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81화 (181/1,329)

제5화 결국 사고를 (2)

다음 날 평상시와 다름없는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 송재덕 과장이 오후 회진을 올라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몰라 외래에 연락을 하던 최철한이 김지훈과 유석재를 의국으로 불렀다. 표정이 상당히 심각했다.

“김지훈, 너 어제 응급실에서 정갑수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별일 아닙니다.”

“정형외과 교수님이 외래에 오셔서 너 징계해야 한다고 난리를 치고 있다는데 별일이 아냐? 악어는 또 뭐야, 인마.”

최철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믿었던 김지훈이 사고를 쳤으니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이며 콧등을 찡그렸다.

‘둘 다 창피한지도 모르는 인간들이었나?’

하루 종일 찜찜했었다. 별일 없기를 바랐지만 무언가 사달이 난 모양이었다. 하긴 후배가 선배의 멱살까지 잡았으니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최철한과 유석재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어휴! 참아야지. 악어가 아무리 지랄 같다고 해도 네 선배야. 정갑수는 우리 과니까 어떻게 한다고 하지만 악어는 정형외과 아니냐. 김지훈, 너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죄송합니다. 선생님.”

“나한테 죄송한 게 아니라 과장님이 문제잖아. 말씀을 직접 안 하셔서 그렇지 널 얼마나 아끼시는데……. 후우! 이걸 어떻게 해결하냐. 정갑수, 이 새끼는 나한테 먼저 얘기를 해야지. 쪽팔리지도 않나. 아후! 개새끼. 정말 내쫓고 싶다. 김지훈, 너도 마찬가지야, 인마.”

김지훈이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계질서가 어느 사회보다 강한 의사 사회에서 선배에게 덤볐으니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란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유석재가 물었다.

“지훈아, 너 주먹 휘두르거나 그러진 않았지?”

“예. 하지만 악어 선배 멱살은 잡았습니다.”

“멱살을 잡아? 너 악어 선배 아버지가 재단 이사라는 사실 알잖아? 잘했다, 인마. 징계위원회 열리면 어떻게 하냐. 죽겠네. 정갑수 아버지가 보사부 공무원에 금 과장님 친구라는 것도 몰랐어? 어휴! 참았어야지, 이 자식아.”

사실 최철한이나 유석재도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난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하필이면 선배였고 그것도 배경이 든든하기만 한 악어와 정갑수였다.

조용히 덮고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간간이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 소리만 들렸다.

그때 간호사가 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최철한 선생님, 과장님 올라오셨어요.”

드디어 올 게 왔다.

최철한이 김지훈을 보며 다짐을 받았다.

“뭐라고 하시든 무조건 잘못했다고 해. 정형외과 교수님이 과장님께 정식으로 항의한 이상 다른 도리가 없어. 알았어?”

“예, 선생님.”

김지훈이 이를 악물었다. 솔직히 후회는 없었다. 환자의 생명보다 악어나 정갑수의 꼴같잖은 명예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병원이라면 미련을 둘 이유가 없었다.

모두들 고개를 푹 숙인 채 후다닥 달려 나갔다. 김지훈이 사고 아닌 사고를 쳤지만 책임은 파트 전체에 있었다. 특히 최철한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의국장이 공연히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런 일이 있었으면 가장 먼저 알고 송재덕 과장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수습을 했어야 하는 자리였다. 악어나 정갑수가 외래에 말을 하기 전에 미리 얘기만 했어도 전공의들끼리 서로 사과하고 잘 마무리될 수도 있었다.

물론 김지훈이 무릎이라도 꿇어야 했지만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것보다는 백배 나은 일이었다.

죽을죄라도 진 것처럼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신현수도 대충 상황을 들었는지 뭔가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송재덕 과장이 별다른 기색도 없이 평소처럼 회진을 돌았다. 다만 말이 없을 뿐이었다.

김지훈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뒤를 따랐다. 회진이 모두 끝나고 스테이션 앞에 모였다. 다른 파트 전공의들도 병동을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송재덕 과장이 힐끔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

이름을 반복하지 않았다. 기분이 완전히 상했다는 말이었다. 일순 스테이션이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연이어 야야 소리가 터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초긴장 상태였다.

“예, 과장님.”

“정갑수하고 악어한테 응급실에서 어떻게 했어? 정형외과 3년차라는 놈이 악어 맞지?”

송재덕 과장의 말이 조금은 묘했다.

김지훈이 내심 각오를 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멱살을 잡았습니다.”

“멱살을 잡았어? 정말 한 대도 안 때렸어?”

“예. 안 때렸습니다.”

송재덕 과장이 인상을 확 썼다.

그 순간 최철한과 유석재의 안색이 시커메졌다.

“김지훈, 야 인마. 다음에는 때려. 환자 안 보는 새끼들은 맞아야 돼. 아주 잘했어. 징계위원회? 어디서 감히 그딴 소리를 해. 그런 건 개나 주라고 그래.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와. 김지훈, 잘했어. 아주 잘했어. 어깨 펴.”

다들 놀라 송재덕 과장만 보았다.

정형외과 스태프가 외래까지 찾아와 항의를 했다면 야야 소리가 당연히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아예 웃기까지 했다.

“허허! 역시 김지훈이야. 네가 김지훈이지.”

“예, 과장님.”

김지훈은 대답을 하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그래그래. 김지훈이. 음! 최철한.”

“예, 과장님.”

“너 의국장이잖아. 의국장. 정갑수, 이노무 자식 확실하게 고쳐 놔. 알았어? 철한아, 철한아, 우리 과 일은 우리 과 안에서 처리해야지. 다른 데 끌고 가는 거 아니지. 그치? 내 말이 맞지?”

“예, 과장님.”

최철한이 묘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유석재를 비롯한 다른 전공의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송재덕 과장을 보며 최철한을 비롯한 모든 전공의들이 크게 소리쳤다.

“수고하셨습니다, 과장님.”

“그래그래. 열심히 환자 보자. 목숨보다 중요한 거 없다. 암! 제일 중요하지. 그럼. 우린 일반 외과 의사잖아.”

평소 회진을 끝내고 외래로 내려갈 때는 말이 없었던 송재덕 과장이 손까지 흔들었다. 최철한이 눈가에 힘을 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야! 내가 알고는 있었지만 과장님 정말 멋지시네. 석재야, 지훈아, 안 그래?”

환자를 등한시하면서 단지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위세를 떠는 전공의들에겐 조금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바로 그런 이유로 송재덕 과장은 김지훈이라는 일반 외과의 자식 하나를 힘껏 감싸 안은 것이다.

‘후우! 감사합니다, 과장님. 저도 반드시 진정한 일반 외과 의사가 되겠습니다.’

강한 흥분과 감동에 휩싸인 김지훈이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누군가 말을 걸면 왈칵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정갑수나 악어에겐 최악의 상황이었다.

확실한 상황도 모르고 송재덕 과장에게 항의를 했던 정형외과 교수가 도리어 면박을 당했다. 어레스트(arrest:심 정지)까지 난 환자를 등한시했다는 사실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형외과 외래로 끌려간 악어가 된통 깨졌다. 그나마 아버지가 재단 이사인 데다 김지훈과는 과가 달라 유야무야 지나갔다. 하지만 정갑수는 또 다른 지옥에 빠졌다.

의국 치프들에게 번갈아 가며 깨진 것은 물론 평소 조용하기만 했던 백무용 교수까지 호되게 질책을 했다. 물론 이번 사태의 당사자 중 한 명인 김지훈도 당연히 정갑수와 함께 불려 다녔다.

“정갑수, 너 정신 안 차릴래? 응급실 당직이 아니어도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가 있으면 봐야 하는 게 우리 과야. 그런데 당직도 아닌 같은 연차에게 어레스트 난 환자를 던져 놓고 넌 당직실에서 노닥거려? 평소에 일이나 열심히 했으면 몰라. 계속 그따위로 할 거면 차라리 옷 벗어. 4년 동안 뭐라도 배우고 싶으면 정신 차리고 똑바로 일을 하든지. 그리고 김지훈,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정갑수는 네 학교 선배야, 인마. 조심해.”

정갑수가 이마에서 땀이 날 정도로 혼이 났다. 김지훈에게도 경고를 했지만 말미에 짧게 끝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이번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환자 문제가 핵심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정갑수를 챙기던 구영선 교수마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재덕 과장은 아예 눈길을 주지 않았고 정갑수도 최대한 피해 다녔다. 야야 소리가 또 터져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선배들의 도움과 믿음이 있어도 힘든 1년차 생활이었다. 평소에 잘했다면 모르지만 그도 아니었다. 밤늦게 홀로 숙소에 앉아 있던 정갑수가 이를 갈았다.

“씨펄! 선배 멱살을 잡은 새끼는 칭찬을 받고 난 이렇게 대한단 말이지. 김지훈, 그 새끼한테 환자를 잠시 맡긴 게 그렇게 잘못한 일이야? 환자가 죽었으면 또 몰라. 누가 봤든 멀쩡히 잘 살아만 있으면 되는 거 아냐? 아! 씨펄! 전문의고 뭐고 내가 더러워서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정갑수가 밤새 욕을 해대며 씩씩거렸다.

다음 날 아침 일과가 끝난 후 김지훈과 신현수가 여느 때처럼 수술 방에 들어갔다. 웃고는 있다고 해도 김지훈의 입장에서 송재덕 과장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송재덕 과장이 마지막 수술에서 또 퍼스트를 세웠다. 그것도 무려 위궤양 천공 환자였다. 번개처럼 움직이는 송재덕 과장의 손을 김지훈의 손이 빠르게 뒤따랐다.

“마무리해. 마무리. 천천히. 지훈아, 천천히 해.”

그 말에 정말 천천히 한다면 바보 인증이었다. 수처 하면 치프들도 한 수 접어야 할지도 모르는 김지훈이었다. 더구나 아뻬와는 달리 정중앙을 길게 절개한 수술 창을 닫는 일이었다.

정확하고 빠른 솜씨에 송재덕 과장의 입이 찢어졌다.

“잘한다. 잘한다. 네가 김지훈이구나. 허허!”

직접 수술까지 해 봤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송재덕 과장이 난리가 났다. 휴게실에 앉아 다른 과 교수들에게 김지훈을 칭찬하기 바빴다.

눈치 빠르게 이 사실을 안 구영선 교수 역시 마지막 수술에서 신현수를 퍼스트로 세웠다. 송재덕 과장이 넌지시 수술실에 들어와 신현수가 퍼스트를 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담낭 절제술 환자로 어시스트를 서기 여간 까다로운 수술이 아닌데도 훌륭하게 해냈다. 구영선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신현수는 제자 중의 한 명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으음! 신현수, 잘한다. 잘해. 현수구나. 너 1년차지?”

신현수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구영선 교수가 자신에게 수술이나 퍼스트를 분에 넘치게 주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교수의 칭찬은 입에 발린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송재덕 과장은 일반 외과 이외의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확실하게 인정을 해야만 칭찬을 한다는 의미였다.

김지훈에게도 신현수에게도 기분 좋은 하루였다.

정갑수의 일을 까맣게 잊을 정도였다. 숨 가쁘게 이어지던 수술이 끝나고 중간에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무렵 유석재가 급히 수술 방으로 들어왔다.

“김지훈, 신현수, 빨라 나가서 수술 스케줄 챙기자.”

이미 4시 반이 넘었다. 더구나 정갑수는 무얼 하고 2년차인 유석재가 스케줄을 챙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정갑수는요?”

김지훈의 물음에 유석재가 눈을 부라렸다.

“없어졌어. 이따 얘기하고 빨라 나가서 남은 스케줄 챙기자. 이러다 빵구 나겠다.”

수술 스케줄을 챙기는 것은 일반 외과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비상도 이런 비상사태가 없었다.

수술복에 가운만 걸친 채로 김지훈이 달려 나갔다. 옷을 갈아입던 신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단 1분에 불과했다. 그 시간까지 아낀다고 해서 일이 제대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스테이션에 올라가니 김지훈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스케줄을 펼쳐 놓고 미진한 부분을 챙기던 유석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신현수! 이제 오면 어떻게 해? 넌 빨리 이거 두 개 챙겨.”

짜증이 잔뜩 난 유석재가 스케줄 표를 건네며 소리를 질렀다. 엄한 불똥이 튀기자 의국을 나오던 신현수가 인상을 썼다. 유석재의 태도가 다소 과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급하다고 서두르기만 하면 뭐해. 그럴수록 침착해야 제대로 다 챙기지. 유석재 선생님도 보기보다 급한 면이 있네. 그나저나 정갑수는 어디 간 거야?’

신현수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유석재가 먼저 병동에 올라온 김지훈에게 챙겨야 할 일을 대부분 맡긴 것이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오히려 신현수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을 것이다. 유석재는 과연 누구를 더 신뢰할까?

항상 정확하고 침착하게 일을 처리하는 신현수?

문제가 생겼다 싶으면 가장 먼저 달려드는 김지훈?

다행히 시간 내에 스케줄을 모두 챙겼다. 세 명이 뛰어다닌 덕인지 도리어 시간이 남았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 김지훈을 보며 신현수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이렇게 끝낼 수 있었던 일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수술 스케줄을 내기 위해 마취과로 향하던 신현수가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스케줄 표를 뒤졌다.

정규 수술은 검은색으로 작성을 했다. 문제가 되는 부분만 빨간색으로 표시해 마취과가 알아보기 쉽게 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스케줄 표에 빨간색 글씨가 보였다. 그 짧은 사이에 김지훈은 자신보다 몇 배나 많은 일을 한 것이다.

자신이었다면 짜증을 내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문득 스케줄을 건네며 웃던 김지훈의 얼굴이 생각난 신현수가 눈가를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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