인 것이 분명했다.
“야, 나 원래 수술 당직이야. 그리고 아직 할 일도 많이 남아서 못 내려가.”
반대편에 앉아 밀린 일을 하던 김지훈이 인상을 썼다.
할 일이 많기는커녕 차트 하나 붙잡고 벌써 한 시간째 노닥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툭하면 전화통을 잡고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로 봐서는 앳된 여자였다.
‘꼴에 여자는 만나는 모양이네. 누군지 몰라도 빨리 정신 차리셔. 아니면 의사 좀 만들든지.’
보다 못해 한마디 하고 할까 하던 김지훈이 정갑수를 한 번 째려보고는 말없이 가운을 걸치고 응급실로 향했다. 똥은 더러워서라도 피해야 하는 법이었다. 김지훈을 본 신현수도 대충 상황을 짐작했는지 눈살만 찌푸렸다.
“환자 많이 밀렸어?”
신현수가 수북하게 쌓인 응급실 차트를 가리켰다.
그중 몇 장을 빼 든 김지훈이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내과 환자였다. 일반 외과 문제가 없다는 기록을 하고 인턴들에게 내과에 노티하라는 오더를 내렸다. 환자를 보고 있던 신현수가 힐끗 김지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보다 훨씬 빠르게 환자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얼굴에 웃음기도 옅어진 것 같았다.
‘너도 이제 환자를 효율적으로 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지? 사실 한 시간에 열 명을 보는 것보다는 스무 명을 보는 게 훨씬 낫지. 물론 정확하게 판단을 해야 하지만 말이야. 환자 컨트롤도 잘해야 하고.’
김지훈까지 환자를 빨리 보자 명수가 많다고 해도 환자가 크게 밀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뒤이어 오는 환자들이 문제였다. 단체 교통사고 한 건만 들어와도 난리가 나기 마련이었다.
바이탈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환자.
사고로 인한 복통을 호소하는 환자.
이런 환자들은 무조건 일반 외과에서 이상이 없다는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함께 달라붙었지만 밤 12시가 넘도록 아무도 응급실을 떠나지 못했다.
가운에 피 좀 묻히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야 정리가 된 응급실을 둘러보던 김지훈이 자판기 커피 두 잔을 뽑아 당직실로 들어갔다. 김지훈이 커피를 내밀자 피곤한 얼굴로 누워 있던 신현수가 묘한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
“마셔. 오늘 환자들이 좀 오네.”
“고맙다.”
“으휴! 수술 환자나 오지 다른 과 뒤치다꺼리만 했어. 맥주나 시원하게 한잔했으면 좋겠다.”
김지훈이 투덜거리면서도 맛있게 커피를 마셨다.
후르릅! 후르릅!
한동안 커피 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톡톡 털어 마신 김지훈이 휴지통에 종이컵을 던졌다. 그때 마침 신현수도 종이컵을 던졌다.
두 개의 컵이 톡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아슬아슬하게 휴지통 벽에 걸렸던 종이컵 두 개가 흔들거리다 휴지통 안으로 쏙 들어갔다.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꼭 우리 같네. 서로 이기려고 아등바등해야 결국은 한곳에서 만나는 건가? 에이! 휴지통에 컵 들어가는 거 보고 별생각을 다 하고 있네.’
거의 3개월을 함께했지만 신현수를 볼 때마다 참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가끔은 넉넉하고 힘 있는 집안이 부럽기도 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졌으면서도 항상 최선을 다하는 신현수의 모습을 보면 일종의 시샘 같은 감정까지 느껴졌다.
‘자식, 대충 해도 넌 잘 나갈 텐데 뭘 그렇게 죽자 사자 일을 하고 그러니. 나도 좀 살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뛰어난 능력까지 갖췄다. 그것도 모자라 노력까지 한다면 이보다 무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부처나 예수라면 모를까 그런 신현수가 부럽지 않다면 최소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물끄러미 신현수를 보며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환자 온 모양이다.”
신현수가 가운을 걸치며 응급실로 나갔다.
잠시 후 간호사에게 연락이 왔다.
“선생님, 아뻬 같대요.”
귀가 활짝 열린 김지훈이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다른 때였으면 2년차에게 노티를 했겠지만 지금은 둘이 수술 결정을 해야 했다. 신중하게 환자를 진찰하고 병력을 들은 김지훈이 신현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것 같은데 노티하자.”
“알았어.”
신현수가 송재덕 과장에게 노티하는 것을 보며 옆에 서 있던 김지훈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의국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난데 응급실에 아뻬 있어. 내려와.”
(내가 왜 내려가, 새끼야. 환자고 수술이고 니들 둘이 알아서 해. 과장님이 너보고 수술 들어오라고 했다며.)
말끝마다 욕이었다. 이젠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솟구칠 지경이었다. 김지훈의 이마에 주름살이 그려졌다.
“조금 있으면 과장님 나오셔. 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그래? 그리고 욕 좀 하지 마.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어.”
(참지 마, 새끼야. 넌 한 번만 더 걸리면 끝이라고 했지? 내 말 명심해라. 농담 아니다.)
‘정갑수, 너 정말 한번 날 잡아야겠다. 내 정말 더러워서 피한다.’
“후우! 알았으니까 일단 내려와.”
정갑수가 뭐라고 욕을 잔뜩 해 대며 전화를 끊었다.
송재덕 과장이 무섭긴 한지 잠시 후 응급실에 나타나 노티할 환자 차트를 보았다. 김지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신현수에겐 손을 들며 아는 척을 했다. 그나마 마지못한 기색이 역력했다. 연이어 사고를 친 이후 둘 사이도 급격하게 나빠진 탓이었다.
“환자는 안 봐? 과장님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냐.”
“안 그래도 보려고 했어.”
신현수의 말에 정갑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환자를 보았다. 얼마 후 송재덕 과장이 와 최종적으로 환자를 살폈다. 응급실 당직인지 빤히 알 텐데도 정갑수는 찾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