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경쟁의 의미 Ⅱ (1)
환자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 같았다.
“환자분, 손을 뗄 때 배가 아프세요?”
의식 상태가 생각보다 나쁜 탓인지 환자가 웅얼거리기만 했다. 어쩌면 스테로이드 중독으로 인해 통증에 매우 둔해졌을지도 몰랐다.
수차례 청진과 촉진을 반복하면 할수록 내과 배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외과 배(surgical abdomen)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문득 휴가 때 했던 이준영 과장의 말이 생각났다. 지나가는 말처럼 했던 말이었다.
‘선생님, 복막염이 의심은 되는데 프리에어가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위궤양이 터진 경우에는 CT에서도 잘 보이지 않던데요.’
‘코 줄 꽂고 공기를 위 속으로 200cc 정도 밀어 넣어. 경우에 따라서는 안 보이던 프리에어가 보이는 때가 있어.’
‘그래도 괜찮은가요?’
‘어차피 터졌으면 수술을 해야 하고, 한 번에 먹는 식사의 부피가 얼만데 그 정도 공기에 위가 터지겠어? 다만 편법이니까 함부로 시도하지는 마. 정말 애매모호할 때만 해.’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장기간 스테로이드가 포함된 관절 약을 복용했다. 약에 의한 위궤양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스테로이드가 염증 반응과 통증을 지나치게 억눌렀다면 궤양이 터졌어도 지금과 같은 상태를 보일 수도 있었다.
공정식과 상의를 한 후 코 줄을 통해 공기를 밀어 넣었다. 코 줄의 입구를 막고 10분 정도 기다린 후 포터블(이동식 방사선 촬영 장치)을 불렀다. 환자의 상체를 억지로 일으켜 흉부 사진을 다시 찍었다.
잠시 후 사진이 나왔다.
공정식이 좌측 횡격막 아래를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까만 음영이 횡격막을 따라 실처럼 걸려 있었다. 위에 난 구멍을 통해 흘러나온 공기가 분명했다.
“이거 프리에어(free air)지?”
“맞아. 빤뻬리(panperitonitis:복막염)네.”
위궤양 천공에 의한 복막염이었다. 진단이 이토록 어려웠던 이유는 바로 위궤양을 유발한 스테로이드 때문이었다. 전신 상태가 엉망이 되고 균형이 깨지면서 모든 것이 비정상적으로 변한 것이다.
김지훈이 유석재에게 노티를 했다.
곧 위 연차에게 노티를 한 공정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김지훈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지훈아, 너 아니었으면 환자 한 명 영문도 모르고 보낼 뻔했다. 고맙다.”
“지금부터가 문제지. 패혈증에 복수까지 가득 찼는데 이 환자가 수술을 견딜까? 스테로이드 중독은 또 어떻게 하고.”
“어이구! 그렇구나. 걱정이네. 그래도 수술을 안 할 수는 없잖아. 스테로이드 문제는 내가 확실하게 맡을게.”
“안 하면 백 프로 사망인데 이 몸으로 수술이나 견딜지 모르겠다. 보호자에게 연락이나 해 줘. 에휴! 누구 잘못인지 모르지만 환자가 이 모양이 될 때까지 약을 쓰는 사람들이 어디 있냐? 하여튼 정식이 네가 맡아서 봐 준다니 고맙다.”
든든했다. 과를 불문하고 믿을 수 있는 동기가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힘이었다. 공정식이 보호자를 찾는 동안 유석재가 내려왔다. 그 옆에 신현수가 보였다. 수술 당직이라 함께 환자를 보러 온 모양이었다. 환자를 본 신현수의 안색이 변했다.
“이 환자가 빤뻬리라고?”
“응. 프리에어 떴다.”
“어제는 없었는데. 배도 소프트(soft)했고.”
입장이 곤란해진 김지훈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유석재가 환자의 상태를 보자마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흉부 사진과 복부 CT를 확인하고 최철한에게 노티를 했다.
파트 전공의 선배들이 모두 당직이라니 뭔가 이상했다.
“어? 선생님, 오늘 설마 과장님이 당직이세요.”
“맞아. 어휴! 환자도 환자지만 너도 참 불쌍하다. 오프 가야 할 놈이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정갑수 선생 불렀다가 과장님과 마주 치면 곤란하니까 네가 대신 오더만 내.”
환자가 수술을 잘 버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지만 그 이후에도 한동안 중환자실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언제까지 킵을 해야 할지 모르지만 김지훈에겐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환자는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최철한까지 확인하고 난 후 바로 수술 준비를 했다. 오프였지만 정갑수를 부를 수는 없어서 김지훈이 마취과에 수술 스케줄을 냈다. 그사이 공정식과 조용히 환자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신현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30분이 넘게 환자의 배를 촉진했다고? 내가 너무 빨리 진단을 내렸던 건가? 아닌데. 10분이면 환자를 진단하기에 짧은 시간이 아니야. 그리고 이런 방법은 어디서 배웠지?’
진단하기가 무척 까다롭다고 해도 결국은 신현수 자신이 놓친 환자였다. 그런데 김지훈이 처음 듣는 방법으로 진단을 한 것이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30분이 넘게 환자를 보았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나서 송재덕 과장이 중환자실에 들어왔다.
내과에서도 공정식은 물론 위 연차에 스태프까지 와 아닌 밤중에 의사들로 중환자실이 붐볐다. 수술실이 준비되는 동안 내과 스태프와 환자에 대해 얘기하던 송재덕 과장이 갑자기 웃었다. 사흘 만이었다.
“과장님, 1년차 참 잘 뽑으셨습니다. 컨설트 때문에 뛰어다니는 것 보면서 열심히 한다고는 생각했는데 이 환자가 복막염이라는 걸 잡아내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저는 생각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과장님, 좋으시겠습니다.”
과장된 말이겠지만 송재덕 과장의 입장에서는 흡족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과 전공의를 다른 과 스태프가 칭찬을 하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환자를 본 과정을 들어 보니 여간한 노력과 세심함이 아니면 진단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김지훈, 진단을 제대로 한 것도 잘했지만 환자에 대한 열성이 있구나. 일반 외과 의사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송재덕 과장이 김지훈을 불렀다.
“김지훈, 너 오늘 뭐야? 응급실이야?”
“아닙니다. 저 오늘 오픕니다.”
“음! 그렇구나. 오프구나. 그럼 수술을 누가 들어가지? 김지훈. 응? 누가 들어가야 돼, 지훈아.”
최철한과 유석재가 수술 당직인 신현수를 두고 동시에 김지훈을 보았다. 송재덕 과장의 말뜻을 모르면 바보일 것이다.
“과장님,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오픈잖아. 너 오픈데 무슨 수술이야. 괜찮아. 괜찮아. 쉬어. 가서 쉬어. 음! 김지훈, 너 김지훈이지.”
말을 마친 송재덕 과장이 허허 웃으며 수술 방으로 향했다.
쉬라는 말은 수술실에서 천천히 마무리를 하라는 말과 똑같았다. 반복도 모자라 반어법까지? 유석재가 혀를 차며 김지훈의 어깨를 두드리다 말고 흠칫 놀랐다.
“너 뭐가 좋아서 웃어?”
“좋긴요. 그래도 이 환자 수술에는 들어가고 싶네요. 저 오늘부터 중환자실 킵(keep)이죠?”
“당연한 거 아니야. 에휴! 너처럼 일 복 터지는 놈도 없을 거다. 그 덕에 나까지 일 복이 터지네. 수고해.”
김지훈이 24시간 내내 킵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송재덕 과장의 파트인 이상 2년차라고 해도 꽤 많은 시간을 중환자실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신현수를 보며 미안하다는 손짓을 한 김지훈이 최철한과 함께 수술실로 들어갔다. 상황이야 어찌 됐든 오프가 수술 당직 대신 들어가는 모양새가 좋을 수는 없었다.
유석재가 신현수의 어깨를 잡으며 병동으로 향했다.
“과장님 스타일 알지? 너도 전텀에 과장님 파트 돌았으면 비슷한 일이 있었을 것 같은데.”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서운할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겠네.”
빙그레 웃는 유석재를 보던 신현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경험이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송재덕 과장이 인정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과장님 성격상 내가 수술 당직이라는 것은 모르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보고 인정하신 걸까? 이번 환자의 경우만 보고 급하게 판단을 하실 분이 아닌데 도대체 뭘까? 지금까지 수술도 안 주셨잖아.’
김지훈이 응급실 환자를 보는 모습을 보며 동기들 중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따라오지는 못한다는 확신도 들었다. 어떤 환자를 본다고 해도 김지훈보다는 훨씬 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김지훈의 수술 실력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수술에 관해서는 더욱 비교하기 어렵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김지훈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비교조차 안 될 경험까지 쌓은 자신을 이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날 긴장하게 만드는 놈은 너 하나밖에 없구나.’
오늘 일로 다소 풀어졌던 신현수의 마음에 은근한 긴장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수술이 시작됐다. 환자 상태가 안 좋아 마취과 전공의들도 초비상이었다. 통상 수술실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 당직 스태프까지 나와 마취를 주관했다.
빠르게 배를 연 송재덕 과장이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복수가 가득 찬 정도가 아니었다. 천공된 위에서 흘러나온 내용물이 배 속에서 썩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한 냄새는 물론 노란 액체에 끈적끈적하게 변한 고름이 뒤섞여 마치 계란탕처럼 보였다.
“쯧쯧! 빨리 씻자. 빨리빨리.”
석션 기로 염증성 복수를 빨아들였다. 내부 장기에 덕지덕지 묻은 고름들을 일일이 떼어 내고 따뜻한 생리 식염수를 10,000cc나 사용해 배 속을 세척했다.
패혈증 때문인지 아니면 스테로이드 중독 때문인지 위와 장이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다. 살짝만 힘을 주어도 찢어질 것처럼 약해져 있었다.
천공된 부위를 찾은 송재덕 과장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봉합을 시작했다. 마치 이런 경우를 수도 없이 본 사람처럼 막힘이 없었다. 다른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최철한의 손을 기다려 준다는 것뿐이었다.
그 덕에 송재덕 과장의 손을 볼 틈을 얻었다. 머리를 들이밀고 수술을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끄덕였다.
‘그렇구나. 이런 환자의 경우 바늘만 정확하게 들어간다면 위가 찢어질 일은 없으니까 결국 타이를 얼마나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어.’
어시스트를 서며 무엇을 보고 배워야 할지 이제야 제대로 감이 오기 시작했다. 이중으로 천공된 부위를 봉합한 후 대망(넓게 펼쳐진 막처럼 생긴 지방 구조물)으로 마지막 보강을 했다. 배 속이 워낙 지저분해 드레인(심지)을 네 개나 넣었다.
“마무리하자. 마무리.”
송재덕 과장도 이번에는 천천히 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수술을 끝냈다. 환자 상태가 나쁠 때는 수술 시간은 물론 마취 시간까지 단축시키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마지막 바늘을 뜬 최철한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뭐가 이렇게 약해. 위 찢어지는 줄 알았네.”
평소에도 송재덕 과장과 수술을 하면 이마에 땀이 맺혔던 최철한이었다. 이번에는 아예 온몸이 젖은 모양이었다. 등에 들러붙은 수술복이 갑갑한지 몸을 뒤틀었다.
환자를 바로 중환자실로 옮겼다.
최철한과 함께 수술 후 오더를 내고 환자 상태를 살피고 있을 때 공정식이 들어왔다. 눈에 졸음이 잔뜩 걸려 있었지만 꽤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지훈아, 수술 잘 끝났어?”
“잘 끝났지. 앞으로가 문제다.”
“그러게. 나도 최선을 다할게. 최철한 선생님에게 필요할 때마다 노티하지 않고 내과 오더를 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어. 혹시 너한테 연락하지 못해도 이해해라.”
김지훈이 공정식을 보며 웃었다.
이제는 내과 환자가 아닌 외과 환자였다. 내과에서도 가장 힘든 파트를 돌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내일 또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밤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것이다.
고맙고 든든했다. 이게 바로 동료이자 동기들의 힘이었다.
문득 환자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이 느껴졌다.
“고맙다. 네 덕에 환자 살 것 같다.”
“내 덕은 무슨. 지훈이 너 아니었으면 환자 오늘 밤을 넘기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요새 니네 과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더라. 무슨 일 있어?”
일반 외과와 내과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래서 그런지 공정식도 외과 분위기가 살벌하다는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정갑수가 생각나자 가슴이 답답해진 김지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정갑수가 문제라고 해도 말을 해 봤자 내 얼굴에 먹칠하는 거나 똑같지.’
“별일 없다.”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짓던 공정식이 30분이 넘도록 환자 상태를 함께 살폈다. 김지훈과 함께 환자가 안정되는 것을 확인한 후 피곤에 찌든 모습으로 중환자실에서 나갔다.
상당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환자의 바이탈이 안정적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호흡이 안정돼 기관에 삽입된 튜브를 빠르게 뺄 수 있기를 바랐다.
‘오늘부터 꼼짝없이 킵이네.’
“간호사, 미안한데 5시에 나 좀 깨워 줘요.”
“걱정하지 마시고 주무세요.”
기지개를 펴며 목을 돌리던 김지훈이 중환자실 안에 있는 당직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당직 인턴들이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남은 침대에 조용히 몸을 눕힌 김지훈도 곧 잠에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