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경쟁의 의미 Ⅰ (1)
최철한이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이틀 전에 정갑수가 이미 같은 환자를 봤다는 것을 안 것이다. 환장할 일이었다.
“아! 정말 죽겠네. 갑수 이 새끼를 죽여, 살려. 석재야, 지훈아, 과장님 눈에 응급실 차트 안 띄게 맨 밑으로 빼. 이런 환자 놓친 거 아시면 100프로 야야 소리 나온다.”
일단 혼이야 정갑수가 나겠지만 야야 소리가 나오면 전 파트의 분위기가 험악해질 것이 빤했기 때문이었다. 의국장인 최철한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이었다. 유석재도 한숨을 쉬며 응급실 차트를 밑으로 빼며 김지훈을 보았다.
“지훈아, 혹시 모르니까 정갑수 선생한테 며칠간 과장님 조심하라고 해.”
“예, 선생님.”
응급실에서 올라온 김지훈이 자고 있는 정갑수를 보았다.
세상모르고 잠에 빠진 모습이 한심했다. 마구 흔들며 깨워도 눈을 뜨지 않았다. 정말 피곤해 잠에 취한 것인지 김지훈이 깨워서 그런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 인간 정말 태평하네. 마음 같아서는 응급실 차트를 없애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난리 날 테고. 제발 걸리지만 마라.’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에 김지훈이 이마를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갑자기 고경아 생각이 났다.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본 김지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새벽 1시였다.
이래저래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드레싱을 하던 중 제일 늦게 나온 정갑수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갑수 형, 잠깐만.”
“바빠 죽겠는데 왜?”
가는 말이나 오는 말이나 다 곱지 않았다.
그간의 일을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김지훈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젠 정갑수가 변하기 전까지는 대우를 하지 않겠다고 확실하게 마음을 먹었다.
‘일은 지지리도 안 하면서 바쁜 척은.’
김지훈이 불만 섞인 눈으로 째려보며 말했다.
“응급실에서 그저께 항문 출혈로 온 환자 기억나?”
“그런 환자가 있었나? 그런데 왜?”
“아니, 어떻게 자기가 본 환자도 기억을 못해? 하여튼 그 환자 치질이 아니라 직장암이 의심되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최철한 선생님이 혹시 모른다고 과장님 조심하래.”
“뭐? 직장암이라고? 씨펄! 진짜야? 정말 과장님 앞으로 입원했어?”
“그럼 환자를 두고 없는 말 하겠어?
정갑수야말로 송재덕 과장이 언제 화를 내는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일을 안 하는 만큼 눈치라도 빨라야 혼을 덜 나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허옇게 변한 정갑수를 보던 김지훈이 코웃음을 치고는 결정타를 던졌다. 물론 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긴 했지만 그 여파가 정갑수에게만 미치진 않을 것이다.
“야야 소리 나온대. 걸리면 죽는 거야.”
참 매정하고 나쁜 말인데 왜 웃음이 나올까?
이젠 동기를 떠나 악어보다 더 싫었다.
어차피 잘해 주나 못해 주나 일 펑크 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더욱 환자를 이따위로 보는 정갑수와 친해질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김지훈이 처음으로 사람을 상대로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고 있었다.
송재덕 과장이 회진을 돌기 위해 병동으로 올라왔다.
항상 웃는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아예 무슨 경사라도 난 것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직장암 환자 때문에 모두들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그래, 지훈이구나. 흐음! 김지훈, 의료 봉사 언제 갔었어?”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의료 봉사요?”
“어제 봤다. 잘 나왔더라. 허허! 김지훈, 언제 간 거야?”
송재덕 과장도 방송을 본 모양이었다. 최철한과 유석재는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전공의들은 티브이하고는 거의 담을 쌓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연차를 불문하고 잠을 자는 것이 나았다.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휴가 때 잠깐 갔다 왔습니다.”
“휴가 때? 허허! 네가 지훈이구나. 허허! 잘했다. 잘했어.”
송재덕 과장이 계속 웃음을 터트렸다. 와과 계열에서 1년차 중에 의료 봉사를 가는 사람이 아주 드물기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반응이었다. 사실 마이너 과 전공의들에게서는 간간이 보는 일이기도 했다,
‘이준영이하고 함께 잘 나왔더라. 이거 아주 괜찮은 놈이야. 허허! 1년차 하면서 봉사까지 가? 나도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준영이 마음이 돌아올 만도 하네.’
최철한이 의아한 눈으로 김지훈을 보다 말고 이때다 싶은지 신환 차트를 내밀었다.
“어젯밤 응급실에서 직장암이 의심되는 환자가 내원했습니다. 출혈이 꽤 심해 일단 과장님 앞으로 입원시켰습니다.”
“직장암? 보자. 보자.”
위장관 파트를 맡고 있으면서도 송재덕 과장이 반색을 했다. 원칙대로 하면 수술을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 지금이라도 대장 파트를 맡고 있는 구영선 교수에게 환자를 넘기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송재덕 과장은 전혀 그럴 의사가 없어 보였다. 둘 간의 사이가 정말 안 좋다는 방증이었다.
“대장 내시경과 복부 CT 시행하겠습니다.”
“그래그래. 추가 출혈이 있는지 잘 보고, 알아서 해.”
차트를 뒤적이며 최철한의 노티에 귀를 기울이던 송재덕 과장이 갑자기 손을 멈췄다. 아직 검사도 하지 못했기에 신환 차트가 무척 얇았다. 그 탓인지 하필이면 맨 밑에 꽂아 두었던 응급실 차트를 딱 펼치고 있었다.
“뭐야? 왜 응급실로 두 번이나 왔어?”
하루 이틀 차트를 보고 사는 것이 아니었다. 한눈에 응급실 차트가 두 개라는 것을 알아본 송재덕 과장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미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아챈 것 같았다.
그때 마침 백무용 교수 회진을 마치고 온 정갑수가 스테이션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정갑수가 슬며시 등을 돌리자 송재덕 과장이 소리를 질렀다.
“정갑수! 너. 너 이리 와.”
“예?”
흠칫 놀란 정갑수가 얼굴이 하얘진 채 주춤주춤 다가왔다.
송재덕 과장이 응급실 차트를 손으로 탁탁 치며 물었다.
“뭐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송재덕 과장의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했다.
정갑수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스테이션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전공의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백무용 파트 2~3년차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송재덕 과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차트만 가리키며 정갑수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야야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최철한이 눈을 부라리며 솔직하게 말하라고 눈짓을 했다.
‘핑계 대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잠시 최철한과 송재덕 과장의 눈치를 본 정갑수가 머리를 굴렸다. 환자를 제대로 진찰하지도 않았고 설명까지 안 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다가는 큰 사달이 날 것이 분명했다.
‘씨펄! 환자 한 명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설마 차트만 보고 내가 설명을 안 한 것까지 알지는 못하겠지.’
“그게요. 항문 출혈로 온 환잔데 응급실에서는 특별히 해 줄 것이 없어서 외래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응급실로 다시 온 것 같습니다.”
“항문 검사는 했어?”
정갑수가 순간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옆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했다고 한들 거짓말인지 알 도리가 없을 것이라 여겼다.
“환자가 거부했습니다.”
“거부했어? 그럼 설명은 제대로 했어?”
같은 말을 반복하는 송재덕 과장 특유의 말투가 사라졌다. 뭔가 확실하게 잘못되고 있었다. 최철한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정갑수에게 입만 벙긋거렸다.
‘솔직하게 말해, 이 새끼야. 제발. 솔직하게. 그냥 잘못했다고 하든지.’
눈치로만 따지면 정갑수가 가장 뛰어날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부르는 법이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할 생각뿐이었다.
“예. 검사도 권유했고 설명도 했습니다.”
정갑수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자 송재덕 과장이 응급실 차트를 다시 확인했다. 잠도 못 자고 일을 하는 1년차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였다. 하지만 환자에 대한 거짓말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 차트를 열심히 봤다면 거짓말을 할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송재덕 과장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급하기만 한 사람이었다면 혹시 통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의사들의 말 한마디까지 모조리 기록하는 간호 기록지가 있었다.
“확실해?”
“예. 확실히 했습니다.”
‘이 자식이 거짓말을 해?’
송재덕 과장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야야야야야!”
터졌다.
공포의 야야 소리가 터졌다.
치프인 3년차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1~2년차들은 아예 석상처럼 굳었다. 송재덕 과장의 옆에 서 있던 김지훈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스테이션에 앉아 일을 하며 눈치를 보던 간호사들까지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정갑수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송재덕 과장이 구둣발로 냅다 조인트를 깐 것이다. 양쪽을 다 찼는지 정갑수가 무릎을 꿇은 채 절절 맸다. 송재덕 과장이 정갑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이놈의 자식이 나한테까지 거짓말을 해. 못된 놈의 자식. 내 이놈을 당장……. 치프들 다 의국으로 들어와!”
송재덕 과장의 목소리가 스테이션을 넘어 복도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최철한을 비롯해 3년차 세 명의 얼굴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채 의국으로 들어갔다.
난리가 났다.
“치프들이 뭐 하는 거야? 1년차 교육 똑바로 안 시켜? 환자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놈이 어떻게 환자를 제대로 보겠어? 니들 3년차라고 어깨에 힘만 주고 다닐 거면 다 그만둬.”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최철한, 넌 의국장이야. 똑바로 해. 아니면 옷 벗든지.”
“죄송합니다, 과장님.”
“이게 죄송하다는 말로 끝날 일이야? 거짓말하는 새끼가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야. 어디 이노무 자식이 거짓말을 해. 니들도 다 똑같은 놈들이야.”
치프들은 잘못했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한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송재덕 과장이 거칠게 문을 열고 나왔다. 정갑수가 송재덕 과장의 눈을 피해 스테이션 안으로 몸을 숨겼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제라도 달려가 잘못을 구해야 했다. 못마땅한 눈으로 전공의들을 본 송재덕 과장이 인상을 쓰며 수술 방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의국에서 나온 최철한이 정갑수를 찾았다.
“정갑수, 어디 있어?”
정갑수가 그제야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너 이 새끼, 수술 끝나고 봐. 거짓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 대놓고 거짓말을 해. 개새끼. 오늘 둘 중에 하나 옷 벗자, 이 씨발 놈아.”
얼마나 화가 났는지 좀처럼 욕을 하지 않던 최철한이 연달아 욕을 내뱉었다. 씩씩거리며 정갑수를 보던 최철한이 김지훈과 신현수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니들은 뭐 해? 수술 준비 안 할 거야?”
김지훈과 신현수가 후다닥 수술 방으로 뛰어 내려갔다.
최철한이 수술 방에 내려오고 나서도 한동안 병동 의국이 시끄러웠다. 수술이 없는 3년차가 정갑수를 불러다 놓고 쥐 잡듯이 잡았다. 정갑수도 나이가 많은 난킴(예비역) 출신 3년차 앞에서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수술실이 살얼음판이었다.
손만 빠를 뿐 하루 종일 웃으며 수술을 이끌었던 송재덕 과장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최철한은 물론 김지훈도 어서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나마 오늘따라 전체 수술 건수가 적어 양방을 일찍 벌렸다. 오후 4시쯤 수술이 모두 끝났을 때 김지훈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럴 땐 잽싸게 움직이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만에 하나 오늘 해야 할 일 중 하나라도 펑크가 나면 자칫 모든 화살이 집중될 수도 있었다.
재빨리 오더를 내고 병동으로 올라갔을 때 신현수가 다급한 얼굴로 의국을 나오고 있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현수야, 또 무슨 일 있어?”
“내일 수술 스케줄 빵구 나게 생겼어.”
“뭐? 정갑수는 어디 갔는데?”
“몰라. 아까부터 안 보여. 방송도 안 받고.”
수술 스케줄을 제 시간에 못 낸다면 1년차들에게 이보다 더한 악몽은 없었다. 정갑수만이 아니라 김지훈과 신현수까지 치프들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야 할 판이었다.
스케줄을 낼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천만다행으로 제 시간에 스케줄을 제출할 수 있었다.
온몸에 힘이 쪽 빠질 지경이었다.
‘정갑수, 이 씨! 정말.’
눈앞에 있었으면 대판 싸웠을 것이다. 서울에서처럼 옥상으로 끌고 올라가 죽을 때까지 패 주고 싶었다.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병동에 들어선 김지훈이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