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86화 (186/1,329)

제7화 누구에게도 세상일은 만만치 않다 (2)

그 시간 송재덕 과장과 금경태 과장이 마주 앉았다.

대화를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얼굴들이 벌게져 있었다.

“과장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갑수 아버지가 보사부 국장입니다. 이번에 승진까지 하는데 문제가 생기면 병원 전체에 타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좋은 관계를 맺으면 병원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양보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보사부 국장이면 뭐해? 정갑수는 우리 과를 할 수 있는 놈이 아냐. 아예 자세 자체가 글러먹었어. 일찍 잘라 버리는 게 그놈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역시 배경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더구나 송재덕 과장은 평소 병원의 발전은 의사의 실력과 인성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던 사람이었다.

반면 금경태 과장은 권력과 행정 부분도 굉장히 중시했다. 물론 그것이 지금까지는 잘 먹혀 왔고 자신에게도 상당한 도움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도리어 그게 문제였다.

기본적인 생각 자체가 달라 접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비비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하필이면 천안에서 일을 저질러. 도대체 이 인간을 어떻게 설득하지? 가만.’

한참 고민을 하던 금경태 과장이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 냈다. 송재덕 과장이 평소 전공의를 자식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통화를 했을 때 김지훈을 거론하자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었다. 어차피 김지훈은 신경 쓰기도 싫은 놈이었다. 징계를 받는다고 해도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럼 김지훈도 문제가 됩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식으로 툭 던진 말이었다.

“김지훈이 왜? 환자 열심히 보고 수술도 잘하는데 뭐가 문제가 돼? 어레스트가 난 환자를 보지도 않은 놈에게 욕 좀 한 게 잘못이야?”

송재덕 과장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뿐만 아니라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의 눈가가 좁혀졌다. 전화로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왔다. 김지훈에게 대단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 1년차인 놈에게 왜 이런 관심을 두는 거야? 김지훈에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이상한데. 하지만 이렇게 되면 오히려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겠어.’

금경태 과장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자신의 과에 애착이 강한 사람일수록 뛰어난 제자를 아낀다. 특히 송재덕 과장은 이혁민 교수처럼 전공의 때부터 미리 점찍어 놓고 병원에 남기려고 하는 경향이 강했다.

음성과 구미를 거쳐 천안 근무를 한 지 불과 두 달 정도밖에 안 된 김지훈이었다. 점찍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좋은 기회였다.

“과장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군요. 하지만 우리 과 내부의 기강도 잡아야겠습니다. 정갑수의 전공의 자격을 박탈하는 처분을 내리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형평에도 맞고요.”

“무슨 소리야?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김지훈이 훌륭한 미끼라는 것이 확실했다.

“어차피 정갑수 문제를 처리하려면 정식으로 징계위원회를 거쳐야 합니다. 그때 김지훈 문제도 같이 거론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징계위원회? 어레스트 난 환자를 내팽개친 놈과 시비 좀 붙었다고 징계를 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건 과장님 입장이죠. 징계위원회는 다르게 생각할 겁니다. 각 과 전공의들이 모두 다 선후배 사이인데 간단히 지나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땐 어쩌시겠습니까? 지금이야 우리에게도 창피한 일이지만 나중을 위해서 확실히 처리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송재덕 과장에겐 욕심이 하나 있었다. 정말 될 성 부른 전공의를 처음부터 잘 키워 천안 병원에 남기고 싶었다. 그간 좋은 재원이다 싶으면 서울에 빼앗겼다. 그나마 어찌 된 일인지 몇 년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기 일쑤였다.

재단 이사장을 등에 업은 금경태 과장이 문제일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두 달 전 이혁민 교수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때 가장 아꼈던 후배인 이준영 과장이 완전히 회복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뛸 듯이 기뻐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었지만 이혁민 교수의 만류로 지금까지 참아 왔다. 금경태 과장이 알면 음성 근무도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상황을 말하던 이혁민 교수가 말미에 김지훈 얘기를 꺼냈다. 이준영 과장이 수술을 줄 정도로 재질이 있고 자신이 보기에도 최고의 써전이 될 만한 재목이라며 잘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당시 신현수를 볼 때마다 내심 끌탕을 했었다. 보기 드물게 뛰어나 제대로 키워 어떻게든 천안 병원에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재단 이사장 아들이 서울을 놔두고 천안에 남을 리 없었다. 그때 김지훈에 대한 평가에 솔깃했었다.

신현수만 한 재목은 아니더라도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가 인정을 했다면 기대를 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김지훈을 보자 신현수보다 더 욕심이 났다.

환자에 대한 열정이나 일 처리 능력은 물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수술에 대한 재질까지 상당히 뛰어났다. 아직은 더 갈고닦아야 할 원석이었지만 언젠가는 자신도 인정한 이준영 과장을 뛰어넘을 인재로 보였다.

그 이후 차근차근 김지훈을 시험했다.

적절한 인내심을 가졌는지 분에 넘치는 욕심은 내지 않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인성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근 두 달을 지켜본 끝에 이제부터 제대로 키워 보겠다는 결심을 막 굳힌 터였다.

정갑수와의 문제는 도리어 송재덕 과장의 결심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환자를 위해서라면 누구에게든 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의사에게 무척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이혁민 교수와 통화를 하며 내심 결정은 내렸지만 쉽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을 알 리 없었지만 금경태 과장이 정말 제대로 송재덕 과장의 약점을 잡은 것이다.

‘잘잘못을 떠나 징계를 받게 되면 나중에 문제가 되겠지. 준영이 일도 있고 김지훈을 제대로 키우는 것이 결국에는 더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런 놈을 일반 외과 전문의로 만들어야 하나? 언젠가는 환자를 잡을 놈이야. 금경태 너도 최소한 이런 일에는 원칙을 지켜야 하는데.’

한동안 말이 없자 금경태 과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송재덕 과장이 고민을 한다는 것은 확실한 약점을 공략했다는 말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한 방 더 날렸다.

“과장님, 말씀이 없는 걸 보니 제 말에 동의하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더 이상 반대가 없으시면 오늘 내로 정갑수 문제는 수련 부장에게 일임하고 징계위원회를 요청하겠습니다.”

“김지훈은 우리 과 자식이야. 꼭 그렇게 해야겠어?”

“정갑수도 아직은 우리 과 자식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일단 품에 안아야지요. 어느 한 놈만 편애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금경태, 너 정말 이럴 거야? 한번 끝까지 가 볼까?”

송재덕 과장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이 아니면 완전히 흥분했다는 의미였다. 은근히 바랐던 일이었지만 웬일인지 금경태 과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끝까지라니요?”

“징계위원회 다음이 어디인지는 금 과장도 잘 알잖아? 자네에게도 결코 좋을 일이 없을 텐데.”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찌푸렸다. 의외의 역습이었다. 행정적인 절차를 거치게 되면 결국 자신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급하기만 한 줄 알았던 송재덕 과장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순간적으로 움찔거린 금경태 과장이 이내 평정을 찾았다. 그동안 이런 일은 수없이 경험했다. 하지만 송재덕 과장도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 너도 이런 게 약점이겠구나.’

“좋은 일이 없긴 하겠죠. 하지만 그게 나뿐이겠습니까?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정갑수고 김지훈이고 모두 깨끗이 없던 일로 해.”

‘마냥 급한 성격은 아니었군. 그런데 왜 이렇게 김지훈에게 욕심을 내지? 인턴 때 성적이 좋다고는 하지만 정말 의외야. 어찌 됐든 이걸로 정갑수 문제는 마무리되겠어.’

잠시 눈빛을 굳히던 금경태 과장이 입을 열었다.

“과장님, 결정에 달렸습니다.”

한동안 금경태 과장을 노려보던 송재덕 과장이 나직한 신음을 터트렸다. 만에 하나 잘못된 결정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김지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정갑수, 복귀시켜. 대신 예전하고 똑같으면 다신 기회가 없을 거야. 금 과장 자네도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우리 과를 먼저 생각해. 그게 자네를 위한 길이야.”

“허허허! 저야 당연히 우리 과와 병원을 가장 먼저 생각하죠. 과장님도 그렇게 하셔야 할 겁니다. 정갑수 문제가 이렇게 해결이 되니 서울에서 내려온 보람이 있습니다. 차가 보통 막힌 게 아닙니다. 빈손으로 올라갔으면 저도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하여튼 감사합니다.”

송재덕 과장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송재덕 과장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세상일 참 만만치 않군. 이젠 확실하게 결정을 해야겠어. 송재덕, 당신은 과장 자리에서 내려와. 그럼 누구를 천안 병원 과장으로 앉혀야 하지? 구영선에게 서울에 올라오는 대신 과장 자리를 줘?’

금경태 과장의 안색이 펴지질 않았다.

외래에서 나온 직후 정한득에게 연락을 했다. 욕이란 욕은 다 먹으며 간신히 복귀시켰다고 전하며 은연중 자신의 노력과 힘을 강조했다.

(고마워, 친구. 내 술 한잔 살게.)

“거하게 한잔 사. 나 천안까지 내려왔어.”

(당연하지, 이 사람아. 갑수는 내일 병원으로 보낼 테니까 거기까지만 해결해 줘.)

“걱정하지 말고 보내.”

금경태 과장이 치프인 3년차들을 모아 놓고 단단히 주의를 줬다. 정갑수에게 이번과 똑같은 일이 또 벌어지면 책임을 묻겠다는 말까지 했다. 총치프인 최철한이 안색만 굳힌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가던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좁혔다. 뭔가를 빠트린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바로 송재덕 과장이 한 말과 김지훈을 점찍은 이유 때문이었다.

‘나를 위한 길? 환자와 일밖에 모르는 송재덕이 그런 말을 하다니 느낌이 좋지 않군.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금경태 과장이 고개를 흔들며 김지훈에게로 생각을 돌렸다.

송재덕 과장은 인성과 지식은 물론 수술 실력까지 따지고 나서야 마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김지훈이 수술에도 상당한 재능을 가졌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전공의들이 재능을 보일 수 있는 시기가 있었다. 음성과 구미를 거친 1년차가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에는 시간도 부족하지만 여건이나 경험상으로도 불가능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뭔가가 있다는 말이었다.

‘박경일이나 구미 병원의 능력으로는 힘들어. 그럼 음성 병원밖에 없는데 설마 이준영이?’

순간 눈빛을 번쩍인 금경태 과장이 속도를 높였다.

서울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총무과에 연락을 했다.

“나 금경탠데 음성 병원 수술 자료 좀 확보해. 과를 막론하고 작년 것하고 올해 것 빠짐없이 가져와.”

느낌이 안 좋은지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금경태 과장에게 이준영 과장은 평생의 라이벌이었다.

수술 실력만큼은 누구도 자신을 따르지 못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단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이준영 과장의 수술을 볼 때마다 들었던 묘한 열등감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만일 음성으로 쫓아 보내지 못했다면 지금 자신의 자리는 이준영 과장의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길! 10년이 지났는데도 그놈에게 신경이 쓰이다니.’

금경태 과장은 뭔가 불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총무과에 전화를 건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조급함에 전화기만 뚫어지게 보았다.

한참을 서성이던 금경태 과장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준영 과장이 이제 와 심리적 트라우마에서 회복돼 수술을 다시 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10년이나 지난 지금 자신의 아성을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머릿속에서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다.

‘이준영, 이제 와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넌 지금처럼 살아야 해.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 만일 10년 전의 충격에서 벗어났다면 음성 병원도 네게 줄 수는 없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생각에 잠겼던 금경태 과장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한동안 묵묵히 서 있다 말고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길! 이준영이 뭐라고.”

지금은 이준영 과장이 아무리 애를 써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까지 도달했다. 그런데 아직도 작고 초라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꽝!

금경태 과장이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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