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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74화 (174/1,329)

제2화 경쟁의 의미 Ⅱ (2)

새벽 5시.

간호사가 잊지 않고 김지훈을 깨웠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주무르던 김지훈이 크게 하품을 하며 김복남 환자에게 다가갔다. 안정적인 바이탈에 숨도 고르게 쉬고 있었다.

‘소변도 잘 나오네. 이 정도면 아침에 인투베이션 튜브를 빼도 될 것 같은데.’

문득 최선희가 생각난 김지훈이 다시 한 번 환자 상태를 세세하게 살폈다. 그때 유석재가 들어왔다.

“어? 선생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너 여기 있었냐? 잠은 잤어?”

“예. 당직실에서 조금 잤습니다.”

“에이! 그런 줄도 모르고 니네 숙소까지 올라갔다 왔잖아. 지금 아뻬 하나 떴는데 과장님이 정규 수술 전에 먼저 하신단다. 그렇게 알고 준비해.”

김지훈이 시계를 보았다. 난감한 일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촉박하다고 해도 이 시간에 드레싱을 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드레싱 시작 시간이 빨라 환자들을 깨워 가며 드레싱을 하는데 30분이나 당길 수는 없었다.

“큰일 났네요. 드레싱하고 회진 돌면 8시가 넘는데 언제 준비하죠?”

“오늘은 과장님 회진 돌지 말고 수술실에 먼저 내려가. 어쩌면 수술 다 끝나고 도실지도 모르니까 걱정 마.”

“옙. 알겠습니다.”

김지훈이 막 일어나려는 순간 누군가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 하니. 둘이 뭐 하니. 환자 괜찮아? 지훈아, 어때?”

송재덕 과장이었다. 흠칫 놀란 김지훈이 벌떡 일어나 환자 상태를 노티했다. 얼떨결이었지만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줄줄 말이 나왔다. 송재덕 과장이 웃으며 김지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그래. 쉬어. 빨리 쉬어. 피곤하겠다.”

“예, 과장님.”

송재덕 과장이 나가는 것을 보자마자 김지훈이 병동으로 달려갔다. 꼭두새벽에 중환자실을 찾아오다니 잠도 없는 모양이었다. 묘한 중압감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부랴부랴 드레싱을 하고 회진 준비를 했다.

최철한과 함께 전공의 회진을 끝냈을 때 전화가 왔다.

8시도 안 됐는데 수술을 하자는 송재덕 과장의 말에 최철한이 급히 김지훈에게 손짓을 했다.

“지훈아, 지금 수술하신단다. 빨리 준비해.”

“예, 선생님.”

다른 파트는 한참 회진을 돌고 있을 때 김지훈은 수술 방에서 환자를 수술대에 옮기고 있었다. 송재덕 과장이 평소보다 빨리 들어왔다.

“보자. 보자. 준비 다 됐지?”

“예, 과장님.”

최철한이 대답하며 급히 손을 닦으러 나갔다.

그때 송재덕 과장이 손을 저었다.

“철한아, 됐어. 넌 안 들어와도 돼. 지훈이 퍼스트 좀 세워 보자. 김지훈이. 흐음! 허허!”

“예? 퍼스트를 세우시는데 왜…….”

평소 송재덕 과장은 1년차에게 수술을 주거나 퍼스트를 세울 때 3년차에게 맡기고 수술은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빠른 손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의 손을 직접 보겠다고 한 것이다.

김지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뻬 퍼스트를 서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김지훈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영 과장도 만만치 않게 손이 빨랐지만 수많은 수술에서 호흡을 맞췄다. 반면 송재덕 과장과는 처음이었다. 어떻게 퍼스트를 서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최철한의 눈짓에 재빠르게 손을 닦고 퍼스트 자리에 섰다.

이젠 습관처럼 붙은 일이었다. 잊지 않고 수술 과정을 상기한 김지훈이 송재덕 과장의 수술 모습을 떠올렸다. 빠른 손에 보조를 맞추려면 최대한 미리 준비를 해야 했다.

송재덕 과장이 환부 소독 및 드랩(수술 부위만 남기고 소독된 천으로 환자의 전신을 덮는 일)부터 함께 했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았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수술이 시작됐다.

메스 소리가 나기 무섭게 환자의 우하복부가 절개됐다.

처음으로 퍼스트를 세우면서도 마치 3년차가 앞에 있는 것처럼 조금도 손을 늦추지 않았다. 김지훈이 빠르게 손을 놀리며 보조를 맞췄다.

배가 열리고 아뻬가 제거되고 다시 배를 닫았다. 환자가 다소 마른 탓이라지만 불과 20분도 안 돼 수술은 물론 마취까지 모두 끝났다.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경험이 많은 데다 이준영 과장의 손을 따라갈 정도였기에 눈에 보일 정도의 실수는 하지 않았다.

‘요놈 봐라. 이준영이 옛날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아주 잘 만들었어. 좋아. 아주 좋아.’

송재덕 과장도 장갑을 벗으며 웃고 있었다.

“잘한다. 잘한다. 으음! 김지훈, 네가 김지훈이지. 허허!”

“수고하셨습니다, 과장님.”

“그래그래. 열심히 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수술을 지켜보던 최철한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후우! 잘했어. 다행이다. 널 믿기는 했지만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거든. 손이 보통 빠르셔야 말이지. 그나저나 너 참 희한한 놈이다. 어떻게 과장님 손을 처음부터 이 정도로 따라가냐. 1년차 맞아?”

김지훈이 쑥스러운지 웃기만 했다.

그날 수술을 모두 마친 송재덕 과장이 중환자실 회진부터 돌았다. 마침 공정식이 김복남 환자를 보고 있었다.

“환자 괜찮지. 괜찮아? 지훈아, 얘 이름이 뭐냐? 공정식이지. 공정식. 맞다. 맞아.”

“예, 과장님.”

“그럼 뽑자. 뽑아. 뽑아.”

공정식과 눈을 마주친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기관에 삽입된 튜브를 뽑았다. 자극을 받은 환자의 반응이 좋았다. 연거푸 기침을 하는 모습을 보며 다들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좋아. 좋아. 지훈아, 오늘 쉬어도 되겠다. 쉬어.”

병동으로 올라가며 몇 번이나 쉬어도 좋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역시나 확실한 반어법이었다. 기관 내 튜브를 뺀 날 사고가 가장 많이 터지기 때문이었다.

그날 일과를 모두 끝낸 김지훈이 수술 기록지를 들고 중환자실에 내려왔다. 환자를 보며 틈틈이 기록을 작성하던 중 뭔가 머릿속을 휙 하고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슬슬 감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송재덕 과장의 전화가 왔다.

(지훈이구나. 김지훈, 환자는 어떠니?)

“바이탈은 안정적이고 소변도 시간당 30cc 이상 유지되고 있습니다. 호흡도 원활하고 의식도 많이 돌아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습니다.”

(드레싱은 괜찮아? 괜찮지.)

생리 식염수를 10,000cc나 쓰면서 배 속을 닦았지만 여전히 고름 찌꺼기들이 나오고 있었다.

“아직 깨끗하지는 않습니다만 감염의 징후는 없고 열도 나지 않습니다. 저녁에 찍은 흉부 사진도 깨끗합니다.”

(그래그래. 좋구나. 지훈아, 쉬자. 쉬어. 피곤하지?)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한숨을 푹 쉬었다.

환자의 회복이 순조로워 다행이었지만 이번 주는 주중 오프를 몽땅 반납해야 할 판이었다. 예상대로 흘러갔다. 응급실과 수술 당직을 서면서 중환자실 킵까지 해야 했다. 게다가 밤중에 꼭 한 번은 송재덕 과장과 통화를 했다.

(김지훈, 너 오프 안 가니? 오프 가야지. 암! 쉬어야지.)

왠지 얄미웠다. 그래도 아뻬에 이어 무려 탈장 수술에서 또 퍼스트를 선 덕분에 상당히 즐거웠다. 이준영 과장과 박경일 과장의 손, 그리고 송재덕 과장의 손을 마음속으로 비교해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모든 분들이 똑같은 수술을 하는데 조금씩은 방식이 다르시네. 아뻬를 보면서도 정말 배울 게 많아. 이런 게 퍼스트를 서는 재미일까?’

그때 공정식이 들어왔다. 시간이 날 때마다 환자를 함께 봐 주어서 고마웠다. 오늘도 외과 전공의에겐 무리일 수밖에 없는 스테로이드 중독의 치료에 관한 문제를 상의했다.

여기저기서 배우는 게 정말 많았다.

“지훈아, 환자 곧 회복되겠다. 오늘 검사 결과 나온 게 생각보다 훨씬 좋아.”

“다행이다. 네가 신경을 많이 써 줘서 그래. 정식아, 정말 고맙다.”

공정식이 씨익 웃으며 김지훈의 어깨를 툭 쳤다.

‘미안한 말이지만 현수하고 비교가 참 많이 돼. 현수 그 자식은 지가 다 아는 것처럼 행동을 하는데 지훈이는 이미 알고 있는 것도 함께 상의하고 항상 고마워하니까 오히려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네.’

“고맙긴. 내가 고맙지.”

김지훈이 환자를 보다 말고 주변을 둘러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중환자실 간호사들이 환자의 대소변을 받아 내고 더러워진 침대보를 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굴을 찡그릴 법도 했지만 다들 웃으며 일을 하고 있었다.

문득 고경아 생각이 났다. 의료 봉사 때 보았던 미소가 떠올랐다. 당분간 만나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을 했지만 당장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김지훈이 공정식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한데 나 잠깐만 나갔다 올 테니까 환자 좀 봐 줄래?”

“어? 그래. 오래 걸리진 않지?”

“10분만 봐 줘.”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잽싸게 병원을 나와 공중전화로 향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지만 이 시간 아니면 전화를 할 틈을 내기도 쉽지 않았다.

(여보세요?)

“휴우! 다행이네요. 안 받을 줄 알았는데.”

(어머! 지훈 씨.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천안 병원이 서울보다 더 힘들다던데 몸은 괜찮아요?)

반가워는 하는데 어째 목소리가 예전과는 다른 것 같았다.

“그럼요. 체력 하면 난데. 다름이 아니라 이번 주말이 오프예요. 환자 한 명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는데 혹시 상황이 되면 서울 올라가려고요.”

(서울에요? 왜요?)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거의 한 달 반이 넘어서야 얼굴을 보자고 하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자신을 보겠다고 의료 봉사까지 왔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무심했다.

“경아 씨 얼굴 보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요?”

(음! 토요일에 전화 다시 주실래요? 주말에 시간이 날지 어떨지 모르겠네요.)

주는 만큼 받는 법이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알았어요. 토요일에 전화할게요.”

(정말 하실 거예요?)

“환자 때문에 못 가게 돼도 꼭 할게요. 혹시 올라갈 수 있으면 경희한테 점심 산다고 전해 주세요.”

다소 냉담한 것 같은 반응에 엄한 고경희를 끌어들였다.

고경아가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일단 전화부터 주세요.)

“알았어요. 미안한데 이만 끊을게요. 중환자실에 환자가 있어서 오래 통화할 수가 없네요.”

(네. 잘 지내시고요. 연락 주세요.)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기 마련이었다. 전화까지 몇 번 안 했으니 고경아도 속이 상할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없다는 말을 들은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업자득이다. 누굴 탓하겠어. 내가 편할 때만 연락을 하고 만나자고 했으니 나라도 안 만나겠다. 정말 시간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고경아의 처분만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됐다. 갑자기 걱정이 되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만날 시간이 없었고 상황도 여의치 않았지만 왠지 모를 후회가 물밀 듯이 몰려왔다.

***

금요일 오후 김지훈의 안색이 몹시 좋지 않았다.

수술 때문이었다. 신현수는 벌써 수술을 네 번이나 받았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해도 구영선 교수가 정갑수에게 수술을 또 주었을 때는 정말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다.

아직도 정갑수만 보이면 의국 분위기는 한겨울처럼 찬바람만 쌩쌩 불었다. 미안해하는 구석이라도 보이면 그나마 넘어갈 텐데 정갑수는 그런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일은 못해도 의외로 수술을 잘하는 전공의는 있다. 하지만 일을 안 하면 수술도 못할 수밖에 없었다. 교과서만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이 수술이기에 열의를 갖고 눈으로라도 보고 배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정갑수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하도 손이 느려 함께 수술을 들어간 위 연차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술이 끝나고 욕까지 먹었지만 김지훈은 부럽기만 했다.

“에휴! 정갑수도 수술을 받는데 난 언제 수술을 해 보나. 과장님은 전화만 하시고 수술은 줄 생각도 안 하시는 것 같네. 퍼스트 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오늘따라 수술도 일찍 끝나 마음이 더 심란했다. 웬일인지 일까지 없어 시간이 남아돌았다. 간만의 여유였지만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혼자 투덜거리며 드레싱을 마친 김지훈이 의국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마음이 심란해지자 고경아 생각이 났다. 별처럼 빛나는 눈과 맑은 미소가 보고 싶었다.

그때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아뻬 환자 두 명이 동시에 떴다. 수술을 내일로 미루기에는 너무 일렀다. 시간이 애매모호해 잇달아 하면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길 수도 있었다. 김지훈의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 같은 날은 일찍 와도 되는데 한가하다 싶으면 꼭 요런 시간이 온단 말이야. 이상해.’

정말 그런 것인지 환자들이 애매한 시간에 올 때마다 기억에 남아서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여간 일과가 끝날 무렵에 환자가 오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노티를 받고 내려온 송재덕 과장이 시계를 보며 최철한과 유석재를 불렀다.

“철한아, 마취과에 양방 부탁하자.”

“예, 과장님. 그럼 어떻게 들어갈까요?”

“이번에는 지훈이하고 신현수 주자. 신현수 시간 되나?”

김지훈의 귀가 번쩍 뜨였다. 같은 파트도 아닌 신현수에게 왜 갑자기 수술을 주는지 모르지만 없던 힘이 마구 솟았다.

“알겠습니다. 알아보고 준비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그래. 안 되면 말자. 말아.”

안 되면 말자고?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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