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89화 (189/1,329)

제9화 일반 외과의 금기 (1)

한바탕 휘몰아치던 태풍이 잠잠해졌다. 언제든 다시 세찬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도 정갑수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일주일을 나가고도 아무 징계도 없이 복귀한 것을 본 몇몇 전공의들이 정갑수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젊은 나이의 전공의들도 세상인심과 다르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 탓인지 잠시나마 눈치를 보던 정갑수의 기가 점점 살아나기 시작했다.

도리어 가장 먼저 마음을 열었어야 할 김지훈과 신현수가 정갑수와 필요한 말만 했다. 1년차들의 분위기가 너무 나빠지자 최철한과 유석재가 걱정을 할 정도였다.

“지훈아,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서로 말은 해야지. 그렇게 일하다가는 네가 힘들어서 못 산다.”

“예, 선생님.”

김지훈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제가 확실하게 판단하기는 힘들지만 일단 환자 대하는 거 보고요. 현수도 마찬가진 것 같습니다.’

정갑수만 빼면 전과 다를 바가 없는 일상이었다. 물론 여전히 알게 모르게 골탕을 먹여 스트레스가 팍팍 쌓이고 있었다. 그것만 뺀다면 한결 여유롭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사실 같은 연차끼리 말을 안 하는 것보다 괴로운 일은 없었다. 위 연차와 아무리 친해도 항상 함께하며 일할 사람은 동기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정갑수도 갑갑한지 신현수에게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현수야, 말 좀 하고 살자, 인마. 너 왜 그래?”

마주칠 때마다 몇 번이나 정갑수가 먼저 말을 붙였지만 돌아온 것은 냉담한 시선뿐이었다. 얼마나 답답한지 어떤 때는 별 시답잖은 일로 김지훈에게도 먼저 말을 건넸다. 물론 말투는 곱지 않았다.

“김지훈,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김지훈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상대를 안 했다.

‘현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구나. 원래 좀 차가운 놈이 말까지 안 하니까 내가 다 춥네. 정갑수, 그나마 우리와 말이라도 하려면 일을 제대로 해야 할 거야.’

정갑수가 동기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간단했다. 최소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동기들에게 미루지만 않아도 족했다.

마음은 몰라도 육체적인 여유가 생기자 김지훈이 다시 송재덕 과장의 수술에 집중했다. 지난 두 달 동안 수술을 보아 온 덕인지 이제야 송재덕 과장의 손이 슬슬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언제 어떻게 수술을 하는지 미리 생각하고 실제로 확인하는 일은 수술을 훨씬 재밌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김지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눈을 반짝였다. 전보다 더 열의에 찬 모습에 송재덕 과장이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훈아, 수술이 재밌지? 재밌지?”

최철한과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그간 수술 중에는 환자와 관련된 일 말고는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았던 송재덕 과장이었다.

“예, 과장님.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보여? 도대체 뭘 보는 거야? 김지훈.”

혼잣말처럼 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지훈으로서는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궁금한 것은 꼭 물어봐 확인하고 싶었다.

책에 쓰여 있지 않은 지식은 먼저 말해 주기 전까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과장님, 배를 열면서 바로 환자의 해부학적 특징을 정확하게 확인하는 게 가능합니까?”

송재덕 과장이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손은 여전히 번개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왜, 불가능할 것 같아?”

“기본 구조는 모두 같다고 해도 환자마다 특징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같은 혈관이라도 주행이 같은 사람은 한 명도 못 봤습니다. 하다못해 마른 사람과 뚱뚱한 사람 간의 차이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하니?”

“과장님께서는 수술을 엄청나게 빨리하시는데 별다른 문제도 없고 힘들어하시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방법이 뭘까 항상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과장님께서 배를 연 직후에 잠시 동안 손을 멈추시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랬어? 철한아, 내가 그러니? 응?”

최철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과장님.”

“음! 그래. 내가 그랬구나. 그랬어. 왜 그랬지?”

말 몇 마디 오고 가는 사이에 어느새 주요 과정이 끝났다.

송재덕 과장이 뒤로 물러나며 최철한에게 손짓을 했다.

“철한아, 마무리하자. 마무리. 천천히 해. 천천히.”

대답은 안 해 주고 갑자기 딴 소리를 하는 송재덕 과장을 보며 김지훈이 내심 입맛을 다셨다.

‘아니었나? 하긴 해부학적 특징을 정확히 안다고 해도 손이 빠른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

수술에 비법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경험과 노력만이 수술 실력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각자 자신만의 노하우(knowhow)와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김지훈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수술이 이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배가 열렸다. 역시 송재덕 과장이 아주 잠시 동안 배 속을 들여다보며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단순한 습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지훈이 쓴웃음을 내뱉었다.

그때 송재덕 과장이 배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물었다.

“지훈아, 철한아, 랜드 마크가 뭐지? 뭐지?”

갑자기 웬 랜드 마크?

“어떤 지역을 특징적으로 상징하는 구조물 아닙니까?”

“그렇지. 랜드 마크. 맞아. 그게 랜드 마크지. 그런데 말이야, 배 속에도 그게 있어. 이놈이 여기에 있으면 저놈은 분명히 요기에 있지. 그렇지, 지훈아. 철한아, 봤지?”

김지훈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송재덕 과장이 가리킨 구조물을 보았다.

“요런 랜드 마크가 몇 개 있어. 수술 전에 그게 어디에 있는지 파악을 하면 나머지 구조는 그냥 다 따라오게 돼 있어. 수술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을 하면 절대 실수할 일이 없지. 아암! 수술의 기본은 해부학이지. 그치? 철한아. 지훈아, 내 말이 맞지?”

“예, 과장님.”

“봐. 봐. 자! 랜드 마크 확인했어. 그럼 수술 부위 주변에 위험한 구조물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았지? 몰라? 철한아. 지훈아, 알아 몰라?”

최철한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김지훈 역시 우연히 본 모습에서 이렇게 중요한 지식을 얻을 줄은 몰랐다. 절대 책에서는 얻지 못할 지식이었다. 수없이 배를 연다고 해도 평생 동안 모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흐뭇하게 김지훈을 바라본 송재덕 과장이 손을 움직였다.

스스슥! 툭툭! 서걱! 서걱!

자르고 다시 이어 주는 과정이 숨 가쁘게 진행됐다.

위험한 구조물이 어디에 있는지 미리 정확하게 알고 수술을 보자 왜 그렇게 빠를 수 있는지 조금은 감이 왔다. 정확한 해부학 지식이야말로 외과의에게는 필수적인 지식이자 강한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철한아, 마무리하자. 마무리. 천천히 해. 천천히.”

두 번째 수술도 주요 과정이 모두 끝났다.

정말 빠르기로는 세상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것 같았다.

최철한이 복벽을 봉합하기 시작했다.

김지훈이 가위를 들고 봉합 사를 자르는 사이 갑자기 송재덕 과장이 옆에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허허! 네가 김지훈이지. 김지훈. 맞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천안에 온 지 벌써 두 달 됐다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다.

그래도 하늘같은 과장님의 물음이었다.

“예, 과장님. 김지훈입니다.”

“처음이야. 네가 처음이야. 허허! 지훈아, 열심히 해. 허어! 처음이야.”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웃기만 하던 송재덕 과장이 최철한을 보았다.

“철한아, 이제부터 마지막 수술은 들어오지 마. 그리고 내 응급 수술에는 2~3년차들 들어올 필요 없다고 전해.”

“예? 과장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냥 지훈이 수술 좀 가르치려고 그래. 왜 안 되겠니? 그럼 니들이 욕할까? 하지 말까?”

“아닙니다, 과장님.”

“그래그래. 그래야 일주일에 세 개야. 당직 서는 날도 며칠 안 되는데 응급 수술이 몇 개나 되겠니. 그치? 철한아.”

최철한이 웃기만 했다.

김지훈을 보니 얼굴이 벌게진 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만을 보고 있었다. 그것으로 족했다. 구미에서 박경일 과장이 탈장 수술을 줄 때 이미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예감을 했는지도 몰랐다.

‘에휴! 김지훈, 부럽다. 수술도 잘하는 놈이 내가 3년 동안 못 본 것까지 봤으니 할 말이 없다.’

잘났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아래 연차를 둔 것이 죄라면 죄였다. 송재덕 과장이 나가자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뭐가 미안해, 인마. 네가 타고난 복이지. 아니다. 열심히 일을 한 덕이겠다. 내가 본 중에 너만큼 열심히 하는 놈도 없어. 하여튼 축하한다. 1년차 중에서 이런 행운을 누리는 놈은 네가 처음이다.”

김지훈이 입을 꽉 다물었다. 속으로는 좋아 죽을 지경이라고 해도 절대 겉으로 드러낼 일이 아니었다. 곧 양방이 벌어져 수술 방에 들어온 유석재가 최철한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유석재의 표정을 본 김지훈이 더욱 표정을 굳혔다.

왠지 선배들을 무시하는 결정을 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훈아, 너 얼굴이 왜 이래?”

“죄송해서요. 전 그냥 궁금한 것을 물어본 건데 갑자기 퍼스트를 서라는 말씀에 당황스럽네요.”

“자식이. 별게 다 미안하네. 야 인마, 좋은 건 좋은 거야. 네가 퍼스트 몇 번 선다고 우리한테 안 좋은 영향이라도 생길 것 같아? 네 덕에 도리어 수술 더 받을지도 몰라.”

유석재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김지훈의 어깨를 툭 쳤다. 송재덕 과장이 그 말을 들었는지 다음 수술에서 대뜸 최철한을 집도의 자리에 세웠다. 그러더니 연이은 수술은 유석재를 주었다.

같은 날 수술을 하는 구영선 교수 파트의 전공의들이 부러워 죽으려고 했다. 비록 마이너 수술이었지만 숫자로만 따지면 자신들보다 신현수가 더 많이 할 판이었다.

“설마 이 상황에서 정갑수한테까지 수술을 주진 않겠지?”

한쪽은 들뜬 숨을 다른 한쪽은 무거운 한숨만 쉬었다.

그날 마지막 수술에서 퍼스트를 선 김지훈이 좋아 죽었다.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은 퍼스트 자리 예약이네. 으하하하! 내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회진을 도는 송재덕 과장의 얼굴부터 시작해 파트 전체의 분위기가 확 달아올랐다. 게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은 송재덕 과장이 당직을 서는 날이었다.

오프였지만 수술만 뜨기를 간절히 바라던 김지훈이 응급실 전화를 받고 그대로 날아갔다. 복막염으로 발전한 아뻬가 의심되는 환자였다.

수술을 들어온 송재덕 과장이 자신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예상대로 농양이 형성돼 있었다. 이준영 과장처럼 똑같이 손가락을 넣어 주변을 박리한 후 손쉽게 아뻬를 제거했다.

김지훈이 퍼스트를 서며 눈을 반짝였다.

‘여기서 랜드 마크는 뭘까? 맹장과 소장 말단부를 먼저 확인하면 아뻬로 들어가는 동맥의 주행 방향을 알 수 있겠구나.’

어느새 드레인을 박기 시작했다.

“지훈아, 랜드 마크가 뭐니? 뭘 봐야 해?”

“동맥이 가장 위험한 구조물이기 때문에 맹장과 소장 말단부의 장간 막의 위치를 먼저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아뻬 수술할 때 랜드 마크가 그거였구나. 지훈아. 흐음! 마무리해 봐. 천천히 해. 천천히.”

김지훈이 복벽을 닫았다.

빠르고 정확한 솜씨에 송재덕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한다, 김지훈이. 수술 잘한다.”

수술실을 나가며 박수까지 쳤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장 근엄해야 할 과장이 어떤 때 보면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수술과 환자에 관련된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진지했다. 어쩌면 항상 웃으며 일부러라도 즐겁게 행동하는 것이 1년 열두 달 내내 받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일지도 몰랐다.

수술 방에서 나와 잠깐 찬바람을 맞았다.

벌써 11월 달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추석 때도 일에 파묻혀 지나갔네. 지금이야 어떻게든 버틴다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힘들겠지? 나도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네. 정갑수, 정말 스트레스의 근원이야.’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메이저 과나 일이 많은 과를 보면 전공의들 모두 일에 파묻혀 살았다. 그들 대부분 술을 많이 마셨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안호석의 어머니가 하는 슈퍼의 간판이 보였다.

시간이 늦어 이미 한참 전에 닫았을 것이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도 들르지 못했다. 미안했다. 그동안 인연이 닿은 사람은 물론 자신을 아껴 주는 사람들에게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래. 맞아. 제대로 쉬는 것도 중요해. 시간이 될 때 확실하게 쉬지 못하면 다음 날까지 영향을 받잖아. 다음 주말 오프 때도 꼭 서울에 올라가자.’

정갑수가 복귀한 이후 정말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았다.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스트레스가 쌓였지만 그 탓인지 이상하게도 참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편안하게 숨도 쉬고 여유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기억해 낸 것이다. 우스운 일이었다.

선택과 집중!

이는 환자와 일에만 국한된 말이 아니었다.

김지훈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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