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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72화 (172/1,329)

제1화 경쟁의 의미 Ⅰ (2)

언제 나타났는지 정갑수가 드레싱까지 마치고 스테이션에 막 앉고 있었다. 신현수도 어이가 없는지 잔뜩 화가 난 눈으로 정갑수를 노려보았다.

“갑수 형, 어디 있었어? 내일 수술 스케줄 챙길 사람이 형 아냐? 우린 스케줄 내느라고 지금까지 뛰어다녔는데 벌써 드레싱까지 끝냈다는 게 말이 돼? 왜 형이 할 일을 우리한테 떠넘겨?”

“미안해, 인마. 내가 오늘 일을 할 기분이겠냐? 마음 같아서는 당장 때려치우고 싶으니까 이 정도는 네가 이해해라.”

그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김지훈이 주먹을 쥐고 정갑수 앞에 섰다.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이렇게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정갑수,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뭐? 너 지금 정갑수라고 했어?”

“그래. 정갑수라고 했다. 네가 1년차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정갑수가 주먹이라도 쥐면 한바탕 싸움이 날 상황이었다. 신현수도 아무 말 없이 정갑수만 노려보았다. 그때 의국에서 나오던 유석재가 인상을 쓰며 김지훈을 불렀다.

“김지훈, 신현수, 잠깐 나 좀 보자. 정갑수 선생, 최철한 선생님이 찾으니까 의국으로 들어가 봐요.”

김지훈이 정갑수를 노려보며 신현수와 함께 유석재를 따라 병동 준비실로 들어갔다.

“김지훈, 신현수.”

“예, 선생님.”

한동안 김지훈을 보던 유석재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정갑수 선생하고 붙지 마라. 어쨌든 동기야. 만일 너희들끼리 싸움이라도 나면 의국 분위기는 완전히 끝난다. 3년차 선생님들은 물론이고 나도 용서 못해. 정갑수 선생을 혼내는 건 니들이 아니라 우리가 할 일이야.”

입술을 깨물던 신현수가 의외의 말을 했다.

“선생님, 그렇다고 해도 오늘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수술 스케줄 못 낼 뻔했습니다. 지훈이가 아니었다면 나라도 나섰을 겁니다.”

“알아, 인마. 근데 이게 의국이야. 동기들끼리 문제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주먹질은 절대 용납 못해. 마음에 안 든다고 싸운다면 정갑수로 끝날 것 같아? 다른 1년차들은 네 마음에 쏙 들어? 신현수, 넌 이미 비슷한 경험이 있잖아.”

김지훈은 이번에 처음으로 동기들과 함께 일을 했다. 그 탓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비슷한 경험이라니 그사이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단 말인가?

신현수가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일석하고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땐 언성만 높인 것으로 끝나 지나갔지만 주먹이 오고 갔으면 너까지 문제가 됐을 거야. 그렇게 하니까 마음이 편하든?”

“아니요. 솔직히 며칠간 서로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일도 힘들어지고 마음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거야.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4년을 같이해야 하는 사람이 동기야. 말로 싸울 수는 있어도 주먹질은 안 돼. 그리고 막말로 정갑수 때문에 징계위원회에 넘어가고 싶어? 솔직히 말해서 만일 정갑수가 지훈이나 너한테 맞으면 가만히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신현수가 아니라 김지훈에게 하는 말이었다. 신현수가 당사자라면 정갑수는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김지훈이라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1년차인 김지훈이 만일 폭력으로 징계를 받게 된다면 앞날에 큰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유석재가 김지훈의 어깨를 잡았다.

“오늘 정갑수가 잘못한 일은 우리가 해결할 거야. 그래서 의국이 있고 선배들이 있는 거야. 알았어?”

“예, 선생님.”

“만일 정갑수가 또 이런 문제들을 터트려서 정말 가만히 두면 안 되겠다 싶으면 확실하게 해.”

“확실하게요?”

김지훈은 물론 신현수까지도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유석재가 씨익 웃었다.

“죽을 때까지 패든지 입 잘못 놀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해. 그럴 자신 없으면 참아. 1년차 생활도 5개월밖에 안 남았어. 2년차 되면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해도 전혀 문제가 없어. 알았지?”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유석재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마음 같아서는 내가 패고 싶어. 이번 일은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지나가. 그리고 니들 둘은 절대 싸우지 마라. 우리 과 기대주들이잖아.”

유석재가 김지훈과 신현수를 다독인 후 의국으로 들어갔다. 나직한 목소리가 오고 간 후 그날 밤 3년차들이 정갑수를 숙소로 불렀다. 다른 과 전공의들이 근처에 얼씬도 못할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 의국을 나온 정갑수가 밤새 씩씩거렸다.

한번 가라앉은 분위기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송재덕 과장이 정갑수를 볼 때마다 혀를 차며 못마땅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백무용 교수도 아닌 구영선 교수가 도리어 정갑수를 감싸면서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일이 터진 지 이틀도 안 돼 난데없이 정갑수에게 아뻬 수술까지 주면서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 자체로도 송재덕 과장에게는 화가 날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우연히 송재덕 과장은 물론 김지훈까지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를 모두 듣고 만 것이다.

“정갑수, 아버님은 잘 계시지?”

“예, 선생님.”

“요새 힘들겠지만 마음 다잡고 열심히 해.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금경태 과장님도 꽤 신경을 쓰시더라. 아버님께 안부 전하고. 알았지?”

“예, 선생님.”

금경태 과장이나 보건복지부 고위 공무원인 정갑수의 아버지를 거론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천안을 뜰 궁리를 하고 있는 구영선 교수가 두 사람을 언급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였다.

구영선 교수가 아예 대놓고 등을 내보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2~3일 내에 평상시로 돌아왔을 송재덕 과장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다.

의국 전체에 찬바람만 휭휭 불었다.

야야 소리가 터진 지 사흘째 되던 날 밤이었다.

거의 11시가 넘은 시간에 김지훈이 소화기 파트를 돌고 있는 내과 1년차의 전화를 받았다. 환자가 무지무지하게 많아 외과 1년차 이상으로 힘들다는 소화기 파트를 정말 뛰어나게 돌고 있는 동기인 공정식이었다.

“어! 정식이구나. 무지하게 바쁠 텐데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고 웬일이야?”

“지훈아, 미안한데 지금 시간 있으면 환자 한 명만 봐 줘.”

“나 오늘 오프야, 인마. 아직 차팅할 것도 남았어. 그리고 나도 너랑 똑같은 1년찬데 나한테 무슨 환자를 봐 달래. 정식으로 컨설트를 내.”

“미안해. 사정이 그렇게 됐다. 어젯밤에 응급실로 온 환잔데 그때 현수가 먼저 봤어. 외과적인 문제는 없다고 했는데 뭔가 느낌이 안 좋아. 우리 과 배 같지가 않거든. 컨설트도 이미 내긴 했고. 근데 내일이나 돼야 볼 수 있을 거 아냐. 환자 상태가 안 좋아서 기다리기가 좀 그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현수 정도면 최소한 외과 배인지 내과 배인지 정도는 확실하게 구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공정식의 목소리가 여간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도움이 될까?”

“일단 한 번만 봐 줘. 가끔은 3년차 선생님들이라고 해도 놓칠 때가 있잖아. 미안한데 빨리 중환자실로 좀 와라.”

“중환자실?”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라면 1년차가 함부로 볼 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환자를 보지도 않고 2년차에게 바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일단 환자 상태라도 보고 애매모호하면 그때 노티를 하는 것이 순서에 맞는 일이었다.

“알았어. 지금 바로 내려갈게.”

‘일복을 타고났나. 평일 오프는 꼬박꼬박 가서 좋다고 했더니 내과 동기 놈까지 다 방해를 하네. 그래도 그동안 스케줄 때문에 신세진 게 많으니까 일단 가 보자.’

김지훈이 다소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중환자실로 향하며 입맛을 다셨다. 중환자실에 들어서자마자 내과 동기인 공정식이 반가운 눈빛으로 김지훈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훈아, 이 환자야.”

69세 여자 환자로 이름은 김복남이었다.

환자를 본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의식은 다소 흐릿해 보였고 코 줄은 물론 소변 줄에 모니터에 연결된 줄까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게다가 3세대 항생제까지 병합 요법으로 투여되고 있었다.

“설마 패혈증이야?”

“응. 보호자 말로는 배가 아픈지 며칠 안 됐다는데 올 때부터 상태가 안 좋았어. 패혈증의 원인을 모르겠네.”

“니네 과 진단은 뭐야?”

“패혈증에 마비성 장 폐색하고 스테로이드 중독이야.”

중환 중에 이런 중환은 없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1년차가 보기에는 확실하게 무리였다. 그래도 노티를 제대로 하려면 기본 정보는 알고 있어야 했다.

“스테로이드 중독이라니?”

“골관절염이 엄청 심한 환자야. 무릎 변형된 것 좀 봐.”

환자를 덮고 있던 얇은 천을 올리자 앙상하게 마른 다리가 드러났다. 공정식 말대로 관절 변형이 무척 심했다.

“스테로이드를 얼마나 복용했어?”

“10년도 넘은 것 같아. 보호자가 가져온 약을 확인했는데 통상 용량의 두 배였어. 혈액 검사 결과에서도 강력하게 스테로이드 중독이 의심돼. 아무리 시골 할머니라고 해도 그렇지 무슨 생각으로 약을 이렇게 썼는지 몰라.”

공정식의 한숨이 깊어졌다.

스테로이드 제제는 출시 당시 기적의 명약이라 부를 정도로 각광을 받았다. 면역 억제 및 항염 작용이 탁월해 알레르기성 질환이나 관절염은 물론 면역 이상 질환에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뿐만 아니라 장기 이식 환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약제였다. 하지만 모든 약은 오남용에 따른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노인들이 앓는 만성적인 골관절염에서 문제가 컸다. 효과가 탁월하다 보니 일반 소염 진통제로 잘 듣지 않는 경우 흔히 스테로이드를 투여했다.

물론 신중하게 용량을 조절하면 이보다 좋은 효과를 가진 약도 없었다. 그러나 과다한 용량을 장기적으로 쓰다 보면 위염이나 위궤양부터 면역 저하에 따른 부작용까지 광범위한 문제를 유발했다.

더구나 이 환자의 경우 의원이 없는 시골에 살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의사 대신 간호사들이 근무하는 보건진료소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오지라는 명목하에 설립된 보건진료소였지만 태생적으로 문제가 많은 기관이었다.

물론 순기능도 있다. 하지만 역효과도 만만치 않아 스테로이드 제제 등을 효과가 좋다고 마구 투여하는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 전체에 비하면 극히 일부라고 해도 환자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여기에 약사나 의사들도 한몫했을 것이다. 시골에서 소문난 약국일수록 스테로이드를 과다하게 조제하는 경향이 심했다. 의사들 역시 지속적으로 내원하지 않았으면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동일 약제를 처방하고 투약했을 것이다.

결국 의사와 약사, 그리고 보건진료소의 간호사들이 환자 한 명을 최악의 상황에 빠트린 것이다. 누구의 책임이 더 큰지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의료 체계의 근본적인 문제부터 공중 의료의 파행적인 운영과 경제적인 욕심까지 다양한 요소가 있을 것이다.

(시골에 존재하는 보건진료소는 독립채산제라는 이름하에 보건소의 관리 감독마저 제대로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행정상의 문제만 없다면 환자에게 어떤 약을 얼마나 투여하는지조차 감독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지금은 그러한 문제가 많이 개선됐기를 바라며 못살고 못 먹던 시절에 만들어진 보건진료소 문제가 시대에 맞게 개선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막 의사가 돼 바로 전공의 과정을 밟은 경우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의사가 없는 곳일수록 오남용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김지훈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환자 사진부터 보자.”

흉부 사진상 복막염의 주요 진단 지표인 장 밖으로 빠져나온 프리에어(free air)는 보이지 않았다. 복부 CT를 보니 복강 내에 복수가 가득 차 있었다. 복수가 생기는 경우는 많았다. 이것만으로 외과 질환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사진만으로는 우리 과 문제인지 잘 모르겠네.”

“그치? 복수 말고는 특별하게 보이는 게 없어. 의외로 간도 깨끗하고 말이야.”

공정식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은 방법은 환자의 반응과 손에 전해지는 느낌뿐이었다.

한참 동안 복부 청진을 했지만 장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복막염에 합당한 소견이었다. 마비성 장 폐쇄라면 증상이 아주 심해져도 미약하게나마 장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었다.

‘복막염인가? 그럼 현수가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고개를 갸웃거린 김지훈이 복부 촉진을 했다. 복막염이라면 나무처럼 딱딱해야 할 배가 말랑말랑한 정도가 아예 힘이 없었다. 장 폐쇄라고 해도 배를 누르면 통증 때문에 힘을 주기 마련이었다. 이것이 도리어 김지훈에게는 의문이었다.

‘확실히 이상해. 환자 몸이 너무 안 좋아 통증에 반응을 못하는 건가?’

살며시 눈을 감고 신중하게 복부 촉진을 계속했다. 여기저기를 누르며 통증에 대한 반응을 느끼고자 애를 썼다. 10분이 지나도록 배만 만지고 있자 공정식이 답답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지훈아, 뭐 의심되는 거라도 있어?”

김지훈이 잠깐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며 환자의 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자 뭔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충분한 시간 간격을 두고 깊숙이 누르자 환자의 배에 미세하세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통증에 반응하는 순간 김지훈이 빠르게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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