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90화 (190/1,329)

제9화 일반 외과의 금기 (2)

바라 마지않았던 일과가 이어졌다.

이틀에 한 번은 꼭꼭 마지막 수술에서 퍼스트를 섰다. 송재덕 과장의 수술을 보며 깨달아 가는 것이 점점 많아졌다. 새삼 해부학 책을 다시 꺼내 보며 희미해졌던 기억을 되살렸다.

단순히 빠른 것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손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영 과장의 손에서 본 완급과 흐름에 빠름과 정확함까지 더한다는 것은 머릿속 상상만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을 부릅떴다.

수술을 받지는 못했지만 퍼스트를 서는 것만으로도 황홀하고 행복했다. 어느 틈엔가 달력을 보며 송재덕 과장의 당직 날까지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지훈아, 지훈아, 여기서는 뭘 먼저 봐야 하지?”

“예. 비장 동맥과 콩팥으로 가는 동맥의 주행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옳지. 그거야. 그래. 지훈이 잘한다. 잘한다.”

새로운 수술을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 하루가 지나는 것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반면 병동 일은 여전히 갑갑했다. 몇몇 위 연차들이 정갑수를 봐주기 시작하자 김지훈에게는 치명타로 작용했다.

그동안 송재덕 과장의 눈치를 보며 하는 척이라도 했던 정갑수가 점점 더 꾀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각오한 일이었다. 정갑수에 대해서는 신경을 끊는 것이 최선이었다. 짜증이 날 때마다 여전히 자신의 일에 충실한 신현수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별말은 없었지만 신현수의 눈치도 좋지는 못했다.

‘과장님이 퍼스트 주기 시작한 후부터 현수가 더 말을 안 하네. 자식! 넌 구영선 교수님한테 수술 많이 받잖아. 설마 이 정도 일로 신경을 쓰는 거야?’

그간 송재덕 과장은 어쩌다 1년차를 퍼스트로 세웠기 때문에 김지훈의 경우는 파격적인 일이기는 했다. 그래도 수술을 많이 받는 신현수와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조금은 답답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로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이상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어느새 2주가 지나 천안 생활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서울로 가야 하는 날에서 한 주를 남긴 마지막 주말이 오프였다. 중간에 틈을 내 고경아와 약속을 잡았다.

(지훈 씨, 이젠 전화 정말 자주 하시네요.)

“그래야 일주일에 한두 번인데 뭐. 미안해요.”

(아니에요. 전 그것만으로도 좋아요. 요새 정갑수 선생님과는 사이가 좀 나아지셨어요?)

“나아지긴요. 지금은 아예 다른 과 전공의 같아요. 정갑수도 그렇지만 저도 말을 할 기분이 아니네요.”

고경아가 잠시 뜸을 들였다. 직장인이라면 함께 일을 해야 하는 동기와 사이가 안 좋은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노력해 보세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훈 씨만 힘들 것 같아요.)

“그죠? 정갑수는 까딱도 안 하는 것 같긴 해요.”

(제가 봐도 그럴 것 같아요. 그래서 더 걱정이에요.)

“에이! 인생 뭐 있어요. 정갑수 없어도 잘 살아 가니까 걱정 말아요. 그리고 잊지 말고 이번 주말에 시간 꼭 비워 놔야 돼요.”

(네. 기다릴게요. 혹시 일 생기면 바로 전화 줘야 돼요.)

“알았어요. 잘 자요. 이번 주말에 보고 나면 나도 서울 입성인 거 알죠?”

(어머! 벌써 그렇게 됐네요. 그럼 더 자주 볼 수 있겠네. 지훈 씨도 편히 주무세요. 파이팅!)

짧은 통화였지만 고경아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풀렸다. 마치 힘든 일을 마친 후 시원한 맥주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하며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것 같았다.

고경아와 통화 한 번을 더 했을 뿐인데 어느새 금요일이었다. 수술의 즐거움과 정갑수 때문에 쌓이는 스트레스를 오가는 생활이 이어졌다.

오후 회진을 올라온 송재덕 과장이 달력을 찾았다.

“철한아, 석재야, 니들 이번 주에 가지?”

“예, 과장님. 내년에 뵙겠습니다.”

“그래그래. 수고했다. 오늘 저녁 같이 먹자. 지훈아, 지훈이 넌 언제 가니? 같이 가나? 아닌가?”

“전 다음 주에 갑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럼 주말에는 뭐 하니?”

뭔가 이상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무 생각 없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 송재덕 과장이었다.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저 주말 오픕니다, 과장님.”

“그래. 주말 오프구나. 오프야. 철한아, 석재야, 니들은 가고 지훈이도 오프면 난 누구랑 수술하지? 나 주말 당직인데.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송재덕 과장의 의중이라도 몰랐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최철한과 유석재도 입을 열지 못했다. 평일 오프도 거의 가지 못하는데 차마 주말 오프까지 뺏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들은 토요일 근무를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면 천안 근무도 끝이었다.

김지훈도 함부로 입을 열 상황이 아니었다. 고경아와의 약속도 있고 이젠 웬만하면 주말 오프 정도는 챙기고 싶었다. 더구나 체력까지 간당간당해져 주말에 몸을 혹사시키면 주중에 피로만 더욱 가중될 것이 뻔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송재덕 과장이 헛기침을 하며 회진을 돌았다. 환자를 보다 말고 툭하면 수술 얘기를 꺼냈다. 그때마다 김지훈에게 얼굴을 바짝 맞댔다.

“지훈아, 나 누구랑 수술하지? 주말에 수술이 서너 개는 있을 텐데 말이야. 큰일 났다. 큰일이야. 환자는 또 누가 보나.”

김지훈은 모른 척하고 꿋꿋하게 버텼다.

눈 막고 귀 막을 때였다.

회진을 끝낸 송재덕 과장이 결국 입맛을 다셨다.

“저녁 먹자. 근데 다들 떠나는 마당에 맛이 있겠어? 그치, 지훈아. 수술 같이 할 놈도 없고. 주말에 어떻게 하지. 철한아, 석재야, 뭐 먹고 싶니?”

“과장님 드시고 싶은 것 드시죠.”

“난 식욕이 없다. 에이! 나이 들면 말이야, 기분이 좋아야 밥맛도 있는 법이야. 에이! 지훈아! 뭐 먹을래? 너 먹고 싶은 거 사 주고 난 들어가야겠다.”

밥만 사 주고 집에 간단다. 졌다. 휴식도 좋고 고경아는 더 보고 싶었지만 송재덕 과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김지훈이 눈물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과장님, 주말에 근무하겠습니다.”

“그래? 너 오프라면서 그래도 되겠니? 쉬어야지. 힘든데 쉬어야지. 허어! 주말에 일할 맛 나겠다. 그치? 수술도 막 하고 말이야. 지훈아, 뭐 먹고 싶니? 배고프다.”

오프까지 반납했는데 평범하게 주말을 보낼 수는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수술이나 많이 떠라. 퍼스트라도 지겹게 서 보자.’

“곱창 먹고 싶습니다.”

“뭐? 곱창?”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일반 외과에서는 절대 입에 담지 말아야 할 금기 음식을 거론한 것이다. 스테이션에 있던 전공의들의 시선이 일제히 김지훈에게 쏠렸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예, 과장님. 곱창전골 아니면 내장탕이라도 좋습니다.”

“내장탕! 지훈아!”

최철한이 거의 신음 소리를 냈다.

곱창도 모자라 내장탕까지?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간호사들까지도 말이다. 수술이 와장창 뜨기를 바란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김지훈을 좋아하는 최철한이라고 해도 오늘 당직이었다면 곱창의 곱 자도 나오기 전에 이미 이단 옆차기가 날아갔을 것이다.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왜? 그게 먹고 싶어?”

“퍼스트라도 많이 서 보고 싶습니다, 과장님.”

“으음! 그래. 그럼 제일 큰 걸로 먹자. 좋구나. 좋아. 가자. 빨리 옷 갈아입고 나와. 배고프다. 빨리 가자.”

송재덕 과장이 외래로 내려가는 순간 김지훈의 눈앞에서 별이 번쩍였다. 불끈 주먹을 쥔 최철한과 유석재의 무시무시한 눈길 뒤로 수많은 눈에서 불길이 쏟아졌다.

“김지훈, 너 오늘 수술 많이 뜨면 죽었어. 그리고 뜨는 대로 다 네가 들어와.”

당직 3년차의 으스스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김지훈이 꿋꿋하게 대답을 했다.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옙. 저 오늘 수술 당직입니다.”

“으이구! 내 이럴 줄 알았어. 철한아, 저 자식 굶겨. 한 숟갈도 먹이지 마. 김지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 감히 어떻게 그런 음식을 입에 담을 수 있어, 인마.”

당직을 서야 하는 2~3년차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가슴만 쳤다. 눈빛만 보면 김지훈은 이미 죽은 몸이었다. 그때 송재덕 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철한아, 오늘 오프들하고 당직들까지 다 데리고 나와. 같이 먹자. 전체 회식하자. 회식. 좋다.)

전화를 받은 최철한이 침통한 눈으로 비보를 알렸다. 2~3년차들은 물론 오프인 신현수의 눈에도 절망이 스쳤다. 한두 명도 아니고 의국원들이 모두 금기의 음식을 먹는다면 수술이 물밀 듯이 몰려들지도 몰랐다. 게다가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석재야, 정갑수는 어떻게 하지?”

갑작스러운 회식이었지만 전체 회식이었다. 아무리 밉다고 해도 정갑수를 안 데리고 나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송재덕 과장이 어떻게 나올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눈치가 빤한 정갑수가 구석에 서서 눈가를 찌푸리고 있었다.

‘씨펄! 과장이고 뭐고 니들끼리만 나가 봐. 이건 아니다. 아니면 나한테 오늘 오프를 주든지.’

한동안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던 최철한이 한숨을 쉬었다.

몇몇 전공의들이 함께 가야 한다는 의사를 나타낸 것이다.

“어차피 정갑수도 1년차야. 과장님도 이젠 화를 푸실 때가 됐고 이렇게 계속 갈 수는 없잖아.”

“알았어. 정갑수, 혹시 과장님이 뭐라고 하셔도 티 내지 말고 처신 똑바로 해.”

“예,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눈에 안 띄게 구석에서 먹겠습니다.”

정갑수가 묘하게 말투를 비틀었다.

천안에 곱창집은 많지 않았다. 쌍용동 뒷골목에 삽교 곱창이 그나마 유명했다.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소문 이상으로 맛있었다. 찝찝한 얼굴로 따라 나왔던 2~3년차들이 잠시 김지훈을 째려보더니 먹어 대기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라는 표정이었다.

정갑수를 본 송재덕 과장이 얼굴을 찌푸리긴 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에 최철한도 마음 편히 숟가락을 들었다.

유석재가 곱창을 씹다 말고 김지훈을 툭 쳤다.

“너 우리 과라 산 줄 알아. 예전에 정형외과에서 족발 먹고 싶다고 했다가 한 명 사라진 거 몰라? 장가가고 싶으면 신경외과 애들한테는 감자탕 먹자는 소리 하지 마라. 잘못하면 허리 부러진다. 그땐 나도 못 구해 줘.”

“예, 선생님. 그래도 맛있잖아요.”

김지훈이 남몰래 씨익 웃으며 곱창을 입 안 한가득 우겨 넣었다. 하지만 당직 전공의들은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미신처럼 내려오는 말이었지만 금기의 음식을 먹으면 꼭 배 속에 문제가 생긴 환자가 온다는 말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곱창전골이 반도 사라지지 않았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아는 병원 의사들이라며 호들갑을 떨며 바꿔 주었다. 일반 외과 금기의 음식을 먹은 효과가 직방으로 나타났다.

“과장님, 당직들은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왜 들어가? 수술 있어?”

“예. 빤뻬리가 둘이랍니다.”

곱창을 막 입에 넣던 김지훈이 사레가 걸렸는지 마구 기침을 해 댔다. 한 번에 둘이라니! 내심 정말일까 했던 의구심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김지훈, 가자. 그만 먹어라.”

“예, 선생님. 들어가 보겠습니다, 과장님.”

“응. 그래. 열심히 해. 열심히. 허어!”

병원으로 가는 내내 탔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아예 구타 수준으로 변했다. 욱신거리는 온몸을 추스르며 수술 준비를 하던 김지훈이 회심의 미소를 짓다 말고 울상이 됐다.

‘가만, 이 타이밍이 아니잖아. 주말이어야 하는데.’

판단 착오였다. 괴롭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노티를 받고 나온 백무용 교수에게 3년차가 투덜거렸다.

“선생님, 지훈이 저 자식이 사고 쳤습니다.”

“무슨 사고?”

“절대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을 먹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백무용 교수가 한 방에 알아들었다.

“뭐? 김지훈, 너 이리 와 봐. 저녁도 못 먹고 나왔는데 그게 너 때문이었어? 이 자식, 이거 아주 못된 놈이었네. 치프야.”

“예, 선생님.”

“수술 끝나고 나면 교육 단단히 시켜. 근데 갑자기 누구랑 그걸 먹었어?”

“과장님께서 저녁 사셨습니다. 지금도 삽교에서 그걸 드시고 계십니다.”

“그래? 과장님까지?”

백무용 교수의 얼굴이 묘해졌다. 일반 외과에서는 철저하게 금기시된 음식이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겐 고문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굳이 참을 이유가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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