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77화 (177/1,329)

제3화 보고 싶었던 사람들 Ⅰ (2)

‘10원짜리 동전은 뭐지?’

영문을 모르는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입술을 꼭 다문 채 한참 동안 고민을 하던 고경아가 야무진 눈빛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지훈 씨, 형부한테 대충 얘기 들었어요.”

“훈철이 형이요? 무슨 소리를 들었다는 거예요?”

김지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훈 씨가 더 잘 알지 않아요? 확실하게 결정을 하세요. 저 솔직히 지훈 씨를 좋아해요. 지훈 씨도 저랑 같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고민이 된다면 그만 만나는 게 맞아요. 마음이 아픈 사람은 한 명으로 족하잖아요.”

“경아 씨, 그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할지 알아요.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내일 약속 장소에서 기다릴게요. 확실하게 마음을 결정하고 나오세요. 만일 나오지 않으면 여기까지가 우리의 인연이라고 생각할게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대답을 할 사이도 없이 고경아가 기다리고 있던 고경희의 손을 잡고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무언가를 얘기하며 둘이 토닥거렸다. 김지훈은 고경아가 안 보일 때까지 멍하니 지켜만 보았다.

‘훈철이 형한테 들었다고?’

순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생각해 보면 정훈철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자신이 정훈철을 형이라 부르는 것처럼 고경아는 형부라고 불렀다.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입을 열 사람도 아니었다.

의료 봉사에 함께 왔을 때 김지훈과 고경아의 마음을 봤을 것이다. 아마도 넌지시 상황을 전해 주었을 테고 여인의 직감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놓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정훈철의 아내인 한수임이 모르고 있었을까?

김지훈을 빼고는 잘못한 사람이 없었다.

병원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전화박스에 들어서다 말고 하늘을 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정훈철에게 전화를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결정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우두커니 서서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고경아와의 관계는 생각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간 고경아와 윤서연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었는지는 지금 느껴지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 이젠 결정하자. 아니, 결정할 일이 아니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고경아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는 다른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항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환자들도 그때만큼은 잊었던 것 같았다. 24시간 내내 어깨를 짓누르던 중압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편안하기만 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생각이 나는 사람.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 함께하고픈 사람.

‘이젠 내 마음에 충실하자. 경아 씨와 헤어진다면 평생을 후회할 거야. 서연이와는 친구이자 동기로 남는 게 맞아.’

다시 걸음을 재촉하던 김지훈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무척이나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고경아의 말이 생각난 것이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나? 나도 항상 보고 싶었네요.’

가슴속 어딘가에 남아 있던 답답함이 싹 사라졌다. 대신 윤서연에 대한 미안함이 은근슬쩍 그 자리를 채웠다. 자의는 아닐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양다리를 걸친 김지훈이 치러야 할 대가였다.

그래도 홀가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서울 병원 정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손일석과 이경석이 김지훈을 보자 번쩍 손을 들었다.

“지훈아, 여기야.”

“일석아! 경석이 형!”

입국식 때 보고 처음이었다. 벌써 6개월도 더 지났다. 오랜 친구와 보고 싶었던 선배를 보자 조금은 복잡했던 마음이 사라지며 기분이 확 살았다. 손일석이 달려와 김지훈을 꽉 껴안았다.

“징그러, 인마.”

“자식이. 형이 안아 주는데 좋으면 좋다고 해. 잘 지냈지?”

“잘 지내긴 어떻게 잘 지내? 전화나 하고 그런 소리를 해라, 자식아. 경석이 형, 잘 지내셨죠?”

“그럼. 나야 뭐 항상 신나게 산다.”

김지훈이 싱글벙글 웃으며 고(Go)를 외쳤다.

“일석아, 간만에 이태원 어때? 형, 좋죠?”

“좋지. 구미에서 왔는데 이태원 정도는 가 줘야지. 마누라한테 쫑코 먹고 나왔으니까 확실하게 먹자. 근데 어디 잘 가는 데라도 있어?”

김지훈과 손일석이 눈을 마주 치며 씨익 웃었다.

“따라만 오세요. 쭉쭉빵빵 미녀들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경석의 눈이 번쩍였다.

“가자. 빨리 가자. 아무래도 내가 아는 집보다는 젊은 니들이 아는 데가 훨씬 물이 좋겠지. 믿는다.”

가파른 언덕길을 헉헉거리며 올라가 이태원 소방서 쪽으로 향했다. 멀리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길가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경석이 연신 감탄을 터트리며 기대에 찬 눈으로 씩씩하게 앞장섰다. 불과 50미터만 더 가면 이태원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었다. 그때 김지훈이 슬그머니 이경석의 팔을 잡으며 뒷골목을 가리켰다.

“형, 우리 아지트는 저기가 아니라 이쪽입니다.”

“어? 그쪽에 뭐가 있는데?”

“일단 따라오시죠.”

소방서가 위치한 뒷골목으로 들어간 김지훈이 작고 허름한 선술집 앞에 섰다. 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확실히 후미진 곳이었다. 이경석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눈가를 좁혔다.

“형님, 들어가시죠. 여깁니다.”

술집에 들어가자마자 이경석의 입에서 탄식이 터졌다.

레몬 소주. 체리 소주. 오이 소주. 맥주.

골뱅이. 번데기. 알탕. 김치찌개 등등.

“지금 이거 먹자고 이태원까지 온 거야?”

“형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분위기 확 달아오릅니다. 일석아, 안 그래?”

손일석이 씨익 웃으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형, 일단 술부터 채우죠. 이태원의 묘미는 나이트나 바에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 뒷골목에 정수가 숨어 있어요.”

김지훈은 몰라도 자칭 연애의 달인인 손일석의 말이었다. 이경석이 철석같이 믿고 동그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자! 레몬과 체리는 많이 먹으면 머리 아파요. 그러니까 간단하게 한 병씩만 하고 오이 소주로 하죠. 안주는 형 드시고 싶은 거 마음껏 드세요.”

소주 한 병에 3,000원에 안주 하나가 5,000원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이경석이 마지못해 알탕과 골뱅이를 택했다.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잠시 후 주인아주머니가 병이 아닌 물통에 가득 담긴 세 종류의 소주를 내왔다.

“이 미친놈들. 물통 하나가 한 병이 아니잖아. 이 정도면 여섯 병은 되겠다. 이걸 다 마시자고?”

“어허! 형님. 사나이라면 이 정도는 앉은자리에서 뚝딱 해치워야죠. 주당인 줄 만천하가 다 아는데 왜 이러세요?”

손일석의 말에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형을 우리가 아는데. 그리고 그냥 소주보다 먹기가 아주 편해요. 물이에요, 물. 게다가 한 3만 원이면 우리 셋이 다 취할 수 있어요. 형만 잘 버티시면 돼.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설마 한 병으로 끝내진 않겠죠?”

이경석이 한숨을 쉬었다.

이태원까지 와 허름한 선술집에서 깜깜한 골목을 보며 술을 마셔야 한다니 믿을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도 좋아하고 아끼는 후배들이자 동기들이었다.

이경석이 호기롭게 소주잔을 들며 외쳤다.

“좋았어. 일단 마시자. 한 잔 가득 따라 봐.”

김지훈이 묘한 소리를 냈다.

“형, 물이라고 했잖아요. 물을 누가 소주잔에 먹어요. 글라스로 먹어야지. 그럼 레몬부터.”

맥주잔에 한 가득 레몬 소주를 따랐다. 테이블은 세 개뿐이었고 손님도 달랑 셋이었다. 주인아주머니만 참아 주면 거리낄 것이 없었다. 다소 당황한 이경석의 얼굴을 뒤로하고 손일석이 크게 외쳤다.

“원샷!”

글라스 세 잔에 찼던 술이 단숨에 사라졌다.

“크! 캬! 쩝!”

달달한 레몬 맛에 술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맞네. 물이네. 이런 술이 있다는 걸 몰랐다니 내가 요새 확실히 감이 떨어졌어. 마누라 바가지 때문인가?”

“에이! 형수님이 무슨 죄가 있어요.”

안주 한 점씩을 입에 넣고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주거니 받거니 레몬 소주에 이어 체리 소주가 사라졌다.

마시긴 좋았지만 술은 술이었다. 글라스로만 네 잔씩 비웠다. 오이 소주까지 이어지자 점점 얼굴이 벌게진 손일석의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확 오른 이경석은 이미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지훈아, 음성에서 고생했다.”

“형, 고생 안 했어요. 거기도 병원이에요.”

“하여간 미안하다. 이혁민 선생님이 널 왜 음성에 보냈는지 정말 모르겠다. 정갑수나 보내지. 그 새끼는 없는 게 나아.”

손일석이 꺽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형. 정갑수, 정말 문제예요. 저러다 악어하고 똑같아질 것 같지 않아요? 내년에는 아주 쌍으로 놀겠어요.”

“그래도 악어는 그나마 일이나 할 줄 알지. 정갑수, 그 새끼는 인턴 마치자마자 군대부터 갔어야 돼. 정신 확 차리지 않으면 민폐다. 민폐.”

술 먹을 때 최고의 안주감인 뒷담화가 나타났다.

김지훈이 빠질 수 없었다.

“천안도 난리가 아니에요. 과장님이 결국 야야 소리까지 터트렸는데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형 말이 딱 맞아요. 민폐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에요. 나하고 사이가 좀 안 좋은데 우리 파트 일만 빵구를 낸다니까요. 성질 같아서는 그냥 한 대 패고 싶은데 유석재 선생님 때문에 참고 있습니다.”

손일석과 이경석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뭐? 야야 소리가 터졌어?”

“그렇다니까요? 그게 말이에요. 최철한 선생님이 그렇게 눈치를 주는데도 과장님한테 떡하니 거짓말을 그냥…….”

김지훈이 썰을 풀자 손일석과 이경석도 게거품을 물었다.

어디까지가 경험이고 어디까지가 들은 말인지 모르지만 온갖 말이 다 나왔다. 결론은 결국 죽일 놈이라는 말로 끝났다. 한참 정갑수를 씹으며 술을 마시던 손일석이 갑자기 김지훈을 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지훈아, 근데 너 이건 모르지?”

“뭘 몰라?”

“이 형이 정보통 아니냐. 악조건 속에서도 귀를 열고 의국 분위기를 파악했는데 아주 귀중한 정보가 들어왔어.”

이경석까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일석이 소주 한 잔을 단번에 비우고는 쓱 입을 닦았다.

머리 세 개가 한곳으로 모였다.

“요새 금 과장님하고 이혁민 선생님하고 둘 사이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소문이 있어. 그래서 내가 유심히 봤는데 어떤 때는 꼭 둘이 신경전을 벌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야. 미묘하지만 확실히 외래 분위기가 변하고 있어. 이건 순전히 내 느낌인데 강호에 피바람이 불지도 몰라.”

“뭐? 이혁민 선생님은 과장님 파트 소속인데 그럴 수가 있어? 잘못 본 거겠지.”

“형, 생각을 해 봐요. 그게 원인일지도 모른다니까요. 솔직히 과장님은 간담도고 이혁민 선생님은 위장관에 유방 질환을 맡고 있는데 같은 파트라는 게 말이 돼요? 대학 병원 중에 그런 병원이 어디 있어요? 내가 이혁민 선생님이었으면 벌써 파트 분리하자고 했을 겁니다.”

“없긴 하지. 근데 파트가 이렇게 굴러간 지 꽤 오래됐잖아. 이제 와서 새삼 파트 때문에 싸운단 말이야?”

“음! 그렇긴 하지만 분명 뭔가 있어요. 분위기가 한 달 전하고는 다르다니까요. 요새 리포트 발표 때 보면 과장님하고 임동완 선생님이 한편이고 이혁민 선생님하고 오상익 선생님이 한편처럼 보인다니까. 확실히 이상하지 않아요?”

이경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일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뭔가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 틀림없었다.

한 번도 서울을 돌지 못해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지훈이 간만에 입을 열었다.

“서울 병원도 파벌 싸움을 하나 봐. 이혁민 선생님은 그런 쪽에는 관심도 없으실 줄 알았는데 뜻밖이네.”

손일석이 눈가에 힘을 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파벌을 만들다니 우리 과가 무슨 무림이냐? 그렇다고 해도 맹주가 확실하잖아. 혁신위원회 위원장까지 맡고 있는데 누가 금 과장님한테 덤빌 수 있겠어? 칼을 드는 순간 다 추풍낙엽처럼 날아갈 텐데. 아마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을 거야. 내 예민한 감각에 촉이 쫘악 와.”

“그럴까? 하지만 느낌이 그래. 천안에서 송 과장님하고 구영선 선생님 사이가 안 좋은데 그 이유 중 하나가 금경태 과장님이거든.”

김지훈이 유석재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눈가를 좁힌 손일석이 김지훈을 보며 나직한 신음을 터트렸다.

“그게 사실이면 서울과 천안이 금 과장님 편하고 반대하는 편으로 쪼개졌다는 말일 수도 있네. 이거 놀라운 일인데. 정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겠어.”

“이 자식은 아까부터 피바람 타령은. 하여간 그럴 수도 있겠다. 하긴 금 과장님이 거의 모든 권한을 다 행사하니까 다른 선생님들에게 불만이 없을 수가 없겠지. 지훈이 말을 들으니까 나도 비슷한 생각이 들긴 하네.”

이경석도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한 잔씩 더 마셨지만 분위기가 살질 않았다. 교수들 간의 알력 싸움이 전공의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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