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보고 싶었던 사람들 Ⅱ (2)
마침 둘 다 청바지를 입고 있어서 완벽한 커플로 변했다. 왠지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붕 뜬 김지훈의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연애하는 느낌이 이런 걸까?
여자의 기분을 완전히 띄우려면 귀금속으로 만든 장신구가 최고였다. 김지훈도 그쯤은 알고도 남았지만 문제는 주머니였다. 하지만 고경아만 좋다면 명동은 가난한 연인들의 천국일 수도 있었다.
‘카드라도 한 장 만들어 둘걸.’
김지훈이 아쉬운 눈으로 화려한 가게 안을 보다 노점상이 파는 목걸이와 귀걸이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고경아가 노점상을 보며 김지훈의 팔을 톡톡 치며 말했다.
“지훈 씨, 나 귀걸이 하나 사 줘요. 어머! 정말 예쁘다.”
고경아가 노점상과 옥신각신하며 만 원도 안 되는 귀걸이를 무려 2천 원이나 깎았다.
김지훈이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웃었다.
“경아 씨, 나중에 기회 되면 좋은 걸로 하나 사 줄게요.”
“언제요?”
“흠! 겨울에 서울로 올라오니까 그때쯤?”
“정말 약속하는 거죠. 꼭 사 줘야 돼요.”
“그럼요. 남아일언 중천금.”
정말 데이트를 하는 것 같았다. 단돈 몇만 원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얻었다. 함께 산 티셔츠를 입고 반짝이는 귀걸이를 한 고경아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길가에 널린 거리의 음식들을 섭렵했다. 꼬치구이 하나씩을 들고 명동 성당에도 들렀다. 고경아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꼭 감고는 기도를 했다. 천주교를 믿진 않았지만 왠지 엄숙한 분위기에 손에 든 꼬치구이가 민망스러웠다.
“경아 씨, 천주교 믿었어요?”
“엄마 아빠 할머니 모두 신자세요. 전 그냥 생각날 때 가끔 들르는 정도고요. 지훈 씨는 종교 있으세요?”
“전 경아 씨만 믿어요.”
지난 경험으로 볼 때 종교 문제는 정치만큼이나 참 어려웠다. 김지훈이 진담인 듯 농담처럼 얼렁뚱땅 넘기자 고경아가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편하고 좋다.’
성당에서 내려오며 김지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가는 연인들마다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있었다. 이런 날 망설이면 남자도 아니었다. 김지훈이 고경아를 보며 툭툭 자신의 팔을 쳤다. 양 볼이 모두 발그스름해진 고경아가 팔짱을 끼었다. 부드럽게 전해지는 감촉과 따스한 온기에 김지훈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즐거운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기 마련이었다. 여느 연인들처럼 웃고 떠들며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오후 5시였다.
이제는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고경아도 아쉬운지 터미널로 향하는 내내 입을 쉬지 않았다. 빌딩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을 때 김지훈이 천안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고경아가 손을 흔들었다.
천안으로 향하는 내내 행복했다.
사소하고 조그만 일들이 모여 큰 행복을 만들고 있었다.
이런 게 사는 맛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되면 경아 씨랑 나랑 진짜 연인 사이가 된 건가?’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이런 감정 또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청평에서 보았던 숨이 막히도록 예뻤던 미소와 의료 봉사를 하던 아름다운 고경아의 미소가 동시에 떠올랐다.
마음속을 어지럽히고도 남을 금경태 과장에 관한 말들이 스르르 사라졌다. 내일이면 다시 생각이 날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다.
어둠이 짚게 내렸을 무렵 병원에 도착했다.
깜깜한 밤하늘에 별 두 개가 보였다.
반짝반짝 빛을 내며 잘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정갑수 때문에 일복이 터졌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툭하면 펑크를 냈다. 묘하게 김지훈의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결국 신현수도 피해 가지는 못했다.
1년차 두 명이 헉헉거리며 일에 지치는 모습을 스태프들이 모를 리 없었다. 항상 마음씨 좋은 얼굴이었지만 정갑수를 보는 송재덕 과장의 눈이 더욱 매서워졌다. 야야 소리는 더 이상 터지지 않았지만 완전히 눈 밖에 난 것이다.
송재덕 과장이 당직인 날 응급 수술이 떴다.
“오늘 수술 누가 들어오니? 누구야?”
당직 3년차가 눈치를 보며 정갑수라고 하자 송재덕 과장이 혀를 차며 대놓고 김지훈을 찾았다.
“지훈이 어디 있니? 지훈이.”
그날 오프였던 김지훈이 마음 푹 놓고 잠을 자다 날벼락을 맞았다.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응급실로 달려가자 송재덕 과장이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음! 지훈이 왔구나. 수술 들어가자. 수술하자.”
응급실 당직이었던 신현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수술이 시작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응급 수술이 또 하나 떴다. 송재덕 과장이 또 김지훈을 찾았다. 아닌 밤중에 연달아 수술에 들어간 김지훈은 꼬박 밤을 새웠다.
‘으아! 오픈데.’
김지훈이 머리가 어찔어찔한지 고개를 흔들며 눈을 비볐다.
1년차의 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곧바로 정규 수술에 들어갔다. 응급실 환자 때문에 역시 날밤을 새다시피 한 신현수와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댔다. 피곤이 누적됐지만 도리어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신현수 때문이었다.
세컨을 서며 눈에 불을 켜고 수술을 보고 있었다. 수술 후 오더를 낼 때도 신중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다소나마 여유 있던 걸음걸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단 1분마저도 아깝다는 것처럼 바삐 움직였다. 게다가 구영선 교수가 마이너 수술을 할 때마다 거의 다 퍼스트를 세웠다.
정신이 번쩍 난 김지훈도 최선을 다했다.
번개처럼 움직이는 송재덕 과장의 손을 눈으로라도 따라잡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수술 후 오더 중 빠진 것이 없는지 몇 번씩 확인했다. 환자 상태를 확실하게 파악하는 일도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신현수, 네 덕에 없던 힘까지 생긴다.’
수술이 끝나고 병동에서도 둘의 묘한 신경전이 계속됐다.
우연히 같은 병실에서 드레싱을 하다 마주쳤다.
“할아버지, 움직여야 한다니까요. 하루 종일 누워만 있으면 절대 퇴원 못합니다.”
“어이구! 수술한 데가 아파 죽겠는데 어떻게 걸어. 진통제라도 좀 주든지. 의사 선생이 왜 이렇게 야박혀.”
“아프죠. 생살을 쨌는데 안 아프겠어요? 하지만 여기 다 수술한 환자분들밖에 없잖아요. 그중에 딱 한 사람만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거 잘 아시죠? 그리고 다 할아버지 위해서 하는 말인데 야박하긴 뭐가 야박해요?”
김지훈이 환자와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수술한 지 여러 날이 됐잖여. 그리고 여기서 내가 나이도 제일 많어.”
“목소리는 제일 크시네요. 보호자분, 저 좀 도와주세요. 할아버지, 제 손 잡고 일어나세요.”
“아프다니께.”
“아픈 거 안다니까요.”
김지훈과 환자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마치 싸우는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그런데 보호자는 물론 다른 환자들까지 웃고 있었다.
“노인네, 고집 부리지 말고 어여 일어나요. 그러다 선생님이 모른 척하면 어떡하려고 그려.”
수술 부위를 만지며 한참을 투덜거리던 환자가 결국에는 일어났다. 김지훈이 드레싱을 하다 말고 병실 밖까지 환자를 부축하고 걸었다.
신현수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드레싱을 항상 나보다 오래 한 이유가 이거였어.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바보 같은 놈.’
힐끗 김지훈을 본 신현수가 드레싱을 하고는 환자와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평소 필요한 말만 하던 신현수가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에 드레싱을 돕던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복도를 따라 걷는 환자를 보던 김지훈이 병실로 들어왔다.
역시 내심 놀라고 말았다. 전에 없던 모습이었다.
‘저 자식이 환자까지 정성스럽게 보네. 좋아. 그럼 난 네게서 뭘 배울까?’
동기라고 배울 것이 없을까?
하다못해 정갑수에게도 배울 것이 있었다. 물론 난 절대 저러면 안 돼, 뭐 이런 것이었지만 그 역시 일종의 배움이었다.
더욱 환자에게 신경을 쓰며 일과를 마친 김지훈이 눈에 힘을 주었다. 슬며시 신현수가 하는 차팅을 훔쳐보며 자신에게 미진한 부분이 있는지 살폈다. 신현수도 전과는 달리 자꾸 김지훈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딱 마주쳤다.
“흠흠! 현수야, 덥다. 그지?”
“덥냐? 난 안 덥다.”
어색한 표정으로 각자 차팅에 몰두했다.
다음 날 송재덕 과장이 신현수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동안 아뻬는 물론 탈장 수술까지 받았고 구영선 교수의 수술에서는 준메이저라고 할 수 있는 수술에서도 퍼스트를 여러 번 섰다.
위 연차들의 고까운 시선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김지훈이 수술하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최대한 경험을 많이 하는 것 이외에는 김지훈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이제는 내심 송재덕 과장이 응급 수술을 할 때 퍼스트를 서고 싶다는 욕심까지 내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빠른 손을 따라갈 수만 있다면 그만큼 실력이 늘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양방으로 수술을 벌이던 송재덕 과장이 마지막 정규 수술을 남기고 폭탄과도 같은 말을 했다.
“이번 수술은 지훈이만 들어와. 지훈아, 퍼스트 서라. 퍼스트. 허허!”
10년 전 아뻬로 수술받은 병력이 있는 환자였다. 수술 후 합병증인 장 폐쇄가 발생해 며칠간의 보존 치료를 했다. 하지만 결국 폐쇄가 풀리지 않아 수술을 하게 된 경우였다.
메이저 수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이너 수술도 아니었다. 더구나 김지훈이 이런 수술에서 퍼스트를 서 봤을 리가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송재덕 과장이 대뜸 김지훈을 퍼스트로 세운 것이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더구나 최철한이나 유석재가 도리어 김지훈의 어깨를 치며 잘하라는 말까지 연발하고 있었다. 둘의 얼굴 어디에도 불만스러운 기색이 없었다.
신현수가 드레싱을 해야 할 시간을 계산하며 최대한 수술실에서 버텼다. 김지훈이 과연 송재덕 과장의 손을 따라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지막 수술이 시작됐다.
번개처럼 이어지는 손을 따라 순식간에 배가 열렸다.
일주일 정도 지속된 장 폐쇄 때문에 약간의 복수까지 차 있었다. 그 탓에 확장된 장 역시 매우 약해진 상태였다. 송재덕 과장이 몇 번 손을 놀리자 원인이 된 부분이 드러났다.
유착과 함께 밴드 두 개가 장을 조이고 있었다.
“여기다. 여기. 떼고 자르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송재덕 과장의 손이 움직였다.
수술에 완전히 몰입한 김지훈이 정확하게 어시스트를 섰다.
쓰스슥! 툭! 툭!
유착된 부분을 분리하고 밴드를 제거했다.
마치 숙련된 전공의를 앞에 둔 것처럼 송재덕 과장은 여유를 주지 않았다. 물론 김지훈이 1년차라는 사실을 감안해 약간의 여유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의 체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장 폐쇄 수술은 대부분 자르고 이어 주는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단순 박리와 밴드 제거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퍼스트를 서기 쉽다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송재덕 과장이 완전히 자유로워진 장을 확인한 후 드레인을 두 개 넣고 주요 과정을 끝냈다. 배만 닫으면 끝이었다.
김지훈이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때 송재덕 과장이 김지훈에게 손짓을 하며 퍼스트 자리로 넘어왔다.
“지훈아, 마무리하자. 마무리. 해 봐, 해 봐.”
깜짝 놀란 김지훈이 서둘러 집도의 자리로 갔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그래그래. 천천히 해. 천천히.”
기본적으로 수처(봉합) 하면 김지훈이었다. 피부 봉합과 복벽을 봉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처치였지만 이미 경험도 상당히 많았다. 손이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슥슥슥! 슥슥슥!
빠르게 복막을 닫고 어느새 피부 봉합을 하고 있었다.
송재덕 과장이 가위를 들고 웃기만 했다.
“천천히 해. 천천히. 그래그래. 잘한다. 지훈이 잘한다.”
마지막 봉합을 끝내자 송재덕 과장이 봉합 사를 톡 끊고는 허허 웃으며 수술실을 나갔다. 마침 앞을 지나가던 마취과 교수를 보며 엉뚱한 말까지 했다.
“지훈이 알지? 잘하네. 수술 잘하네. 아주 잘해.”
“어이구! 과장님. 설마 1년차에게 장 폐쇄 수술을 주신 건 아니죠?”
“지금 줘도 되겠어. 다음에 주지 뭐. 다음에. 허허!”
그저 즐거운지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살짝 몸을 숨겼던 신현수가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서 보지 못한 송재덕 과장 수술의 퍼스트 자리였다.
솔직히 마음에 들 정도로 퍼스트를 설 자신도 없었다. 그런데 김지훈은 완벽하게 퍼스트 역할을 수행했고 송재덕 과장은 근래에 가장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천안 병원에 온 이후 한 차례 수술을 받긴 했지만 송재덕 과장이 집도할 때는 세컨만 섰던 김지훈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환자를 옮기는 김지훈을 보며 신현수가 서둘러 수술 방을 나왔다.
때마침 수술 방으로 들어오던 유석재와 딱 마주쳤다.
“현수야, 니네 파트 수술이 남아 있었어? 왜 이제 나가?”
“아닙니다, 선생님. 잠깐 일이 있어서요.”
“그랬구나. 참! 혹시 과장님 수술 끝났니?”
“그런 것 같은데요.”
“현수야, 지훈이가 퍼스트 선 거 알았어? 자식이, 재수도 좋아. 아마 잘 끝났을 거야. 그놈도 너처럼 손재주가 보통이 아니거든.”
신현수의 표정이 조금은 이상했다. 자존심이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