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보고 싶었던 사람들 Ⅰ (1)
중환자실 환자까지 생각나자 자기 자신에 대한 은근한 분노마저 느껴졌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피곤했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민을 거듭하던 신현수가 벌떡 일어나 찬물에 머리를 담갔다.
‘좋아, 김지훈. 다시 시작해 보자. 내가 네게 뒤처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야. 그럴 수가 없잖아.’
동기들과 함께 일을 하며 느꼈던 감정들이 살짝 흐려지기 시작했다. 신현수는 아직도 자신보다 뛰어난 동기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용납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현수야, 천천히 해. 빨리 한다고만 잘하는 게 아니다. 천천히 해. 천천히.’
누구보다도 수술을 빨리 하는 송재덕 과장이 수술실에서 나가며 한 말이 밤새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어떤 의미일까?
답은 신현수 스스로 찾아야 할 문제였다.
다음 날 아침 회진을 돌기 위해 모여 있던 위 연차들이 김지훈을 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수술 되게 잘했다며?”
“에이! 선생님, 왜 그러세요.”
“뭐가, 인마. 철한이하고 석재가 똑같은 말을 하던데. 1년차 중에 현수만큼 수술을 잘하는 놈은 없을 줄 알았는데 다크호스가 나타났어.”
“어휴! 선생님들이 도와주신 덕이죠.”
“야! 김지훈이 말 잘하네. 아주 아부도 수준급이야.”
위 연차 입장에서 자신보다 수술을 잘하는 아래 연차가 있다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들 웃으며 좋아하고 있었다. 그만큼 일도 열심히 했지만 김지훈이 평소 누구보다도 위 연차들에게 깍듯하고 겸손했기 때문이었다.
구석에 서 있던 정갑수가 얼굴을 구겼다. 자신이 수술을 했을 때는 관심을 주기는커녕 인상까지 찌푸렸었다.
‘씨펄! 아무리 과장님하고 문제가 있다지만 이건 아니지. 근데 하필이면 또 저 새끼냐. 현수, 너도 골치 아프겠다. 이사장님 아들이라고 기고만장하더니 꼴좋네.’
신현수 역시 답답한 표정으로 회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들의 태도가 확실히 자신이 수술을 했을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인간관계에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 아직도 부족한가? 얼마나 더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걸까?’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 능력까지 뛰어나 굳이 동기들이나 선배들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 때문인지 원만한 대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신현수에겐 갑갑한 일이었다. 마치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잠시 후 회진이 모두 끝나고 주말 리포트 발표가 시작됐다.
오늘 발표는 김지훈이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송재덕 과장은 물론 다른 스태프들도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구영선 교수만이 입술을 내민 채 눈가를 찌푸리고 있었다.
“수고했어, 김지훈. 음! 수술도 잘하고 다 잘하네. 현수하고 둘이 열심히 해 봐. 기분 좋다. 허허! 끝내자. 자자자! 끝내자. 집에 가자.”
마지막까지 남아 컨퍼런스 룸을 정리한 김지훈이 활짝 웃고 말았다. 밖에서 중환자실의 김복남 환자를 병실로 옮기라는 송재덕 과장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만세! 만세! 주말 오프 간다.’
김지훈이 양팔을 번쩍 들며 휘파람까지 불었다.
***
토요일은 수술이 없는 관계로 모처럼 제시간에 점심 식사가 끝났다. 슬쩍 눈치를 보며 빠져나온 김지훈이 공중전화를 찾았다.
“경아 씨, 오늘 나 올라갈 수 있는데 시간 돼요?”
(정말 올라오실 거예요?)
“그럼요. 경아 씨 시간이 되면 오늘 올라가고 안 돼도 오늘 올라가야겠죠.”
김지훈이 농담처럼 말을 던졌지만 반응은 무덤덤했다.
(무슨 소리예요? 오늘 서울에서 다른 일 있어요?)
“다른 일이 뭐가 있겠어요. 경아 씨가 정 시간을 못 내면 일석이하고 경석이 형이나 봐야죠. 둘 다 알죠? 하지만 시간이 되면 친구고 뭐고 경아 씨부터 봅니다. 진짜예요.”
(왜 그렇게 절 보시려고 하는데요?)
왜 보다니? 이유야 빤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막상 대놓고 대답을 하려니 입이 바로 열리질 않았다. 왠지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그게 있잖아요.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많이 보고 싶어 한답니다.”
김지훈의 넉살에 이제야 고경아가 살짝 웃었다.
(그 남자가 누군지 궁금하네요. 그럼 일단 오세요. 언제 도착할 수 있어요?)
“글쎄요. 일 끝나자마자 가긴 할 건데 언제 보내 줄지 알 수가 없네요. 그래도 유석재 선생님이 같은 파트라 많이 늦지는 않을 겁니다.”
(알았어요. 그런데 오늘은 저녁때 잠깐밖에 시간을 못 내요. 엄마하고 아빠가 오시거든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부모님이 오신다니 난감한 일이었다. 그래도 일요일이 있어 다행이었다.
“어? 그래요? 모처럼 가족들이 다 모이는 것 같은데 그럼 내일 볼까요?”
(아니에요. 저녁 늦게 잠깐 들르셨다가 곧 가셔야 해서 괜찮아요. 할 얘기도 있고요.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같이 먹고 지훈 씨는 선생님들 만나세요. 안 그래도 가끔 손일석 선생님이 지훈 씨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예. 그럼 출발할 때 다시 전화할게요.”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게 소위 말하는 밀고 당기기인지는 몰라도 은근히 퇴짜를 맞을까 봐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이거 은근히 심각한데. 으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서울 병원에 전화를 걸어 손일석을 찾았다. 어찌 됐든 고경아를 만난 후 손일석과 이경석을 만날 수 있다면 최상이었다.
(김지훈, 너 이 자식. 형한테 이제 전화해? 많이 컸네. 감히 이런 불경을 다 저지르고 말이야.)
“미안해, 인마. 오늘 오프냐?”
(오프다. 왜?)
“잘됐다. 그럼 경석이 형하고 밤에 보자. 술 한잔 어때?”
손일석이 반색을 했다.
(술? 좋지. 네가 형과 술을 마실 생각을 하다니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그런데 경석이 형 지금 구미에 있어, 인마. 혹시 모르니까 일단 전화는 해 볼게. 오프라고 해도 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아! 그리고 네가 사는 거지? 형 돈 없다.)
“알았어, 인마. 이따가 봐.”
이경석이 구미에 있어 어찌 될지 모르지만 일단 시간은 딱딱 맞았다. 어쨌든 무난하게 주말 오프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관건은 고경아였다.
***
두 번째 주말 오프였다.
첫 번째는 왜 못 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왜 못 갔지? 에휴! 이젠 머리가 안 돌아가나.’
이유를 생각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브레이크 걸리는 소리가 들리며 버스가 덜컹거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아직은 환한 강남 거리가 사람들로 넘쳐 났다.
7개월 만에 서울 땅을 밟았다.
고경아와 약속 장소를 정한 후 서울 병원으로 향했다.
손일석과는 저녁 8시 이후에 만나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어여쁘게 차려입은 자매가 보였다.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가자 고경희가 밝게 웃었다.
고경아가 새침한 표정으로 고경희를 째려보는 것 같았다.
“경아 씨,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에요. 생각보다 길이 안 밀린 모양이네요. 경희가 지훈 씨한테 밥 얻어먹는다고 졸라대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언니! 내가 뭘? 오빠! 나 밥 사 줄 거죠? 언니가 하나뿐인 동생한테 자꾸 뭐라고 그래요. 혼내 주세요.”
“내가 언제.”
어째 고경아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아마 혼자 만나려고 했는데 고경희가 따라 나온다고 고집을 부린 모양이었다. 김지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역시 내가 보고 싶었던 게 틀림없어.’
김지훈이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둘 사이에 쏙 끼어들었다. 천안에서 올라오기 전 맛있는 집을 알아 놓았다. 훼방꾼이 있다고 해도 역시 데이트는 맛집에서 시작하는 것이 분위기를 타기 마련이었다.
“경아 씨, 뭐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경희, 너는?”
서로 얼굴만 보며 말이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럼 병원 근처에 있는 생불고깃집 갑시다.”
“생불고기요?”
“나도 안 가 봐서 잘은 모르는데 맛이 끝내준대요. 나름 유명한가 봐요. 가까운 데 있었는데 왜 몰랐는지 모르겠어요.”
유석재가 알려 준 대로 생불고깃집을 찾았다.
샤브샤브처럼 얇게 썬 소고기와 양파, 감자, 팽이버섯, 양송이에 숙주나물까지 온갖 채소가 나왔다. 뜨겁게 달궈진 돌 판에 고기와 함께 채소를 익혔다.
고소한 냄새에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한 입 딱 먹는 순간 바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우! 맛있네. 경아 씨, 어때요? 경희야, 맛있지?”
“흐음! 맛있긴 하네요.”
“와! 오빠 덕에 오늘 입이 호강하네요.”
고경희가 감탄을 하며 연신 입에 고기를 넣었다. 뜨뜻미지근한 고경아의 말에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었다. 아직은 배가 찰 때가 안 됐는데 고경아가 평소 입에 잘 대지 않던 맥주만 홀짝 마시며 물었다.
뭔가 싸한 기운이 전해졌다.
“지훈 씨, 가만 보면 지훈 씨만 유난히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무슨 소리예요?”
“서울 1년차 선생님들은 100일 당직 끝나고 나면 주중에는 한두 번 꼴로 오프를 가잖아요. 주말에도 2주에 한 번은 꼭꼭 가던데 왜 지훈 씨만 오프가 이렇게 없어요?”
고기를 한 입 물고 씹던 김지훈이 하마터면 모조리 뱉어 낼 뻔했다. 정갑수만 아니었다면 천안도 음성이나 구미에 비해 도리어 편하다고 할 정도였다. 결국 1년차가 네 명인 서울은 마음만 맞추면 더 편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정말이에요?”
“어머! 어떻게 지훈 씨가 그걸 몰라요? 설마 지훈 씨만 바쁘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죠?”
씹던 고기를 얼른 집어삼키고 소주로 입가심을 한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오프가 없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시간이 없는지 묻고 있었다.
김지훈이 매서운 고경아의 물음을 은근슬쩍 피했다.
“그러게요. 왜 몰랐을까?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음성이나 구미는 1년차가 한 명이라 더 힘든 것 같아요. 천안에 오니까 오프가 도리어 더 많더라구요. 문제는 평일에는 오프 시간도 늦고 자기 바빠 갈 시간이 없다는 거지만 어쨌든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은 드네요.”
“천안에는 1년차가 몇 명인데 평일 오프를 갈 시간이 없어요? 세 명 아니에요?”
뭔가 단단히 작정을 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세 명인데 그중에 한 명은 있으나 마나예요. 뭐,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어떤 때는 있는 게 더 힘들어요.”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자 고경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선생님이 누군데요?”
“정갑수요.”
“아! 일 정말 못하는 선생님이요? 나도 알아요. 수술 방에서 이혁민 선생님한테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몰라요.”
“이혁민 선생님한테요?”
“서울에 있을 때 이혁민 선생님 파트 돌았잖아요. 정말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혼이 났는데 끝까지 하나도 안 변해서 우리도 참 대단하다고 말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게 주말 오프랑 무슨 상관이죠?”
‘어? 이게 아닌데. 경아 씨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거렸다.
생각해 보면 정갑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다. 스스로는 일과 환자에 대한 열정이라고 생각했지만 고경아가 이해하는 데에도 정도가 있을 것이다. 신현수와의 경쟁도 고경아 앞에서는 핑계에 불과했다.
“에휴!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술이나 한 잔 합시다. 경희야, 짠!”
“네, 오빠.”
애교가 가득한 고경희의 콧소리에 김지훈이 그나마 마음을 조금은 놓았다. 그간 서로에게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8시가 다 됐다. 고경아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우면서도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고경아가 시계를 보며 김지훈을 보았다.
아쉬운 표정 속에 뭔가 냉정하고 싸늘한 기운이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엄마 아빠 도착하실 시간이 거의 다 돼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에이! 엄마는 하필이면 오늘 와.”
고경희가 투정 비슷하게 투덜거렸다. 아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내일이 있었다. 김지훈이 짐짓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경희야, 맛있게 먹었지?”
“네, 오빠. 다음에 더 맛있는 걸로 사 줘요.”
“알았어. 경아 씨, 내일 몇 시쯤에 시간이 나요?”
“아마 11시는 넘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럼 12시에 만나죠. 내일은 명동 갑시다.”
고경아가 고민하는 척하며 딴청을 피우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오빠, 나는요?”
“음! 우리 경희는 내일 집에서 푹 쉬었으면 좋겠는데.”
“어머! 나만 빼놓고 갈 거예요?”
“빼놓은 게 아니라 주말이잖니. 쉬어. 푹 쉬어.”
김지훈이 송재덕 과장의 말투를 흉내 내며 고경희의 어깨를 톡톡 쳤다. 삐죽이 입을 내민 고경희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둘이 잘해 봐요. 오늘 엄마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엄마 아빠라는 소리에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그런데 고경아가 태연하게 고경희를 보며 맞받아쳤다.
“얘기해라. 너도 남자 친구 있잖아. 나는 뭐 엄마 아빠 허락받고 남자 만나야 돼?”
“난 친구고 언니는 애인이잖아. 맨날 10원짜리만 만지작만지작거리면서.”
갑자기 고경아가 고경희를 홱 째려보았다.
“경희 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지훈 씨, 잠깐 나 좀 봐요. 할 얘기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