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정갑수, 너 정말 힘든 놈이다 (1)
오후 일과가 모두 끝나도록 정갑수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백무용 교수의 회진도 빼먹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 회진 때도 안 보인 것 같았다. 위 연차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김지훈, 신현수, 일단 우리가 오더 내고 있을 테니까 인턴 선생들하고 정갑수부터 찾아.”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리며 병원을 샅샅이 뒤졌다.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생각도 안 하고 아예 하루 일을 빼먹다니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인간이었다. 있을 만한 곳은 다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 정갑수가 오프 때 어디를 가는지 아는 신현수도 얼굴을 구긴 채 돌아왔다. 인턴들도 고개만 저었다.
정갑수가 안 보인다는 말에 최철한이 벌떡 일어났다.
“뭐야? 이 새끼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설마 나간 거야?”
“선생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평소에도 혼 좀 나면 몇 시간씩 사라졌었잖아요. 이번에는 좀 심하게 탔지만 그래도 오늘 안으로는 들어오겠죠.”
유석재가 손을 저으면서도 얼굴을 펴지 못했다.
설마 병원을 무단이탈한 것일까?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 안으로 돌아온다면 전처럼 단순한 일탈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의국장 선에서 충분히 무마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수련을 포기했다는 말일 될 수도 있었다.
이는 정갑수 개인 문제를 떠나 일반 외과 전체의 명예가 달린 문제였다. 일반 외과의 트레이닝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과의 구성원조차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밤이 늦도록 의국에 남아 일을 하던 김지훈이 신현수를 보았다. 이미 새벽 2시가 넘었다.
“현수야, 정말 나간 걸까?”
“신경 안 써.”
“후우! 나도 그러고 싶다만 미운 정이라도 쌓였나. 신경이 꽤 쓰이네. 그냥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 그동안 그렇게 혼이 났으면 정신 차릴 때도 됐잖아.”
차팅을 하던 신현수가 혀를 찼다.
정갑수에게 가장 화가 날 사람은 김지훈이었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정갑수가 그간 김지훈에게 어떻게 했는지 잘 알고 있는 신현수였다. 선배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없다고 해도 큰 차이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김지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넌 그동안 그렇게 당하고도 미련이 남아? 정갑수가 네 일만 의도적으로 빵구 낸 거 잘 알잖아.”
“미련은 무슨. 정갑수에겐 절대 그런 거 없다. 그리고 내가 뭘 당해? 인마.”
“그런데 왜 나갔을까 봐 걱정을 해?”
“그러게. 솔직히 말하면 정갑수가 아니라 정갑수가 볼 환자가 걱정된다. 어쨌든 나중에 취직이나 개업은 할 거 아니냐. 환자 저렇게 보면 분명히 사고 치고도 남아.”
신현수가 코웃음을 쳤다.
“그건 정갑수 일이고.”
“환자는 무슨 죄가 있어. 난 지금이라도 정갑수가 환자만 열심히 보면 좋겠어. 그 인간이 어떻게 살든 의사라는 사실은 평생 변하지 않잖아.”
신현수가 볼펜을 놓으며 김지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김지훈, 지금 우린 당장 해야 할 일만으로도 힘들어.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구. 그리고 환자만 열심히 보면 뭐해? 실력 있는 일반 외과 의사가 되는 게 먼저 아냐? 그럼 환자는 저절로 잘 보게 돼.”
“맞아. 의사라면 당연히 지식하고 기술을 모두 갖춰야지. 하지만 그 전에 환자를 먼저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너도 그러니까 이 밤까지 일하고 있는 거 아냐.”
“실력은 없으면서 환자한테만 잘하는 의사가 정말 의사야? 그런 의사는 의사가 아니라 돌팔이야. 웃으면서 환자 죽이면 뭐가 달라져?”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돌팔이가 되면 안 되지. 근데 의사하고 환자는 별개가 아니잖아. 그리고 환자에 대한 성의나 마음이 없는데 실력이 쌓일 수가 있어? 환자 없으면 그걸 다 어디다 쓸 건데.”
신현수가 피식 웃었다.
“환자가 원하는 의사가 어떤 의사인지 잘 생각해. 그리고 의사도 무언가는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이야. 네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지만 난 확고한 꿈이 있어. 실력이 처지는 의사를 누가 존경하겠어?”
“네 말도 맞는 말이라니까, 인마. 다만 항상 환자가 먼저라는 얘기야. 그럼 당연히 지식도 쌓아야 하고 수술도 열심히 배워서 내 것을 만들어야지. 솔직히 너나 나나 지금 아무리 애를 쓴다고 암 수술을 할 수가 있어? 실력이 느는 것도 다 단계가 있는 거잖아.”
김지훈의 말에 신현수가 다시 차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너와 나의 차이야. 난 1년차라고 해서 1년차에게 주어진 일만 하고 싶지는 않아. 뛰어 넘을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넘어설 거야.”
때아닌 논쟁이었다. 누구의 말이든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서로의 표현이 다를 뿐 기본적인 생각은 같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김지훈은 단 한 가지 사실만은 동의할 수 없었다.
환자에 대한 열정과 이해는 의사이기 전에 가장 먼저 갖춰야 할 품성이자 원칙이라는 생각이었다. 시간도 늦었고 둘 다 잠이 몰려와 더 이상 심각하게 말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기지개를 펴며 중얼거렸다.
“신현수, 넌 정말 대단해. 그래서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고. 다만 전공의 수련이 왜 4년이겠냐. 각 연차마다 반드시 익혀야 할 기본이 있을 테고 어떤 것은 1년이 꼬박 걸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우린 실력이 있든 없든 의사잖아. 정갑수도 밖에서 보면 의사다.”
은연 중 김지훈의 생각이 드러났지만 신현수가 무심코 지나쳤다.
“각자 생각이 다른 거니까 이쯤 하자.”
“그래.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정갑수가 정말 나갔으면 너나 나나 완전히 뭐 됐다.”
셋이 할 일을 둘이 해야 한다면 그것보다 힘든 상황은 없을 것이다. 신현수도 그런 생각을 하면 입맛이 쓴지 얼굴을 찌푸리기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김지훈이 히죽 웃었다.
“왜 웃어?”
“현수야, 정갑수 안 들어오면 우리가 대신 수술을 들어가겠네. 하하하!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땡큐다. 간담도 쪽도 봐야 할 수술이 너무 많은데 몇 번 못 봤거든.”
차트에 눈을 두고 있던 신현수가 슬며시 김지훈을 보았다.
‘정말 안 들어오면 너나 나나 힘들어 죽을 텐데 그 와중에도 수술을 더 많이 들어갈 수 있어서 좋다고?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힘이 있어야 수술을 보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어이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은지 신현수가 볼펜만 잡은 채 기록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김지훈을 이기려고 애를 썼고 실력이 가장 우선이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은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한 것이다.
김지훈에게 뭔가 조금씩 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 신현수가 벌떡 일어나 의국을 나갔다. 의국 문이 꽝하고 닫혔다. 별다른 생각 없이 앉아 있던 김지훈이 움찔거리며 투덜거렸다.
“에이 씨! 깜짝 놀랐잖아. 살살 좀 닫지.”
그날 밤 김지훈도 신현수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응급실 콜도 문제였지만 여러모로 심사가 복잡하기만 했다.
다음 날 아침.
정갑수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송재덕 과장과 백무용 교수가 버럭버럭 화를 내며 정갑수를 찾으라고 호통을 쳤다. 미우나 고우나 일반 외과 전공의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갑작스럽게 한 명이 줄어들자 김지훈과 신현수의 일이 엄청나게 늘었다. 잠시도 쉴 틈이 없이 움직여야 간신히 일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다음 날도 정갑수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거 완전히 음성이다. 으아아! 정갑수!’
가장 한가한 연차인 2년차들이 돌아가며 정갑수를 찾았지만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신현수 역시 치프들의 오더를 따라 정갑수의 집에까지 전화를 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피곤한 눈으로 차팅을 하던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갑수에겐 도대체 무엇이 부족한 걸까?
고위 공무원인 아버지 덕에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랐을 것이다. 분명 열심히 공부를 했기에 의대를 들어왔을 테고 지금은 어엿한 의사가 됐다.
가진 능력에 조금만 노력을 기울여도 최고의 의사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넘치고도 남았다. 그런데 정갑수는 정반대로 최악의 의사를 향해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너무 부족한 게 없어서 그럴까? 모든 환자에게 가진 정성을 다 쏟진 못해도 사람의 생명을 앞에 두고 그러면 안 되는데. 나 같으면 노래를 부르고 다니겠다, 후우! 그런데 나한테는 무엇이 있지?’
생각해 보니 손에 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열정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수술이 재밌고 환자를 보는 일은 즐겁기까지 했다. 생명이 위태로웠던 환자가 두 발로 걸어 나갈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정말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또 있었다. 자신을 아끼며 사랑해 주는 친구와 선배, 그리고 이준영 과장을 포함한 교수들만이 아니었다. 고경아와 정훈철은 삶의 중요한 위안이자 힘들 때마다 등을 기댈 수 있는 이들이었다.
정갑수는 왜 그걸 모를까?
‘환자의 아픔과 생명의 소중함을 모른다면 의사로서의 자격도 없겠지. 절대 잊지 말자. 최고의 써전이 되려면 그게 가장 필요한 마음이 분명해. 날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겠지? 사랑! 경아 씨!’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행복해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었다. 은근한 설렘에 미소를 짓던 김지훈이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몸과 마음이 피곤해지면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지곤 하는 각오를 꽉 잡은 날이었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흘렀다.
그동안 잘 버텨 왔던 김지훈과 신현수가 차팅을 하다 말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심지어 오더를 받는 중에도 말이 끊어지면 절로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술을 들어가고 응급실까지 맡은 탓에 체력이 빠르게 소진된 것이다.
스테이션에서 간호사가 뭔가를 떨어트린 모양인지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점점 깊은 잠에 빠져들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신현수가 테이블에 엎드린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눈가를 비비며 졸음을 쫓던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정갑수가 딱 개똥이야. 이런 식으로는 매일 수술에 들어가야 봐야 하나도 못 배울 텐데 큰일 났네. 나흘 만에 이렇게 되다니 그 좋았던 체력은 다 어디 갔지? 그런데 이 인간 정말 그만둘 생각인가?’
불과 나흘이었지만 1년차들에게 주어지는 업무는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위 연차들이 도와주고는 있었지만 마치 100일 당직을 다시 서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회진과 수술에 응급실만으로도 한계가 명확하게 나타났다.
오늘도 간신히 송재덕 과장의 수술을 볼 수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지 않았다면 수술에 들어간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문득 신현수의 말이 생각난 김지훈이 찬물에 세수를 하고는 창문을 열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1년차의 한계를 뛰어넘는다고 했었지. 현수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내겐 그런 방법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방법은 없었다.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해 나가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10월 말의 차가운 밤바람에 졸음을 쫓은 김지훈이 신현수를 깨웠다.
“현수야, 차팅은 하고 자자.”
“응? 몇 시야?”
“2시 반.”
두 눈이 시뻘게진 신현수가 인상을 잔뜩 구기며 볼펜을 잡았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이내 김지훈이 혀를 내밀며 전화를 받았다. 응급실 콜이었다.
얼마 후 응급실로 내려온 신현수가 곧 수술 방으로 향했다.
난장판 한가운데 선 김지훈이나 수술에 들어가는 신현수나 오늘도 맘 편히 자기는 글렀다. 100일 당직 때처럼 조각 잠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하루 종일 뛰어다닌 김지훈이 결국 얼굴을 구겼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 정갑수. 아예 들어오지 마라. 이제는 네가 다시 들어와 봐야 화만 더 날 것 같다.”
의국 분위기가 완전히 싸늘해졌다.
과의 명예고 뭐고 이젠 일말의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일이 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과를 막론하고 일에 지친 전공의들이 순간적인 충동을 못 이기고 병원을 나가는 일이 있었다.
원칙대로 처리하면 어떤 사유가 있든 한번 나가면 다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대개는 하루 이틀 내에 돌아왔고 수련을 담당한 교수들 역시 없던 일로 처리했다.
물론 과에 따라서는 엄청난 매타작이 뒤따르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나가게 된 이유를 듣고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불만 사항을 개선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았다.
정갑수에게도 기회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