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스승과 멘토, 그리고 과장 (2)
“너 생각보다 얼굴이 좋다. 일 안 하는구나.”
“아닙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빨리 마시고 들어가.”
4개월 만에 본 이준영 과장이었다. 언뜻 서운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김지훈의 가슴은 먹먹하기만 했다.
보일 듯 말 듯 스쳐 지나간 입가의 미소와 눈가에 살짝 잡힌 주름은 이준영 과장의 마음이었다. 그동안 보고 싶었다며 잘 지냈냐고 묻고 있었다.
나직하고 긴 숨을 내쉰 김지훈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한참 일할 시간에 부른 이유가 달랑 맥주 한 잔 주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2~3년차면 모를까 1년차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매일 얼굴을 보는 송재덕 과장이 불렀을 리도 없었다. 이 자리에 나오게 된 이유는 결국 이준영 과장밖에 없었다.
‘정말 무뚝뚝하신 건 하나도 안 변하시네요. 예, 스승님. 저 잘 지냈고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묘한 흥분과 기쁨에 잠시 마음이 들떴던 김지훈이 힐끗힐끗 이혁민 교수를 보았다.
‘그런데 서울에 계셔야 할 이혁민 선생님까지 웬일이시지? 무슨 일 때문에 세 분이 만나셨을까? 어쨌든 선생님들을 뵈니 정말 좋네.’
김지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혁민 교수가 잠시 지난 추억을 꺼내며 대화를 이어 갔다. 단편적인 말들이었지만 예전부터 서로 친분이 꽤 깊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과장과 스태프들의 대화였다. 함부로 낄 수도 없고 사실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김지훈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서 맥주잔만 만지작거렸다. 송재덕 과장이 허허 웃으며 잔을 들었다.
“지훈아, 마셔. 지훈아, 쭉 마셔.”
“예? 예, 과장님.”
송재덕 과장이 김지훈이 맥주잔에 입만 대는 모습을 보며 단숨에 남은 술을 비웠다. 그러고는 갑자기 엉뚱한 말을 했다.
“준영아, 아까 하던 말 계속하자. 내 거다. 내 거. 일이 어떻게 되든 손대지 마. 알았지? 그레이트는 내가 만들 거야. 빨리 약속해. 약속.”
엉뚱한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이준영 과장이 정색을 했다. 10년이 지났어도 송재덕 과장 특유의 화법을 알아듣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형님, 왜 이러세요. 그건 나중에 두고 봐야죠.”
“왜 이래? 왜 이래. 뭘 두고 봐. 내가 찍었으니까 절대 건드리지 마. 이 교수도 내 말 명심해.”
김지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도통 못 알아들을 말이었다. 게다가 솔직히 서로 잘 아는 사이인지도 지금에야 알았는데 형님 소리까지 나오자 놀라움마저 들었다. 이준영 과장과 송재덕 과장의 친분이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
이혁민 교수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과장님, 그건 이준영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어? 이 교수, 정말 이러기야? 나 그럼 안 한다. 정말 안 해. 나 빼고 둘이 알아서 하든지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과장님, 왜 이러십니까.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몰라. 몰라. 난 몰라.”
송재덕 과장이 마구 손을 흔들자 이준영 과장이 쓰윽 몸을 내밀었다.
“형님, 제 고집 센 거 아시죠?”
“나도 고집 세. 그럼 세지. 지훈아, 그치. 나 고집 세지?”
대답을 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렇고 난감한 일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야 대답을 할 것이 아닌가?
“왜 대답을 안 해? 지훈아, 나 고집 세지. 준영이보다 더 세지. 암! 그렇지. 내가 더 세지. 그치?”
“예, 과장님.”
김지훈이 얼떨결에 대답을 하자 송재덕 과장이 좋다고 웃었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흔들며 김지훈에게 잔을 내밀었다. 어느새 무뚝뚝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김지훈, 술 마셨으면 이제 들어가.”
맥주 한 모금을 마신 김지훈이 다소 서운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1년차는 이런 자리에 낄 레벨이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히 이준영 과장을 언제 또 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선뜻 일어나기도 싫었다. 김지훈이 엉거주춤한 상태로 앉아 있자 송재덕 과장이 눈을 부라렸다.
“이준영, 지훈이는 내 새끼야. 내 새끼. 내가 허락을 해야 들어가는 거야. 그치? 지훈아. 그치? 내 말이 맞지?”
“예? 예, 과장님.”
“이거 봐. 이거. 아주 좋아. 지훈아, 남은 술 다 마시고 들어가서 쉬어. 요새 힘들었을 텐데 가서 쉬어야지.”
송재덕 과장의 말이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그냥 뻘줌하게 앉아 있기 뭐한 김지훈이 표정 관리를 하며 물었다.
“예, 과장님.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그냥. 그냥 불렀어. 왜 싫어? 그럼 안 되니?”
“아닙니다, 과장님. 그게 아니라…….”
“그럼 됐어. 됐어. 이런 거 좋잖아. 얼마나 좋아. 허허!”
남은 술을 다 비웠다. 이젠 일어나야 할 때였다. 김지훈이 슬며시 일어나자 이준영 과장이 슬쩍 손을 들고는 맥주를 마셨다.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김지훈이 니 기대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열심히 해야 한다. 정갑수랑 싸우지 말고. 정신 못 차리는 놈과 다퉈 봐야 결국 니만 손해야. 알았지.”
허튼소리를 할 이혁민 교수가 아니었다. 술자리에 불러 언뜻 가볍게 하는 소리로 들렸지만 절대 흘려보낼 말이 아니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나하고 정갑수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신 게 분명해. 후우! 죄송해서 어쩌지? 내가 참았어야 하는 건데. 야! 그런데 이준영 선생님이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과장님과 서로 가까우셨네. 그럼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셨다는 말인데 왜 한 번도 못 들었을까?’
한 병원에 근무하는 것도 아닌 세 명의 스태프들이 모인 이유가 자신의 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단순한 만남이라고 생각하자니 다음 날 해야 할 일도 있는데 굳이 평일에 천안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1년차에 불과한 김지훈이 스태프들에게 감히 무슨 일이 있냐고 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인사를 했다. 이대로 가기에는 아쉽기만 했지만 오래도록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자리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가 보겠습니다, 과장님. 선생님, 가 보겠습니다.”
“그래. 가 봐. 열심히 해.”
“쉬어. 쉬어. 힘들다. 아! 오늘 되게 힘들다.”
“김지훈, 열심히 해라. 믿는데이.”
꾸벅 인사를 한 김지훈이 맥주집을 나가다 말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송재덕 과장과 이혁민 교수는 앞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이준영 과장은 아니었다.
“선생님,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김지훈의 뒷모습을 보던 이준영 과장이 헛기침을 하며 코를 만졌다.
“휴가 때 오려고?”
“예. 그때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땐 혼자 오지 마라. 정 PD님은 몰라도 눈이 예쁜 아가씨와는 꼭 같이 와. 욕먹기 싫다.”
이혁민 교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었다.
“김지훈이 니 연애하나? 과장님, 너무 편하게 해 주시는 거 아닙니까? 1년차가 연애를 다 하네요.”
“그래? 지훈아, 너 정말 연애하니? 이 교수 말대로 편하구나. 안 되겠다. 뭘 시키지? 이 교수. 준영아, 무슨 일을 시킬까. 잠을 재우지 말까?”
인사 한 번 더 하려다가 얼굴만 빨개졌다. 김지훈이 다시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빠져나왔다. 등 뒤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남은 맥주를 마시던 이혁민 교수가 한숨을 쉬며 턱을 매만졌다. 김지훈을 보자 문득 걱정이 더욱 커진 것이다.
“과장님, 아까 제가 드린 말씀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번에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앞으로는 영영 기회가 없을 겁니다.”
“알았어. 내 걱정은 말고 이 교수나 조심해. 금경태 뒤에 이사장과 보사부 국장인지 뭔지가 있다는 거 명심하고. 에이! 죽일 놈. 뭐가 부족해서. 죽일 놈.”
“이준영 선생님,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이준영 과장이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과장님, 그럼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습니다.”
“그래그래. 가야지. 늦었어. 천천히 가. 천천히.”
“형님, 어려운 싸움이겠죠?”
“어렵긴 뭐가 어려워? 하나도 안 어려워. 세상은 말이야, 결국 좋은 놈이 이기게 돼 있어. 암! 그렇고말고. 우린 좋은 쪽이잖아. 그치? 이 교수. 내 말이 맞지?”
“그럼요, 과장님.”
“경일이, 박경일이도 꼬셔. 박 과장도 분명히 이 교수 말에 따를 거야. 그래야지. 가자. 우리 집에 가자.”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가 송재덕 과장의 집으로 행했다. 고소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얼큰하게 오른 술이 깨기를 기다렸다.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신 이준영 과장이 한숨을 쉬었다.
‘지훈이가 뽑아 주었던 커피가 제일 맛있네.’
김지훈과 관련된 이번 일은 안타깝기만 한 일이었다. 시선에 따라 행동이 지나쳤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누가 보아도 김지훈의 행동은 옳은 일이었다.
정갑수나 악어에게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었다면 물의를 일으킬 사안도 아니었다. 그런데 또 금경태 과장까지 엮이다니 김지훈에게는 정말 운이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 그래도 잘했다. 의사에게 환자보다 중요한 사람은 없는 법이야. 네 덕에 난 형님 얼굴도 보고 새로운 기회까지 잡을지 모르겠구나. 스승이 돼서 해 준 것은 없고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
김지훈과의 지난날이 생각난 이준영 과장이 갑자기 송재덕 과장을 보며 힘주어 말했다.
“형님, 저도 일이 잘 풀리면 양보 못 합니다.”
“뭐? 무슨 소리야? 너 설마 김지훈이 말하는 거야?”
이준영 과장이 입 꾹 다물고 웃기만 했다.
송재덕 과장의 눈이 쭉 찢어졌다.
“지훈이 그놈이 너 되게 좋아하는 것 같던데 솔직히 말해. 음성에서 수술 많이 줬지? 뭐 줬어? 뭐.”
“인턴 막 마치고 온 놈한테 무슨 수술을 줘요?”
“진짜지. 진짜지. 확실히 해. 내년에도 딱 연차에 맞게 주는 거다. 잘난 놈일수록 그런 건 꼭 지켜야 돼. 그래야 속이 꽉 찬 놈이 된다고. 안 그러면 오늘 얘기 무효야. 무효. 암! 난 한다면 해. 알지? 알지?”
이미 1년차가 할 수 없는 수술까지 준 이준영 과장이 시치미를 뚝 뗐다. 이혁민 교수는 송재덕 과장의 말이 즐거운지 크게 웃기까지 했다. 김지훈에 대한 말이 나올 때마다 송재덕 과장이 난리를 쳤다.
“이 교수, 현수 좋다. 좋아. 내가 좀 만져서 보낼 테니까 현수 가져. 응? 준영아. 지훈이보다 현수가 더 좋아. 아주 좋아. 내가 좀 손해 보고 양보할 테니까 현수 가져라. 이놈이 그레이트에는 더 빠를지도 몰라.”
“현수가 누군데요?”
“음성에 있어도 그렇지. 넌 어떻게 재단 이사장 아들도 모르냐. 아무튼 준영이 넌 현수 가져라. 알았지? 더 이상은 양보 못한다. 암! 못하지.”
이준영 과장이 못 들은 척 천장만 보았다. 송재덕 과장이 눈을 부라리자 이혁민 교수가 웃으며 물었다.
“현수도 괜찮죠? 과장님.”
“괜찮아. 한두 가지만 고치면 정말 괜찮은 놈이야. 그놈에게도 기대가 커.”
“잘 키워 주십시오.”
“천안은 걱정 말고 서울에서나 잘해. 준영아, 현수라는 이름이 마음에 안 드니? 그럼 일석이하고 경석이란 놈도 있다. 이번 1년차들이 보기 드물게 좋아요. 아주 좋아. 그중에 하나만 골라. 다 좋다.”
“형님!”
“그래그래. 준영아. 그렇게 할 거지? 그치?”
“형님이 말한 세 놈 다 가져가십시오. 전 한 놈만 있으면 됩니다.”
송재덕 과장이 가슴만 쳤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호들갑이었다. 어쩌면 마음속 깊은 곳에 숨은 불안을 지우고 싶은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금경태 과장을 상대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맥주집을 나와 병원으로 들어가던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송재덕 과장과 이준영 과장이 그런 자리에 자신을 부른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번 일 때문에 기죽지 말라는 말일 것이다.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상상은 생각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은근히 가슴까지 벅차 왔다. 기대한다는 이혁민 교수의 말과 무뚝뚝한 이준영 과장의 얼굴이 겹치자 심장이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스승과 멘토에 천안 일반 외과 과장까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이 곧 김지훈 자신의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하하! 스승님도 경아 씨가 예뻐 보이시나 보네.’
고경아와 정훈철 생각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콧노래를 부르며 병원에 들어서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외래 건물에 눈에 들어오는 순간 문득 손해를 끼쳤다는 금경태 과장의 말이 생각난 것이다.
‘에이! 백날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이혁민 선생님께 여쭤 볼 걸 그랬나? 아니지. 일석이 말대로 서로 사이가 이상해졌을 수도 있는데 괜히 물어봤다가 분위기만 망쳤을지도 몰라. 그래도 세 분이 되게 친하신 걸 보니까 내가 다 기분이 좋네. 서로 어떤 사이실까?’
이럴 땐 1년차가 갖는 입장과 한계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2~3년차만 됐어도 미친 척하고 물어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모든 것을 다 떠나 정말 기분 좋은 밤이었다.
의국으로 들어서던 김지훈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