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84화 (184/1,329)

제6화 정갑수, 너 정말 힘든 놈이다 (3)

일과를 시작하기 전부터 정한득이 전화에 대고 성질을 냈다. 하필이면 수술이 있는 날이라 점심때가 넘어서야 송재덕 과장에게 전화가 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수련 부장과 통화를 하고 나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다른 전공의라면 몰라도 정갑수를 이런 식으로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 아직은 정한득의 힘이 무척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송재덕 과장이 이런 문제를 자신과 미리 상의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심사까지 뒤틀어져 있었다.

‘송재덕, 갑수 아버지가 보사부 국장이란 걸 알면서도 이렇게 나오는 거야? 이제 나하고는 확실히 등을 돌리겠다 이거지. 이렇게 나오면 앞으로 과장 자리도 유지하기 힘들 거야.’

금경태와 마주 앉은 정한득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이거 섭섭한데. 자네를 믿고 내 아이를 맡겼는데 이렇게 신경을 안 쓰면 곤란하지. 천안에서 스태프들하고 전공의들 사이에 껴서 마음고생을 많이 한 모양인데 그걸 몰랐어? 자네도 알다시피 그놈이 나이만 먹었지 좀 여리지 않나. 남한테 함부로 욕도 못하는 아이야. 그런데 후배에게 망신을 당했으니 오죽했겠어.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올 생각을 다 하고 말이야. 에이! 속상해서 원!”

“구체적으로 말을 해 봐. 갑수가 뭐라고 그래?”

금경태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정한득이 정갑수에게 들은 일들을 설명했다. 가뜩이나 왜곡된 말에 정한득 나름의 그럴듯한 추측까지 더해지자 김지훈이 완전히 죽일 놈이 됐다.

“위아래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놈 때문에 내 아들이 피해를 보고 있어. 웬만하면 지나갈 수도 있지만 수련까지 포기할 정도라니 이게 말이 돼? 송재덕 과장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실수한 거야.”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더니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하는구만. 국장만 아니면 정말! 그나저나 김지훈, 이놈은 장례식장으로 내 발목을 잡더니 이젠 정갑수하고도 문제를 일으켜? 쥐뿔도 없는 놈 때문에 이게 무슨 망신이야.’

금경태 과장이 맞는 말이라는 듯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까지 끄덕거렸다.

“이 사람아, 그럼 빨리 연락을 줬어야지. 일주일이나 지났으면 나도 손을 쓰기 힘들어. 서울도 그렇지만 천안 수련 부장도 여간 깐깐한 사람이 아니거든. 특히 천안 병원의 송재덕 과장이 제일 문제야.”

“그러니까 자네를 찾은 거 아닌가. 손을 좀 써 봐. 내 아들이 곧 자네 아들이잖아. 그리고 곧 인사이동이 있을 거야. 지금 상황을 봐서는 앞으로 재단 이사장님하고 더 자주 만나게 될 가능성이 꽤 높아.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금경태 과장이 턱을 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여전히 자신만만한 걸 보니 곧 승진을 한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군. 그러니 자식 놈 때문에 벌어진 문제를 부탁하면서도 이렇게 뻣뻣하겠지. 정한득이가 승진을 한다? 하는 짓은 눈꼴사납지만 내 앞 길을 위해서는 참는 수밖에.’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보사부 국장인 정한득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인맥이었다. 재단 이사장인 신동석에게도 갑질 행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친구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힘이었다.

“알았네. 친구 부탁인데 당연히 내가 힘을 써야지. 그런데 말이야, 요새 혁신위원회에서 각 과들의 개선 방향을 상의하고 있어. 그 탓에 전공의들 문제에도 상당히 민감한 시기지만 그 정도는 내가 감수해야지. 걱정하지 마.”

“역시 내가 친구 하나는 잘 뒀어. 아들 놈 일만 무난하게 처리해 주면 신세 톡톡히 갚지.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것이 세상일이 아닌가? 하하하!”

정한득이 크게 웃으며 종이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고작 선물 받은 양주 한 병 가져온 거야? 쫀쫀한 놈.’

슬쩍 가방 안을 본 금경태 과장이 콧등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두 손까지 내밀며 아주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이쿠! 우리 사이에 뭘 이런 걸 갖고 와?”

“자네가 발렌타인 30년산을 제일 좋아하잖아. 얼굴 본 지도 오래됐고 해서 겸사겸사 갖고 왔어. 친구 사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부담 되는 일도 아니고 말이야.”

“고마워. 잘 먹을게.”

“친구 사이에 고맙다는 말은. 입장 곤란하거나 어려울 때 발 벗고 나서서 서로 도와주는 게 친구잖아. 안 그래?”

‘경태야,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너도 내 앞에서 지금 당장 뭔가 보여 줘야지?’

정한득이 의자에 등을 척 기댔다. 여전히 자식 문제로 부탁을 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도리어 금경태 과장이 부탁을 하는 입장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문제는 천안이지만 일단 서울부터 해결하지. 수련 부장이 깐깐하긴 해도 내 말을 무시하진 못할 거야. 잠깐만 기다리게.”

금경태 과장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호기롭게 웃으며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었다.

“어! 수련 부장. 나 금경태야. 아까 나한테 말한 문제 있잖아. 다시 한 번 상황 좀 설명해 줘.”

전화기 너머로 상황을 설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정한득이 한 말과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랐다.

어레스트가 난 환자를 방기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웬만하면 말 몇 마디로 묻을 수 있겠지만 이런 문제가 걸렸다면 송재덕 과장은 절대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이거 의외로 골치 아프겠는데. 어쩐다. 흐음! 그래도 저놈이 제 아들이라면 껌벅 죽는 것만 잘 이용하면 최소한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빠르게 머리를 굴린 금경태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척 난감하고 고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의외로 복잡하구만. 그래서 말인데 일단 송재덕 과장의 요청은 잠시 보류하고 지금부터는 내게 맡겼으면 좋겠어. 전공의 문제는 해당 과 내부에서 해결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잖아. 천안 수련 부장하고 송재덕 과장은 내가 해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시간이 너무 지나 조금은 곤란하다는 소리가 들렸다.

정한득이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쳤다.

“허어! 참! 정갑수 아버님이 지금 내 앞에 계시네. 현직 보사부 국장님이신데 자네까지 곤란하다고 하면 내 입장이 어떻게 되겠어. 게다가 이사장님까지 아시면 일이 더 복잡해질 거야. 그러니까 이쯤에서 잘 해결하자구. 자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설마 수련 부장만 하고 끝낼 셈이야?”

잠시 침묵이 흐르다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 들렸다.

정한득이 슬며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 번듯하게 의사를 만들고 싶었다. 당연히 남들 다 하는 전문의가 돼야지 일반의로 끝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게 무슨 꼴이야. 송 과장인가 하는 인간도 그렇고 어떤 놈들이 내 자식을 이렇게 만든 거야? 특히 김지훈이라는 놈이 선후배도 몰라보고 함부로 대한다고 했지?’

잠시 후 금경태 과장이 전화를 끊자 정한득이 조용히 물었다. 아들의 앞길에 방해가 될 만한 일은 어떻게든 처리해 주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이라고 여겼다.

“자네 이번 일의 원인이 김지훈이란 건 알지?”

김지훈에 관한 일은 맞장구를 치는 것보다는 슬쩍 뒤로 물러나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정한득이 계속 부탁하는 식으로 상황을 이끌수록 얻을 수 있는 득이 커질 것이다.

금경태 과장이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대답했다.

“알지. 전공의라고 해도 아직 젊은 애들이니까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뭐. 왜?”

“사람마다 자기 입장이 있겠지만 우리 아이 말로는 같은 연차라고 평소에도 선배 대접을 제대로 안 하는 모양이야. 아무리 같은 연차라고 해도 나이가 있는데 그러면 안 되지 않겠어? 일반 외과 위계가 꽤 세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정한득, 너도 참 문제다. 네 자식이 그따위로 일하는데 김지훈 그놈뿐이겠어? 팔불출이 따로 없구만.’

금경태 과장이 금시초문이라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럼 안 되지. 일단 내가 더 자세히 상황을 알아보고 문제가 있으면 확실하게 처리할게. 하지만 솔직히 갑수가 병원을 나온 것은 성급했어. 이런 문제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이번 한 번뿐이야.”

“내가 단단히 말을 할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하지만 만에 하나 똑같은 일이 또 발생하면 그땐 내 아들 놈에게 피해를 준 놈이 나가야 할 거야. 금 과장 자네만 믿어.”

“그래. 자네도 걱정하지 마.”

정한득이 입술을 꾹 다물며 시계를 보았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그럼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 오후에 장관님하고 중요한 회의가 잡혀 있어서 말이야. 요새 이쪽 문제는 다 나한테 맡기셔서 골치가 좀 아파. 혹시 내가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 줘.”

정한득이 장관까지 들먹이며 한껏 위세를 떨었다.

금경태 과장이 주차장까지 나와 정한득을 배웅했다.

친구라고는 하지만 일개 대학 병원 보직 교수와 보사부 국장과의 관계를 무시하지 못했다. 사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사이 이상은 아니었기에 금경태 과장이나 정한득은 이런 일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차를 타려던 정한득이 갑자기 생각이 난 것처럼 금경태 과장을 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금 과장,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말이야. 갑수 문제가 병원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이 안 되면 우리 부서만이 아니라 교육부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알지?”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찌푸리면서도 정한득을 보며 웃었다.

“이 사람아, 그 전에 내가 해결을 할 텐데 뭘 거기까지.”

“혹시나 해서 말이야. 어차피 내 아들 일이 아니어도 우리 선까지 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지 않겠어? 그런 상황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곤란해져.”

정한득이 수련 병원들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대학 병원의 수련의나 전공의의 신분은 독특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일개 병원의 직원이지만 주요 의료 인력으로서 의사 면허를 관할하는 보사부의 관리 감독을 받았다.

동시에 사립학교 교직원 신분을 가져 교육부와도 관련이 있었다. 넓게 확장하면 국방부까지도 군의관 수급 때문에 일정 정도 관계가 있었다. 이런 복잡한 관계들로 인해 전공의들의 신분은 확고하게 보장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학 병원이 전공의들의 수련 자격을 박탈하는 일은 여러 가지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의로 그만두는 경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타의에 의한 경우에는 정당한 사유와 함께 적법한 행정적 절차를 따라야 했다. 일주일 간 무단이탈을 했다고 해도 정갑수가 복귀 의사를 표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후자의 경우에 속했다.

금경태 과장이 순간 이를 갈았다.

‘이런 사유로 보사부와 교육부까지 올라가면 수련을 취소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다. 하지만 정한득이 자기 아들 일인데 그냥 지나갈 놈이 아니지. 이 일을 핑계로 내년 전공의 인원 배정부터 시작해 병원에까지 손을 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내 입지까지 흔들리게 될 텐데. 제길! 당장 목을 쥔 건 난데 당해야 하는 것 역시 나라니.’

어디나 그렇듯 병원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의료인들의 면허를 비롯해 수많은 권한을 쥔 보사부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수련에 문제가 생겼다는 핑계로 당장 내년에 전공의 배정을 각 과당 한두 명만 줄여도 모든 과가 인력 부족으로 아우성을 칠 것이다.

정한득이 승진까지 하는 마당에 그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은 더욱 쉬워질 것이다. 금경태 과장이 정한득을 보며 표정을 싹 바꾸었다.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

정한득의 차가 사라지자 금경태가 눈가를 좁혔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하는 수밖에 없겠어. 잘만 이용하면 이 일이 도리어 내 위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나저나 구영선을 서울로 올리든지 천안 과장으로 앉혀야 하는데 호락호락하지는 않겠지. 이참에 정한득을 이용해 오상익과 송재덕을 아예 밀어내? 일단 내 말을 얼마나 따르는지 보는 게 먼저겠지.’

일반 외과 개편안이 금경태 과장의 머릿속을 스쳤다.

정한득의 힘을 이용하면 자신을 따르지 않는 교수들을 모조리 내쫓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도 있었다. 보사부 장관의 총애까지 받는 국장이라면 신동석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더구나 정한득은 병원의 목줄을 쥐고 있는 부서의 장이기도 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공을 들였던 의사들을 모두 교수에 앉힌다면 은퇴할 때까지 권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 이후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금경태 과장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교수실로 돌아온 금경태 과장이 바로 천안 수련 부장에게 전화를 했다. 자신의 권위에 보사부 국장의 힘까지 거론하자 10분도 못 버티고 꼬리를 내렸다.

남은 사람은 이제 한 명뿐이었다. 송재덕 과장은 수련 부장들과는 달랐다. 과장이긴 했지만 보직 욕심이 없어 적당히 구스를 방법이 마땅치가 않았다.

금경태 과장에게 정갑수는 단순한 전공의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말썽을 부린 전공의에 불과할 것이다. 특히 송재덕 과장의 성격상 이미 내친 정갑수를 다시 받아들일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해도 무방했다.

자신이 서울 과장이라고 해서 힘으로 누를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누구든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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