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80화 (180/1,329)

제5화 결국 사고를 (1)

그때 문득 유석재가 김지훈과 함께 구미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대로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선생님, 지훈이랑 구미에서 같이 계셨죠?”

“응. 3개월 동안 있었지.”

“거기서 수술을 많이 받았나요?”

“그냥 보통 받는 것만큼 받았지. 왜?”

“다들 지훈이가 수술을 잘한다고 하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해서요.”

자존심 강한 신현수가 이런 말을 하다니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좋은 일이었다. 비록 1년 차이에 불과하지만 유석재 자신에게도 강한 자극을 주는 김지훈과 신현수였다.

유석재가 씨익 웃었다.

“조금 이상하지? 이유가 있더라.”

“이유가 있습니까?”

“지훈이 저 자식은 수술 전에 수술 과정을 반드시 정리해서 복기하는 놈이야. 그것도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한단다. 거기다 손에 익힌다고 수술 기구를 틈만 나면 만져. 하여간 노력 하나는 니들 중 최고야. 그러니까 과장님이 퍼스트를 줄 수밖에 없지.”

신현수가 다소 충격을 먹은 표정으로 말을 잃었다.

인턴 때 서울에서 따르륵 선생님이라고 불렸던 기억이 났다. 환자를 대하는 모습까지 떠오르자 할 말이 없었다. 김지훈은 자신도 상상하기 힘든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경을 고쳐 쓴 신현수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그 시간 환자가 완전히 회복되기를 기다리던 김지훈이 혼자 히죽히죽 웃었다. 송재덕 과장의 수술에서 멋지게 퍼스트를 선 것이다. 눈을 감고 장 폐쇄 환자의 수술을 상기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송재덕 과장의 손을 다시 한 번 따라갔다.

‘죽인다. 이렇게 수술을 하는 방법도 있었구나. 이준영 선생님과는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면서도 확실히 다르네. 나라면 어떻게 접근할까?’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펴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누군가 어깨를 툭 친 것이다.

유석재였다.

“오더 다 냈으면 빨리 올라가세요, 김지훈 선생님. 드레싱 안 할 거야? 너 퍼스트 한 번 섰다고 정신 놓고 다닐래?”

“아닙니다, 선생님.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재빨리 수술 방을 나온 김지훈이 병동으로 올라가 남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항상 같은 일과의 반복이었지만 이런 날은 유난히도 즐거웠다. 환자들까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을 정도였다.

***

한 주 내내 눈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사방에서 튀겼다.

김지훈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신현수만의 장점을 배우려 애를 썼다. 신현수도 조금씩 변해 가긴 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일에서 자신의 방식을 고수했다. 고집이나 확신이라기보다는 티끌만도 못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김지훈의 방식을 떠올렸지만 효과는 의심스러웠고 무엇보다 효율이 떨어졌다. 특히 환자에게 쏟는 시간도 너무 과다하게 많다는 생각이 강했다.

‘최소의 시간으로 최대의 성과를 얻어 내는 것이 중요해. 어차피 환자는 완벽하게 치료되기를 바라지 의사가 웃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잖아. 질환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정확한 수술만이 최고의 써전이 되는 지름길이야.’

가치관의 차이였다. 환자를 대하는 마음과 수술에 임하는 자세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참 배우고 익혀야 할 시기에 어떤 방법이 더 좋을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농땡이를 칠 궁리만 하던 정갑수가 웬일인지 응급실에서 김지훈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동안 사이가 더욱 멀어져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몇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의외였다.

“난데. 환자들이 많아서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환자가 많기는 개뿔이나. 아니지. 정말 많으면 정갑수 능력으로는 또 사고 친다. 에이!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야야 소리가 또 나오게 할 수는 없었다.

응급실에 내려가 보니 정말 환자 몇 명이 밀려 있긴 했다. 정갑수가 처치실에서 환자 한 명을 두고 씨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딱 봐도 정형외과 문제가 주 손상인 환자였다. 그런데 악어가 옆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환자만 보고 있었다. 김지훈이 인사를 하자 고개만 까딱거렸다.

환자 주변을 부산하게 움직이던 정갑수가 김지훈을 보자마자 뒤로 물러났다.

“김지훈, 이 환자 바이탈 좀 잡아 줘.”

“무슨 환잔데?”

“골반하고 대퇴골 골절이 동반된 환자야.”

정갑수가 그 말만 하고 익어와 함께 휙 사라졌다.

환자를 이런 식으로 넘기면 정보 부족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순간 기분이 나빠진 김지훈이 뒤따라가려다 말고 혀를 차며 환자에게 다가갔다.

일반 외과 인턴과 응급실 인턴이 피를 짜고 있었다.

“인턴 선생, 무슨 환자야?”

“예. 금일 10시경 발생한 교통사고로 인한 골반 골절과 대퇴골 골절로 내원한 환잡니다. 바이탈은…….”

김지훈이 손을 들어 됐다는 표시를 했다. 모니터에 나타난 바이탈이 엉망이 되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저혈량성 쇼크로 환자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거 완전히 쇼크 직전이네. 근데 중심 정맥도 안 잡고 뭐 한 거야? 으휴! 정갑수나 악어나 정말.’

골반과 대퇴골이 동시에 부러진 환자는 정형외과 환자지만 일반 외과가 먼저 보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론적으로 골절된 부위에서 도합 5,000cc 이상의 출혈이 가능했다. 따라서 혈류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면 저혈량성 쇼크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다.

첫 번째 처치는 대량의 수액 및 피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간호사, 쇄골 하 정맥 잡읍시다. 수액 준비하고 피 두 팩(pack) 정도 더 시켜요.”

김지훈을 본 간호사들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쇄골 하 정맥에 굵은 도관을 넣고 수액과 피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충분한 양이 투여되고 있었지만 혈압이 좀처럼 회복되질 않았다. 골반 부위를 보니 점점 더 부어올라 터질 것처럼 부풀고 있었다.

출혈이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골반과 대퇴골을 외부에서 단단히 견인하고 지지해 골절 부위를 최대한 안정시켜야 했다. 이미 외부 고정이 돼 있었지만 불안정한 모양이었다.

이런 처치는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일반 외과에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악어를 찾았다. 3년차가 왜 내려왔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가장 빨리 찾을 수 있는 정형외과 의사는 악어뿐이었다. 그런데 악어는 물론 정갑수도 보이질 않았다.

간호사가 조용히 당직실을 가리켰다.

‘제일 손이 많이 가는 환자는 내게 맡기고 우리 과 환자 다 해결했다고 들어가 쉬어? 어후! 개새끼들. 급한 환자는 해결한 다음에 쉬어야 할 거 아냐.’

당직실로 들어가자 악어와 정갑수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김지훈이 치미는 화를 꾹꾹 눌렀다.

“선생님, 환자 골절 부위에서 출혈이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빨리 확인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잠깐만. 갑수야 그래서 말이야. 그때…….”

급하다는데도 하던 말을 다 마치고야 일어났다.

정갑수는 아예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환자 안 봐? 나 수술 당직이야.”

“이 환자는 그냥 네가 봐. 난 밤 샐지도 몰라.”

“응급실 당직 서면서 밤 안 새는 사람 있어?”

“아! 애 새끼. 환자 한 명 보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내가 잠깐 쉰다는데 그것도 못 도와주냐?”

허구한 날 쉬는 정갑수가 할 말이 아니었다.

가슴에서 주먹만 한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른 김지훈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간호사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선생님, 환자 혈압이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해요. 급해요.”

크게 놀란 김지훈이 정신없이 처치실로 달려갔다.

그나마 유지되던 혈압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골절 부위에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출혈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인턴 선생, 피 빨리 짜. 간호사, 혹시 모르니까 심폐소생술 할 준비 미리 해 놔요. 그리고 정갑수 선생도 나오라고 해요.”

긴박한 상황이었다. 많은 손이 필요했다. 불행히도 김지훈의 말대로 어레스트(심정지)가 발생했다. 외부 고정 장치를 손보던 악어가 눈가를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심폐 소생술이 시작됐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환자가 나빠졌다는 사실에 김지훈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즉시 인투베이션을 하고 필사적으로 흉부 압박을 가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배깅.”

쉬이익! 삑! 쉬이익! 삑!

앰부(공기 주머니)를 짤 때마다 밀려들어 가던 공기가 새며 삑삑 소리를 냈다.

띠띠띠띠띠! 띠이이이!

흉부 압박을 가할 때마다 심장박동을 알리는 모니터가 요란하게 울렸다 조용해지기를 반복했다. 심장을 살리기 위한 약제들이 쏟아져 들어갔다.

피만 투여하는 것으로는 부족해 인턴들에게 수액까지 짜게 했다. 다들 정신없이 움직였다. 환자의 목숨만큼 중요한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간신히 심장을 살렸다.

서서히 혈압이 올라가며 간헐적이지만 자발 호흡까지 돌아왔다. 일시적인 혼수상태에 빠졌던 환자가 몸을 비틀었다. 땀에 흠뻑 젖은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언제 다시 심장이 멈출지 몰랐다.

응급실에서 대응하기에는 힘든 환자였다.

즉시 중환자실로 옮겨 집중 치료를 받아야 했다.

오늘 당직은 백무용 교수였다.

정형외과 환자였지만 바이탈이 흔들리는 이상 일반 외과가 먼저 환자를 안정시켜야 했다. 입원장을 작성하고 환자가 중환자실로 올라가기를 기다리던 김지훈이 이제야 정갑수와 악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어 당직실 문을 열었다.

정갑수가 악어와 노닥거리고 있었다.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정갑수! 뭐 하는 거야? 어레스트 난 환자도 안 봐. 이런 씨발! 그러고도 네가 일반 외과 의사야?”

“어? 이 새끼, 지금 나한테 욕한 거야?”

“그래. 욕했다. 어쩔 건데?”

얼굴이 시뻘게진 정갑수가 벌떡 일어났다.

악어도 완전히 맛이 간 표정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 너 죽고 싶어? 이 새끼야. 위아래도 없어?”

김지훈에겐 악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환자를 두고 부딪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도 물러날 상황이 아니었다. 더구나 원칙적으로는 정형외과 환자였다.

1년차도 아닌 3년차가 이런 환자를 두고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사실에 치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환자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최소한 환자가 중환자실에 올라가 안정될 때까지 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니네 과 환자잖아, 이 새끼야.”

“환자 상태가 이렇게 된 이유가 골절이잖아요? 그럼 정형외과에서도 당연히 봐야죠. 우리 과에 입원한다고 쳐다보지도 않는 게 말이 됩니까?”

“어쭈! 이 새끼 봐라. 1년차 되더니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네. 난 할 만큼 다 했어, 이 새끼야. 이런 씨팔 놈이 있나.”

눈이 돌아간 악어가 주먹을 올리는 순간 정갑수까지 난리를 쳤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선배를 뭘로 보는 거야? 죽으려고 환장을 했네. 이 씨팔 놈. 너 오늘 단단히 교육 좀 받자.”

당장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 문제가 생길지 모르는 환자를 앞에 두고 이럴 수는 없었다.

김지훈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지금 이럴 시간 없습니다. 일단 환자부터 중환자실로 옮기고 얘기하죠. 어레스트 또 날 수 있습니다.”

“미친 새끼. 네가 지금 우릴 가르치는 거야?”

악어가 성질을 참지 못했다. 휙 하고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 순간 눈에서 불이 난 김지훈이 주먹을 피하며 악어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퍽!

악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이미 경험이 있는 정갑수가 움찔거리면서도 주먹은 쥐고 있었다. 이를 악문 김지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선생님, 둘이 따로 얘기할 시간은 많습니다. 지금은 일단 환자부터 옮기죠. 정갑수, 어레스트 난 환자야.”

매서운 눈으로 악어를 노려보던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고는 당직실을 나갔다. 등이 빤히 보였지만 악어도 정갑수도 움직이지 못했다.

흉흉한 분위기에 간호사들이 눈치만 보았다.

“중환자실에서 연락 안 왔어요?”

“지금 올리라고 막 연락이 왔어요.”

“그럼 갑시다.”

환자와 함께 응급실을 나가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정갑수도 악어도 따라오지 않았다.

‘석재 형 말대로 확실하게 죽여 놓을까?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를 두고 노닥거리는 놈들은 의사도 아니잖아.’

너무 화가 나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생각까지 하고 말았다.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보는 동안에도 자꾸만 손이 떨렸다.

백무용 환자 파트 2~3년차가 내려오기 직전 정갑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말 눈치 하나는 끝내주는 놈이었다. 거짓말만 아니었다면 야야 소리는 결코 나지 않았을 것이다.

중환자실을 나서는 김지훈이 인상만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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