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87화 (187/1,329)

제8화 스승과 멘토, 그리고 과장 (1)

다음 날 무려 8일 만에 정갑수가 복귀했다.

막상 돌아오자 없을 때보다 분위기가 더 안 좋았다.

최철한이 의국에 모든 연차를 모았다. 하얀 붕대를 둘둘 감은 몽둥이가 보였다. 일반 외과에서 몽둥이가 사라진 지 1년이 넘었다. 숨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로 모두들 긴장했다.

“정갑수, 의국장으로서 네 행동을 그냥 지나갈 수는 없어. 우리가 2년차가 될 때 다신 의국에서 몽둥이를 들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말로도 얼마든지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아닌 것 같다. 네가 맞는 이유는 화가 나서가 아니라 의국의 명예를 떨어트렸기 때문이다. 앞으로 정신 차리고 일과 환자에 집중해.”

정갑수의 얼굴이 벌게졌다.

“선생님, 금경태 과장님께서 말씀을…….”

“정갑수,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여긴 의국이고 넌 의국원이야. 내가 의국장인 이상 넌 내 책임하에 있어. 이 일로 금경태 과장님이 책임을 묻는다면 내가 져. 엎드려.”

정갑수가 엉거주춤 선 채 움직이지 않자 3년차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폭력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의국에는 기강이 있고 정갑수의 이번 행동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갑수가 버티려는 기색을 보이자 난킴(예비역) 3년차가 인상을 구겼다.

“정갑수, 너 지금 개기는 거야?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는데 그냥 지나갈 줄 알았어? 엎드려, 이 개새끼야. 나갔으면 들어오질 말든지.”

더 이상 버티다가는 매를 벌 상황이었다. 아니면 정말 옷을 벗을 각오를 하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의 기회는 없다는 것을 정갑수도 잘 알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 니들 얼굴 똑똑히 기억해 둔다.’

정갑수가 이를 악물며 엎드렸다.

최철한도 이를 악물었다. 의국원에게 매를 든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더구나 밉든 곱든 동기였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정갑수는 또 똑같은 일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몽둥이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빡! 빡! 빡!

정갑수가 그대로 엎어졌다.

“이게 아파? 넌 우리 모두를 그렇게 만들었어. 엎드려.”

빡! 빡! 빡! 빡! 빡! 빡! 빡!

정확히 열 대를 맞았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정갑수가 입도 제대로 벌리지 못하고 바닥만 설설 기었다. 잠시 정갑수를 노려보던 최철한이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켰다.

“다들 잘 들어. 의국 차원에서는 이걸로 끝낸다. 앞으로 어디에서도 다신 이번 일을 입에 담지 마. 일단 들어온 이상 정갑수도 의국원이야. 잠깐 분위기가 뒤숭숭했지만 정신 바짝 차리고 일해. 다들 나가 봐.”

모두들 굳은 안색으로 의국을 나왔다.

김지훈 역시 마음이 무거웠다. 정갑수는 매를 맞아도 쌌다. 하지만 최철한의 말대로 일반 외과 의국의 명예는 이미 떨어졌다. 자신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사실에 알지 못할 짜증이 확 솟구쳤다.

의국으로 끝이 아니었다. 천안에 근무하는 전공의들을 관리하는 백무용 교수에게 불려간 정갑수가 또 한 번 호된 질책을 들었다. 유일하게 구영선 교수만이 어깨를 두드리며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했다.

송재덕 과장은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회진을 기다리고 있는 정갑수에게 눈길도 안 주었다.

“회진 돌자, 지훈아. 회진 돌자.”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는 말투에 도리어 어색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들 정갑수가 어떤 식으로든 징계를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비록 받아 주긴 했어도 송재덕 과장은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이 될 때까지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그 탓일까?

매까지 맞아 가며 혼이 나고도 정갑수는 변한 것이 없었다.

엉덩이가 아파 제대로 앉지도 못하면서 입은 살아 있었다.

“현수야, 봤지? 나 함부로 대할 놈 없다. 까짓 열 대 맞은 거야 별거 아니지. 최철한이 뭘 모르는 데다 동기니까 내가 참으면 되는 일이고.”

순간 후회가 확 밀려온 신현수가 한숨만 쉬었다.

‘정갑수, 도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이야? 아무리 과 내의 일이지만 아버지께 전후 사정을 다 말씀드렸어야 했나? 정갑수가 아무 일도 없이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금경태 과장님의 힘 때문이겠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이번 일은 결과적으로 병원에 도움이 안 될 텐데. 이게 일반 외과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하는 길인가?’

신현수도 그간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금경태 과장이 어떤 존재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번 처사가 병원과 일반 외과에 도움이 될 이유가 없었다.

정갑수가 엉덩이를 이리저리 비틀며 이죽거렸다.

“애 새끼. 8일 만에 왔으면 환영하는 말이라도 해야지. 너 그러니까 친구가 없는 거야, 인마.”

사돈 남 말 하고 있었다. 악어가 진정한 친구라면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신현수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언짢은 표정을 짓던 정갑수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지훈을 노려보았다.

“야 인마, 너 다음에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옷 벗을 각오해. 내가 8일을 나갔다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지 잘 생각해라. 지금처럼 계속 까불면 크게 다친다.”

차팅을 하며 묵묵히 듣고만 있던 김지훈이 코웃음을 쳤다.

누구나 아버지나 집안의 능력을 무시하진 못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면 사상누각일 뿐이었다. 정갑수는 지금도 무엇이 진정한 능력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나이 헛먹었네. 환자나 잘 봐. 똑같은 일이 생기면 그땐 나도 그렇게 끝내지 않을 거야.’

“마음대로 해.”

“뭐? 이 새끼가 정말 확 그냥.”

“우리가 애들도 아닌데 욕 좀 그만하지.”

김지훈이 슬며시 고개를 들자 정갑수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이를 갈았다. 앞으로 정갑수가 어떻게 나오든 옳은 일이라면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어레스트가 난 환자를 두고 노닥거렸던 모습을 잊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복귀한 덕에 일은 줄었다. 당장 첫날부터 어제와는 상당히 달랐다. 개똥도 요긴하게 쓰일 있다는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밤 11시가 넘었다.

그때 스테이션에서 송재덕 과장이 김지훈을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부리나케 전화를 받은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맥주집에서 왜 날 찾으시지?’

날짜를 따져 보니 다행히도 오늘이 오프 날이었다.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자 정갑수가 인상을 썼다.

“그럼 일은 누가해? 인마.”

김지훈이 달력을 가리켰다.

“오늘 응급실 당직이네. 난 오프고.”

“야, 이 씨발! 들어오자마자 응급실 근무를 하라고?”

“그럼 누가 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김지훈이 한마디 툭 던지고는 의국에서 나왔다. 송재덕 과장이 말한 맥주집으로 향하는 동안 잠시 틈을 내 고경아에게 전화를 했다.

“경아 씨, 5분밖에 통화 못합니다.”

김지훈이 정갑수와 있었던 일을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어머머! 그렇게 맞았는데 멀쩡해요?)

“멀쩡하긴요. 아파서 잘 앉지도 못해요. 근데 어떻게 된 인간인지 나가기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변했어요.”

고경아도 맞장구를 치며 분개했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하잖아요. 지훈 씨, 그러니까 확실히 하세요. 만만하게 보이면 더 난리 칠 거예요. 알았죠? 파이팅!)

“파이팅! 끊어요.”

정말 5분 만에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전력 질주를 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 김지훈이 거의 쓰러질 것처럼 맥주집 안으로 들어섰다. 헉헉 숨을 몰아쉬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지훈이 병원을 나오던 그 시간,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가 송재덕 과장과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만 되면 좋네. 좋아. 신상민 과장님과는 이미 입을 맞췄고 오상익 교수도 대충 동의를 했단 말이지. 그럼 재단 이사장님만 남았네. 그게 문제네. 문제. 그치? 그런데 이 교수, 이 정도로 되겠어? 금경태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합니다. 더 이상 밀어붙이면 자칫 양쪽 다 다칠 수 있습니다. 과장님 말씀대로 재단 이사장님도 수용할 만한 제안이어야 하고요. 어찌 됐든 목표는 일반 외과가 거듭나는 것이니까 결국에는 모두 함께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개과천선을 하면 모를까 금경태는 안 돼. 안 돼. 제 자식 밉다고 한 데다 던져 버린 놈이 어디 있어? 안 돼. 아암! 안 되고말고.”

송재덕 과장의 단호한 목소리에 이혁민 교수가 한숨을 쉬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긴 합니다만 김지훈도 좀 마음에 걸립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이준영 과장이 눈가를 찡그렸다.

“이 교수, 지훈이가 왜?”

“선생님, 어떻게 보면 장례식장 문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김지훈이 항상 가운데 끼어 있는 형국이 아닙니까? 앞으로 금 과장님의 눈길이 더 안 좋아질 겁니다. 이런 상황이면 지훈이도 자신이 현재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이 교수, 우리가 아무리 좋은 뜻을 가졌다고 해도 이건 결국 진흙탕 싸움이야. 그런 싸움을 할 사람은 우리만으로도 족해. 지훈이 그놈은 절대 이런 일에 휘말려서는 안 돼. 아니, 관심도 가져서는 안 돼. 형님, 안 그렇습니까?”

“그럼. 그럼. 이건 식구들끼리 싸우는 개싸움이야. 개싸움. 장래가 창창한 놈은 멀찍이 두고 우리만 개 되자. 그게 맞다. 아암! 그게 맞지.”

“저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다면 혹시 의욕을 잃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됩니다.”

이준영 과장이 피식 웃었다.

“이 교수, 지훈이가 의욕을 잃는다고? 아직은 젊으니까 아주 잠시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로 약한 놈이 아니야. 난 김지훈이 언젠가는 우리가 꿈꾸어 왔던 것을 이룰 놈이라고 확신해. 두고 봐.”

꿈이란 소리에 이혁민 교수와 송재덕 과장이 입술을 꾹 다물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꿈. 꿈. 좋지. 좋아. 김지훈이 그럴 수 있는 놈일까?”

“형님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십니까?”

“싹수는 보여. 흐음! 그래. 다른 어느 놈보다도 싹수는 있어. 좋아. 우리가 키우자. 키우자. 아! 좋다. 난 말이야, 그레이트 써전이라고 불리는 의사가 어떤 의산지 보고 싶거든. 이 교수는 안 그래? 그렇지? 궁금하지?”

“예, 과장님. 저도 궁금합니다. 김지훈이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준영 과장이 물끄러미 송재덕 과장과 이혁민 교수를 보았다. 그레이트 써전이 어떤 의사를 의미하는지는 제각각 모두 다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누군가는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형님, 이 교수.”

“왜? 준영아. 왜?”

“형님, 지훈이를 키우겠다는 말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이 교수, 부탁해. 누군가를 가르치고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이렇게 간절해질 줄은 몰랐어. 하지만 난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고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르잖아.”

“선생님, 반드시 김지훈을 보시게 될 겁니다.”

이준영 과장이 말없이 웃기만 했다.

송재덕 과장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준영이가 김지훈이한테 아주 쏙 빠졌구나. 나도 기대가 정말 큰데 그럴 만도 하지. 그놈이 널 그 깊고 깊은 구덩이에서 꺼낼 줄 누가 알았어. 정말 우리에게는 큰 복이다.’

“준영아, 준영아, 힘 빠지게 왜 이러니. 그러지 마라. 그리고 노력한다고 해서 김지훈이 반드시 그레이트가 되겠니? 여유를 가져야지. 아암! 너부터 마음을 편안히 갖고 여유를 가져야지. 안 되겠다. 일단 지훈이 문제는 뒤로 미루자.”

이준영 과장의 표정이 홱 변하자 송재덕 과장이 웃었다.

그때 막 김지훈이 맥주집 안에 들어섰다.

이혁민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심각해 보였다. 이미 술도 제법 마셨는지 다들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스승님! 선생님!’

너무 반가웠다. 교수와 전공의라는 신분만 아니었으면 당장 달려가 넙죽 인사를 하고는 기뻐 날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송재덕 과장까지 있는 자리인 데다 눈치 없이 좋아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스태프들이 여럿 있는 자리는 어렵고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테이블로 향했다. 눈을 마주친 이준영 교수가 입을 열려다 말고 표정을 바꾸며 손을 들었다. 이혁민 교수도 웃으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김지훈이 왔나. 과장님, 선생님, 지훈이 왔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보며 묘한 미소만 머금었다.

“지훈이 왔구나? 어! 이리 와. 앉아. 앉아.”

김지훈이 자리에 앉자 생맥주 한 잔을 시킨 송재덕 과장이 허허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마셔. 흐음! 너 술 마신다며 쭉 마셔.”

“과장님, 일이 아직 남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며 물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반가움을 표시할 방법이 없었다. 이준영 과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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