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보고 싶었던 사람들 Ⅱ (1)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음속의 멘토인 이혁민 교수만은 과 내 권력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다.
“일석아, 그러다 이혁민 선생님한테 문제 생기는 거 아니냐? 그럼 안 되는데.”
고개를 끄덕이던 손일석이 갑자기 입술을 깨물며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았다. 교수들 말이 나오자 문득 떠오른 말이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꽤 주저하는 눈치였다.
잠시 망설인 손일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훈아, 너 혹시 금경태 과장님하고 뭔 일 있었어?”
“무슨 소리야? 내가 과장님하고 무슨 일이 있겠어? 내 얼굴이나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그치. 그런데 왜 그런 말이 들렸을까?”
김지훈과 이경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교수들 간의 알력 싸움을 말하다 말고 갑자기 무슨 말일까?
“나도 얼핏 들은 말이라 확실하진 않아. 그러니까 잘못 들었을 수도 있어.”
평소 정보통을 자처하던 손일석답지 않았다.
“야! 일석아,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너 음성 간 거 말이야. 이혁민 선생님이 동의한 게 아니라 사실은 반대를 했다고 하더라구. 근데 금 과장님이 그냥 밀어붙였다는 거야. 이유야 우리가 들은 대로지만 사실 안 보내도 됐다는 말이 있어.”
손일석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김지훈의 안색이 조금씩 변해 갔다. 음성에서 이준영 과장을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하지만 만일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결과는 완전히 반대였을 것이다. 더구나 안 가도 되는 병원에 억지로 보냈다면 분명 좋은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문득 입국식 때 금경태 과장이 한 말이 생각났다.
‘나보고 음성에서의 경험이 개업에 도움이 될 거라고 했었잖아? 그럼 이혁민 선생님의 말은 또 뭐지? 미안하다는 말이 설마?’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경석이 혀를 찼다.
“일석아, 넌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그래, 인마. 그럴 리가 있어? 다 이유가 있으니까 보낸 거지. 그리고 지훈이가 제일 엑설런트하니까 보낸 건데 무슨 소리야. 새끼는.”
손일석이 우물쭈물하며 천장만 보았다. 결코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김지훈에게는 단순히 지나갈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게요. 내가 술이 많이 취한 모양이에요. 지훈아, 신경 쓰지 마. 어디서 들었는지도 모르고 술이 꼭지까지 돌았을 때라 확실하지도 않아. 으이구! 이놈의 입방정은 왜 떨어서.”
손일석이 자신의 입을 마구 때리는 시늉을 했다.
김지훈이 생각에 잠긴 채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알았어.”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아 도리어 더 신경이 쓰이는지 손일석이 잔을 권했다. 오이 소주 한 잔을 비운 김지훈이 화장실을 간다며 술집을 나왔다.
‘만일 내가 아니라 일석이를 보냈다면 난 어떻게 생각을 했을까? 확실히 금 과장님이 일석이에게 뭔가 안 좋은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렇다면 이민혁 교수의 말은 어떤 의미였을까?
‘미안하다, 슬프다, 나만 믿어라 그렇게 말씀하신 분이 금 과장님이랑 알력 싸움을 한다면 뭔가 있다는 말일 수도 있어. 이준영 선생님과 친분이 깊은 것 같고 내가 음성에서 어떻게 배웠는지도 아시잖아. 그럼 도리어 미안하다고 할 이유가 없는데 도대체 뭐지?’
이리저리 앞뒤를 맞춰 보면 손일석의 말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당시에는 인턴이었고 지금도 1년차에 불과한 자신이 금 과장에게 찍힐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못한 일이 없었다. 얼굴이라도 자주 보았으면 모르지만 그간 나눈 말도 몇 마디 되지 않았다. 답답한지 김지훈이 눈가를 문지르며 한숨만 내쉬었다.
잠시 골목에 앉아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손일석이 잘못 알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에 하나 정말 문제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잘해 왔고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손일석과 이경석이 묵묵히 앉아 잔을 비우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우거지상을 할 수는 없잖아. 웃자. 씨펄! 금 과장님이 정말 날 미워하면 이혁민 선생님하고 친해지지 뭐.’
김지훈이 크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왜들 이래? 일석이 네가 잘못 안 거야. 내가 금 과장님 라이벌도 아니고 말이 되는 얘기냐? 마셔. 오늘 마시고 죽자. 경석이 형, 내일 오후에 내려가도 되죠?”
“그럼. 마시자. 야, 얼마 만에 만난 자린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일 갖고 우리가 이럴 수는 없잖아. 자식들아! 난 오늘 마누라한테 온갖 잔소리 다 듣고 나왔어. 알아서 해.”
손일석이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따거. 죄송합니다. 친구, 미안하네. 강호의 도리가 이것이 아닌 것을. 내 하오문 잡것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심려를 끼쳤네. 이해하게.”
“어이쿠! 그놈의 강호는 없어지지도 않냐? 하오문은 또 뭐야?”
“친구, 도도하게 흐르는 강호의 맥이 어찌 몇 마디 말과 실수로 사라질 수 있겠는가. 대형, 장부의 기상을 품고 한 잔 하시죠. 위하여.”
다 함께 잔을 높이 들었다. 그때 마침 이 허름한 선술집을 온 이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한미군들이 우르르 몰려온 것이다. 그중에 육중한 몸의 여군들이 있었다.
“형님, 드디어 기다리던 여군들이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음하하하!”
호기롭게 웃음을 터트린 손일석이 쓱 밖으로 나갔다.
덩치가 산만 한 미군들이 달랑 맥주 한두 병을 들고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골목길이 순식간에 꼬부랑말들로 가득 차며 시장 통으로 변했다.
“지훈아, 쟤들 원래 저렇게 시끄럽냐?”
“학교 다닐 때 몇 번 봤는데 이 골목에 오는 애들은 밤새 맥주 한두 병 먹으면서 말만 해요. 덩치가 저런데 간에 기별이나 가는지 모르겠어요.”
불과 말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여군 세 명이 웃으며 들어왔다. 이건 글래머가 아니라 탱크였다. 다들 가장 체격이 좋은 김지훈보다 어깨가 더 넓었다. 하지만 흑심을 품고 온 것이 아니었다. 이태원에 오면 외국인과 한마디쯤은 나누는 것이 또한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말도 안 되는 영어를 지껄이며 탱크들과 첫 말문을 열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경석이 유창한 영어로 탱크들을 홀리기 시작한 것이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과묵해졌다.
발음이라도 콩글리시라면 좋겠건만 이경석이 심하게 혀까지 굴리고 있었다. 가끔 이경석과 여군들이 크게 웃을 때마다 마치 전부 알아들은 것처럼 함께 웃는 것이 다였다.
“일석아, 우리 잘못 온 거 같지?”
“응. 경석이 형 내공이 장난이 아니네. 어째 이 동네에서 많이 놀아 본 것 같지 않냐?”
“베테랑이야. 네 말대로 하면 강호의 숨은 고수네.”
“아! 정녕 나의 시대는 간 건가? 이런 노인네한테까지 밀리다니 죽고 싶다.”
손일석이 탄식을 터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경석의 눈이 점점 초롱초롱해졌다. 결국 새벽 2시까지 한자리에서 술을 마셨다.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든 이경석의 화려한 말발 때문일까?
예전 기억으로는 분명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던 여군들까지 엄청 먹어 댔다. 술값이 무려 6만 원이나 나왔다. 소주 한 병이 3,000원인 술집에서는 정말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아쉬워하는 여군들을 뒤로했다. 체격들이 좋아서 그런지 술도 셌다. 맥주는 눈속임일 뿐이었다. 비틀비틀 병원까지 함께 걸어왔다. 무슨 정신인지 이모네 골뱅이집까지 갔다.
“이모, 골뱅이!”
여기까지가 생각의 끝이었다. 완전히 술에 취해 3차를 연발하는 이경석을 간신히 말려 택시에 태우고는 숙소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놈의 술이 웬수라면 웬수였다.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오른 덕에 잠은 들었지만 김지훈은 아침까지 악몽에 시달렸다. 밤새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에 금경태 과장의 얼굴까지 번갈아 가며 나타난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김지훈이 눈부신 햇살에 눈을 떴다.
머리가 띵하고 온몸이 노곤했지만 벌써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손일석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잘된 일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잠시 휴게실에 앉아 곰곰이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일어났다. 지금이 바로 정훈철이 말한 그 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는 바로 그 순간!
‘청평에서 보았던 미소만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왜 또 고민을 하고 있지?’
옷매무새를 살핀 김지훈이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가을날의 시원한 바람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어제 손일석과 나눈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지만 마냥 얼굴을 구길 수는 없었다. 김지훈은 활기차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야 경아 씨랑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하는데 웃어야지. 다른 건 모두 잊자. 병원 일은 병원 안에서만 고민하자.’
머리를 흔들며 입을 꽉 다물고 걷던 김지훈이 활짝 웃었다.
고경아가 눈부신 햇살 아래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은 김지훈이 숨을 몰아쉬었다. 고경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어디 아프세요?”
김지훈이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웃는 모습이 이렇게 예쁜 사람은 세상에 또 없을 것 같은 생각만 들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에 얼굴을 붉히던 고경아가 새침을 떨며 물었다.
“확실하게 결정하신 거죠?”
김지훈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와 결정할 게 뭐가 있어요. 답이 나온 지가 언젠데.”
“정말이요?”
“그럼 정말이죠.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정말?
고경아가 가자미눈을 하자 김지훈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 때문인지 고경아의 눈가가 발개지는 것 같았다. 명동에 도착해서야 말없이 웃기만 하던 고경아의 말문이 열렸다.
“경아 씨, 점심은 역시 명동 칼국수를 먹어야겠죠?”
“어머! 나 그 집 칼국수 좋아하는데. 지훈 씨도 칼국수 좋아하세요?”
“밀가루는 다 좋아해요. 얼큰한 칼국수 한 그릇 좋죠.”
고경아가 갑자기 코를 킁킁거리며 살짝 눈을 흘겼다.
“아우! 술 냄새. 어제 몇 시까지 마셨는데 아직도 술 냄새가 나요?”
“그래요? 일석이하고 경석이 형을 너무 오랜간만에 봐서 일찍 끝낼 수가 없었어요. 미안해요. 술 냄새 싫으면 내가 숨을 안 쉴게요.”
정말 숨을 안 쉬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문 김지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고경아가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지훈 씨, 빨리 숨 쉬세요. 그러다 쓰러지겠어요.”
“후아! 그럼 숨 쉽니다.”
고경아가 크게 웃었다.
함께 걷다 보니 어느새 명동 칼국숫집 앞에 도착했다.
점심때인 데다 워낙 유명한 식당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해장이 급한 김지훈은 내심 후회를 하며 고경아를 보았다. 먹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어쩔 수 없이 줄이 줄어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한 시간이나 기다려 테이블에 앉았다.
그간 먹어 본다 하면서도 막상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어 내심 기대가 컸다. 다행히 칼국수는 빨리 나왔다. 그런데 국물을 뜨는 김지훈의 표정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멸치 국물이 아니었다.
‘이건 사골 국물이잖아. 어휴! 해장이 필요한데 왜 느끼하기까지 하냐. 내 입맛이 이상한가? 맛있다고 소문난 집도 잘 가려서 가야 한다더니 오늘 완전히 지뢰 밟았네.’
맛있게 먹는 고경아를 앞에 두고 젓가락만 끼적거릴 수는 없었다. 맵게 다진 양념을 잔뜩 넣었지만 사골의 맛이 여전했다. 김지훈은 꾹 참고 웃으면서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역시 칼국수는 멸치 국물이 진리였다.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며 고경아와 명동을 거닐었다.
“지훈 씨, 매운 떡볶이 먹을래요? 저 집이 맛있는데.”
평소 떡볶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반가웠다.
매콤한 국물을 잔뜩 발라서 먹으니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며 슬슬 속이 좀 풀렸다. 간신히 안정시킨 속을 블랙커피 한 잔으로 조금 더 달래고 골목을 따라 걸었다.
재밌는 말을 나눈 것도 아니었지만 즐겁기만 했다. 팔짱을 끼고 함께 거니는 연인들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몇 골목을 지나자 옷가게들이 눈에 뜨였다. 고경아가 김지훈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훈 씨, 우리 옷 좀 봐요.”
“그래요. 경아 씨 마음에 드는 옷 있으면 하나 사 줄게요.”
“정말이죠. 제일 비싼 거 사야지.”
고경아가 환하게 웃으며 옷을 보기 시작했다.
가을날에 맞춰 나온 긴팔 티셔츠들을 보던 고경아가 노란색 티와 파란색 티셔츠를 골랐다. 그러고는 대뜸 김지훈의 가슴에 대고 이리저리 살폈다.
“노란색보다는 파란색이 더 어울리네요. 우리 이거 한 벌씩 사요. 아니, 지금 입어요.”
김지훈이 다소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이 탈의실에서 파란 티셔츠를 갈아입고 나오자 고경아도 같은 색 같은 무늬의 파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커플 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