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85화 (185/1,329)

제7화 누구에게도 세상일은 만만치 않다 (1)

송재덕 과장의 유일한 약점은 다소 급한 성격과 일반 외과를 유난히 사랑한다는 점이었다. 최악의 경우 일반 외과 개편에 관한 문제를 적당히 걸고넘어진다면 자신의 말을 따를 가능성이 높았다. 곰곰이 최대한 유리한 방법을 고민하던 금경태 과장이 전화기를 들었다.

“송 과장님, 금경탭니다.”

(금 과장, 자네가 전화를 다 하고 웬일이야?)

“다른 일이 있겠습니까? 요새 정갑수 문제로 골치가 아프시죠? 이쯤에서 적당히 해결하죠. 그놈도 과장님이 수련 취소까지 마음먹은 걸 알면 정신 차릴 겁니다.”

(그놈은 끝났어. 일도 못하는 게 버르장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야. 다신 말도 꺼내지 마.)

금경태 과장이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일단 상황을 풀어 가며 실마리를 잡는 것이 관건이었다.

“저도 상황을 대충 들었습니다. 환자 문제는 정갑수가 잘못했지만 김지훈도 문제가 있었더군요. 아무리 같은 연차라고 해도 선배한테 그러면 안 되지요.”

송재덕 과장이 인상을 썼다.

자신과 금경태 과장의 사이도 똑같았다. 학교 선배지만 트레이닝은 같이 받았다. 하지만 금경태가 서울 병원 과장이 된 이후 은연 중 자신을 아래로 보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말투며 행동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최근에는 구영선 교수 문제까지 겹쳐 더욱 감정이 안 좋아진 상태였다.

‘금경태, 너나 선배한테 잘해라, 이 자식아.’

속으로 냅다 욕을 한 송재덕 과장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이번 일의 핵심과는 거리가 먼 김지훈을 거론한 탓이었다.

(김지훈이는 왜? 뭐가?)

“잘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내가 뭘 잘 알아? 사고를 치고 나간 놈은 정갑순데 김지훈은 왜 거론하는 거야? 왜?)

송재덕 과장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성격 급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지만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었다. 금경태가 인상을 쓰다 말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일반 외과 개편까지 들먹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만일 정갑수가 나가게 된다면 김지훈도 문제가 될 겁니다. 그리고 정갑수 아버지가…….”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재덕 과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지훈이가 뭐가 문제고 여기서 정갑수 아버지는 왜 나와? 보사부 국장이 우리 과 일까지 관여를 할 수 있는 자리야? 이미 끝난 문제야. 수련 부장이 회의 열어서 결정하는 대로 따르면 끝이야. 자네에게도 아침에 미리 연락을 다 했는데 다른 문제라도 있어?)

“과장님, 세상이 그렇게 마음처럼 흘러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다 우리 애들인데 일단 보듬어야죠.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소리도 있는데 이러시면 안 되죠.”

(안 되긴 뭐가 안 돼? 할 말 없으니까 끊어.)

“허어! 과장님. 제 말 좀…….”

(금 과장, 할 말 있으면 직접 내려와서 말해. 전화로 할 말이 아니야. 끊어.)

뚜뚜뚜뚜!

금경태 과장이 끊어진 전화기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은 했지만 명색이 서울 병원 과장인데 심한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니, 이 양반이 정말 옷 벗고 싶나. 어디서 내 전화를 이렇게 끊어? 좋아. 내가 직접 내려가서 누가 일반 외과를 쥐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려 주지. 아니지. 지금 바로 내려가면 내 체면만 깎여. 일단 이혁민한테 다시 전화해 보라고 하는 게 순서상 맞겠어.’

이혁민 교수에게 전화를 건 금경태 과장이 상황을 설명하고 송재덕 과장을 설득하라는 오더를 내렸다. 요즘 들어 눈치가 이상해져 찝찝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임동완 교수보다 믿을 만했다.

이제야 정갑수가 나간 사실을 안 이혁민 교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하필이면 김지훈이 관련됐다니 난감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일주일이나 무단이탈한 전공의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평소 단 한 구석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정갑수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이혁민 교수가 송재덕 과장과 통화를 했다.

“과장님, 이혁민입니다.”

(어! 이 교수. 이 교수가 웬일이야? 무슨 일로 전화했어?)

“정갑수 문제를 들었습니다.”

(들었어? 그놈 그거 아주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야. 거짓말도 뻔뻔하게 잘하고. 일반 외과에 그런 놈은 필요 없어. 이참에 내보내는 게 맞아. 이 교수, 내 말이 맞지? 맞지?)

“예. 상황은 그렇습니다만 혹시 김지훈한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지훈이? 지훈이가 왜? 왜? 그깟 멱살 한 번 잡았다고 징계라도 먹는다는 거야? 뭐야?)

이혁민 교수는 최대한 신중하게 판단을 내리고자 했다. 정갑수의 전공의 신분이 박탈된다면 정갑수 아버지와 금경태 과장이 어떻게 나올지는 빤한 일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병원 자체적으로 김지훈에게 징계를 먹일 것이다. 더구나 행정적인 절차에 들어간다면 김지훈의 이력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일반 외과 발전안과 함께 맞물린 이준영 과장의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 한 번은 꼭 만나야 할 상황이었다. 이번 일에 잘만 대응한다면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수의 일반 외과 성원들이 뜻을 모은다면 그만한 힘도 없을 것이다.

지금이 만나야 할 바로 그때였다.

“정갑수 문제를 잘못 처리하면 결국 김지훈이 징계를 먹을 겁니다. 게다가 보사부나 교육부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면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장님. 또 다른 상황도 있고 말입니다.”

(다른 문제는 뭐고 상황은 또 뭐야? 중요한 거야?)

송재덕 과장이 정말 앞으로 발생할 문제를 모를까?

어쩌면 이혁민 교수의 생각을 묻는 것일지도 몰랐다.

“예, 과장님.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이혁민 교수의 목소리가 옆에 앉아 있어도 못 들을 정도로 나직해졌다. 그만큼 극히 중요하고도 비밀을 요하는 말이었다.

“일단 이렇게 알고 계십시오, 과장님. 자세한 상황을 전화로 상의드리기에는 좀 곤란하니까 시간을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내일 저녁에 시간 있으십니까?”

(왜? 올라고?)

“예. 이준영 선생님과 함께 내려가겠습니다.”

(준영이하고? 좋지. 좋아. 내려와. 술 사 줄 테니까 빨리 내려와. 빨리. 준영이도 꼭 와야 돼.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과장님.”

“그래그래. 내일 보자구, 이 교수.”

이런 상황에서도 오래간만에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를 본다는 생각에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이었다. 평소 복잡한 문제가 있어도 한번 결정을 내리면 크게 고민하지 않는 송재덕 과장이었다.

그러나 말투나 겉보기와는 달리 의외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하기에 이혁민 교수도 소아과 신상민 과장과 더불어 가장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전화를 끊은 이혁민 교수가 막바로 음성에 전화를 걸었다. 김지훈과 관련된 이번 일과 송재덕 과장을 만나 상의할 일이 있다는 말에 이준영 과장도 바로 천안에서 보자고 했다.

마지막으로 금경태 과장에게 연락을 하자 난리가 났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았다.

(뭐? 전화로는 안 돼서 직접 내려가야 할 것 같다고? 이 양반이 정말. 이 정도 성의를 보였으면 반응이 있어야지. 알았어, 이 교수. 갈 필요 없어. 내가 지금 내려가서 확실하게 답을 들어야겠어.)

이혁민 교수가 깜짝 놀랐다.

“예? 직접 만나시겠다고요?”

(그래야지. 정갑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자네도 알잖아. 그냥 덮어야 할 일을 왜 이렇게 크게 만들어.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으니까 천안에 있겠지. 에이!)

금경태 과장이 전화를 끊으며 중얼거렸다.

“병원이 누구 손에 있는지도 모르고 감히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나이가 벼슬인 줄 아는 거야, 뭐야? 이참에 확실히 내보내는 게 낫겠어.”

금경태 과장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이혁민 교수가 전화기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마지막 말을 들은 이혁민 교수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지금도 일반 외과의 인사권을 거의 다 틀어쥐고 이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손을 뻗치는 금경태 과장이었다. 오상익 교수나 송재덕 교수가 없다면 견제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일반 외과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이었다.

이혁민 교수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 시간 송재덕 과장도 외래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정갑수에서 시작된 일이 예상외의 수많은 문제들을 몰고 온 것이다. 그때 이혁민 교수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금경태가 곧 내려올 거라고? 알았어. 걱정하지 마.”

송재덕 과장의 말투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상황이 의외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김지훈은 오늘도 수술 방과 응급실을 바쁘게 뛰어다녔다. 정갑수가 없는 탓에 수술 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수술이 끝나고 나면 쉴 틈도 없이 여기저기 밀린 일들을 해야 했다.

‘후아! 힘들다. 어깨가 다 결리네. 정갑수, 넌 정말!’

수술 방의 긴장은 언제나 온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수술이 잠시 없는 틈을 타 급히 응급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기지개를 펴며 뻐근한 어깨를 풀었다. 막 외래 건물을 지나 응급실로 들어가려 할 때 누군가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금경태 과장이었다.

이제 오후 5시도 안 됐다. 서울에 있어야 할 금경태 과장을 천안에서 보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더구나 표정까지 좋지 않았다. 다소 놀란 표정으로 김지훈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김지훈을 본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찌푸렸다.

오는 길이 너무 막혀 짜증이 나 죽겠는데 오자마자 김지훈을 본 것이다. 인사도 받지 않고 외래로 가려던 금경태 과장이 마침 방사선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손짓을 했다.

“김지훈, 너 이리 와 봐.”

“예, 과장님.”

“너 정갑수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정갑수 문제 때문에 천안까지 내려오신 거야? 하긴 그만둔다고 나갔으니까 일이 커질 만도 하지. 에이! 더러워서라도 참았어야 했나?’

내심 후회를 하며 김지훈이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어차피 다 알고 있을 문제였기에 악어의 멱살을 잡은 사실까지 그대로 얘기했다.

금경태 과장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김지훈, 너는 어떻게 사방팔방에서 일만 벌리고 다녀. 그리고 선배한테 그게 무슨 짓이야. 예의만 지켰어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 내가 이런 일로 여기까지 와야 돼?”

“죄송합니다.”

“말로만 죄송하면 뭐해? 이 자식은 나하고 전생에 무슨 원한이 있나. 넌 어떻게 된 놈이기에 하는 짓마다 손해를 끼쳐. 처신 똑바로 못해? 너 자꾸 이러면. 어휴!”

의아한 말이었다. 순간 이해를 하지 못한 김지훈이 금경태 과장을 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이 들어왔다. 짜증이나 신경질만은 아니었다.

전공의들의 문제로 단순히 화가 난 것만도 아니었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분명 자신에 대한 분노가 실려 있었다. 얼굴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까지 느껴졌다.

“에이! 가 봐. 꼴도 보기 싫어.”

신경질을 있는 대로 낸 금경태 과장이 외래로 향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응급실로 가던 김지훈이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정갑수에게 더 화를 내야 마땅한 일이었다. 선후배 간의 문제는 지엽적인 일에 불과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방치한 문제는 누구도 지나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금경태 과장은 정갑수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하는 짓마다 손해를 끼쳤다는 게 무슨 말이지? 그 눈빛은 또 뭐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태도였다.

응급실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던 환자를 본 후 다시 수술 방으로 가는 내내 금경태 과장의 말에 신경이 쓰였다. 손일석이 한 말과 맞물리면서 더욱 머리가 복잡해졌다.

‘확실히 뭔가 있어. 도대체 내가 과장님하고 다른 문제가 있을 게 뭐가 있지?’

인턴 때는 물론 1년차가 된 후에도 얼굴도 몇 번 못 봤다.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말해 주지 않은 한 장례식장 문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갑수에 이어 금경태 과장까지 스트레스만 쌓였다.

수술 방에 들어가 신현수와 교대를 한 김지훈은 수술에 집중하지 못했다. 수술이 끝난 후 백무용 교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김지훈, 힘들어?”

“아닙니다.”

“그런데 너 왜 수술하는 내내 이렇게 멍해. 응급실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오전만 해도 눈을 부릅뜨며 어떻게든 수술을 보려고 애쓴 김지훈이었다. 그런데 잠깐 응급실을 갔다 온 후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집중하지 못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무 일도 없습니다.”

백무용 교수가 피식 웃으며 3년차에게 말했다.

“셋이 하는 일을 둘이 하려니 힘들겠지. 치프, 얘들 좀 재워. 현수 그놈도 눈이 거의 감기더라. 이러다 곧 쓰러지겠어. 그럼 니들이 대신 일할래?”

“예, 선생님. 재우겠습니다.”

3년차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입맛만 다셨다. 어쩌면 각오를 단단히 했던 100일 당직 때가 지금보다도 덜 힘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지훈이 안색만 굳힌 채 입을 열지 못했다. 환자만 열심히 본다고 해서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진 않는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금경태 과장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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