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70화 (170/1,329)

제11화 누구에게나 배울 것이 있다 (2)

“이런, X 같은 새끼가 정말.”

김지훈이 인상을 확 구겼다.

아무리 학교 선배라지만 결코 물러나서는 안 될 때였다.

“한 번만 더 욕하면 그땐 안 참아. 작년에 서울에서 있었던 일 벌써 잊어 먹었어?”

얼굴이 시뻘게진 정갑수가 주먹을 쥐며 이를 갈았다.

“너, 이 개새끼. 내가 정말 가만 안 둔다. 너처럼 버릇없는 새끼는 확실하게 죽여 놓는다.”

김지훈이 코웃음을 쳤다.

“왜, 또 아버지 찾으려고? 마음대로 해.”

결국 정갑수가 고래고래 악을 쓰며 쉬지 않고 욕을 해 댔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의국을 나갔다.

‘그냥 확 팰 수도 없고. 저런 인간은 아예 상대를 안 하는 게 답이다.’

“너 이 씨팔 놈, 두고 봐. 가만 안 둔다.”

하도 시끄럽게 욕을 해 대자 신현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갑수 형, 일하게 조용히 좀 해. 간호사들도 다 들을 텐데 창피하지도 않아?”

“너까지 왜 이래. 김지훈 저 새낀 내가 언젠가 반드시 죽여 놓는다.”

이제야 조용해졌다. 역시 정갑수는 신현수에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더 강한 배경을 가진 신현수와는 얼굴을 붉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정갑수 탓에 더욱 일이 많아졌다. 수술 스케줄을 챙기는 것처럼, 딱히 누구 한 명에게 국한되지 않은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수술실에서 나온 김지훈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실실 웃으며, 수술 스케줄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아야 할 컨설트를 못 봤다고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김지훈 파트 환자 문제만 쏙 빠트렸다.

‘정갑수, 넌 참 인간 되려면 멀었다.’

절대 정갑수가 원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은 점이 있었다. 가장 가까워야 할 과인 내과와 마취과의 전공의는 물론 스태프들과도 친해지는 계기가 됐다.

늦은 시간에 컨설트를 보러 오는 탓에 처음에는 싫은 기색이 역력했었다. 하지만 볼 때마다 항상 숨을 헐떡거리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결국은 웃고 말았다.

“김지훈, 또 왔어? 이번에는 또 뭐야? 누가 자꾸 이렇게 빵꾸를 내. 너도 참 힘들겠다.”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다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다른 과의 사정이라고 해도 병원은 좁은 사회였다. 누가 열심히 하고, 누가 게으른지는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병동과 수술실, 그리고 응급실을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났다. 중환자실에 환자라도 두셋 누워 있으면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신현수는 갈수록 지쳐 갔고, 가장 많이 자는 정갑수는 뭐가 그렇게 피곤한지 아예 눈을 감고 다녔다. 김지훈도 피곤에 절은 모습이었지만 어떨 때는 구미보다 도리어 상태가 나아 보였다. 희한한 일이었지만 정말 잠시뿐이었다. 김지훈도 이젠 시도 때도 없이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회진이 길어지면 선 채로 눈을 감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환자와 수술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물론 수술 도중에도 툭하면 졸기는 했지만, 그쯤은 누구나 봐줄 수밖에 없는 정도였다.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신현수보다 더욱 열성이 넘쳤다.

사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있는 오프 덕이기는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원인은 신현수였다. 구영선 교수가 신현수에게 2년차만큼이나 자주 수술을 주었던 것이다.

‘역시 백이 있는 게 좋긴 좋구나. 부럽긴 하다만, 선배들의 눈치도 그렇고, 꼭 좋은 일만은 아니네. 그래도 수술을 자주 하는 네가 부럽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자극인데, 우연히 신현수가 수술을 하는 것을 보고는 충격까지 받을 정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차적으로 정확하게 아뻬 수술을 진행하고 있었다. 정말 기계적이라고 할 만큼 깔끔했다. 불과 30분 만에 수술을 끝낸 신현수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멍한 눈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신현수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구영선 교수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고, 그게 당연한 소리처럼 들렸다. 수술만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현수 역시 김지훈만큼 이를 악물고 일을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출발했을 때부터 이미 벌어져 있던 차이를 극복하려면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었다.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날 수도 없었다. 투지처럼 강렬한 자극이 김지훈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자. 수술실에서 졸지 말고, 리포트 잘 쓰고, 틈틈이 공부도 하자. 난 할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김지훈이 눈에 불을 켰다. 오프 때는 확실하게 휴식을 취했지만 그 외에는 오로지 일만 생각했다. 고심 끝에 고경아에게도 전화를 걸어 당분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유가 뭐죠?)

“그럴 사정이 있어요. 천안이 생각보다 무척 바쁘네요. 주말 오프도 3주에 한 번뿐이고, 중환자실 환자도 많고, 응급 수술도 많아서…….”

김지훈이 말꼬리를 흐리자 고경아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나직한 숨소리만 들렸다.

(전화도 못 해요?)

“가능한 한 전화는 자주 할게요.”

(알았어요.)

꼬치꼬치 이유를 물어볼 만도 했지만 별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순간 괜히 전화로 엉뚱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너무 미안했지만 언젠가는 이유를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동기 놈을 이기기 위해 못 만난다고 하긴 좀 창피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네요. 미안해요, 경아 씨. 내년에는 시간이 꽤 날 테니까 그때 자주 봅시다.’

신현수도 김지훈을 의식하는지 긴장을 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2명의 1년차가 서로를 보며 자신의 미래를 위해 달려가고 있었다.

“허어! 김지훈. 음! 네가 김지훈이지.”

“음! 현수구나, 신현수.”

2주가 지나도록 송재덕 과장의 입에 김지훈과 신현수의 이름이 붙어 다녔다. 그만큼 흡족하다는 말이었다. 분위기가 너무 좋아 최철한과 유석재도 싱글벙글 웃고 다녔다.

마음에 들어 하는 티를 팍팍 내면서도 김지훈에게는 수술의 수 자도 꺼내지 않았다. 신현수는 그새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마음이 편하면서도 답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콜을 받고 응급실에 내려간 김지훈이 얼굴을 붉혔다. 간호사들이 빤히 얼굴을 보며 갑자기 의료 봉사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이다.

“김지훈 선생님, 혹시 음성에 있는 사랑원에 의료 봉사 가시지 않으셨어요?”

“의료 봉사요? 왜요?”

“어젯밤에 MBS에서 사랑원이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했는데, 거기서 선생님이 나오던데요.”

깜짝 놀란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요?”

“덩치다 되게 큰 선생님하고 함께 환자를 보시던데요? 옆에 예쁜 간호사도 한 명 나오고. 난 음성 병원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그렇게 예쁜 간호사가 있었어요?”

공연히 쑥스러워진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훈철이 형도 참! 나는 빼고 방송을 해야지. 남들 다 가는 의료 봉사 간 게 뭐가 대단한 일이라고, 창피하게. 경아 씨가 여자들 눈에도 예쁘긴 예쁜 모양이네.’

문득 기분이 좋아지면서 의료 봉사 때 본 고경아의 미소가 떠올랐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솟구쳤다. 환자를 본 후 바로 전화라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뭐, 그런 일이 있었나 보죠. 환자는 어디 있어요?”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낫네요. 얼굴이 인형처럼 작아야 잘 나온다더니 정말 그런가 봐요.”

“지금 나보고 큰 바위 얼굴이라는 하는 거죠?”

“어머! 그럴 리가요.”

간호사가 까르르 웃으며 환자에게 안내를 했다.

항문 출혈을 주소로 내원한 50대 중반의 남자 환자였다. 응급실 차트를 보니 이틀 전에 정갑수가 이미 본 환자였다.

‘정갑수, 완전 바닥인 줄 알았는데 치질 임프레션(가 진단)하에 검사 및 외래 방문 권유까지 다 설명했네. 그래도 기본은 하는구나.’

내심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환자를 보던 김지훈은 구미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정갑수답게 항문 출혈 환자에게는 기본 중의 기본인 직장 수지 검사를 하지 않은 것이다. 솔직히 경험이 없거나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환자분, 저 역시 치질이 의심됩니다. 하지만 다른 경우를 대비해서 항문 검사를 할 겁니다. 불편하셔도 조금만 참아 주세요.”

장갑을 끼며 준비를 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자의 혈색이 다소 창백했다.

“피가 많이 나왔나요?”

“예. 매일 아침 변기가 피바다예요.”

“언제부터 그렇게 출혈을 했죠?”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됐는데 심해진 건 한 2주 정도요?”

증상이 꽤 심했다. 빈혈까지 생겼다면 수술을 빨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외관만으로는 빈혈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혈액 검사를 권유해야 했다.

“그런데 왜 외래로 오지 않으셨어요? 최소한 빈혈 검사를 하자는 말을 못 들으셨나요?”

“외래하고 검사요? 아니요. 치질이 의심된다는 말 말고는 다른 설명은 전혀 못 들었습니다. 간호사가 약을 주길래 괜찮은가 보다 하고 그냥 집으로 갔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중에 문제가 생길까 봐 기록은 해 두고 정작 환자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일의 선후가 바뀌어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정갑수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혼나지 않으려고 수련을 받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야. 이러다 진짜 사고 치는 거 아냐? 개새끼, 너 때문이 아니라 환자 때문에 사고 안 나기를 빈다.’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찬 김지훈이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일단 항문 검사부터 하고, 혈액 검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일 빈혈이 심하게 발생했다면 약이나 좌욕 같은 대중 요법으로는 치료가 안 됩니다. 수술을 하셔야 합니다.”

환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수술이요? 치질 수술을 하면 엄청 아프고 입원까지 해야 하지 않나요? 시간이 만만치 않은데 꼭 해야 합니까?”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이삼 일 정도는 입원하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이 정도 증상이면 경증은 아니거든요. 그럼 일단 검사부터 하겠습니다.”

김지훈이 환자를 모로 누이고는 새우등을 만들게 했다.

항문에 손가락을 넣자 빡빡한 느낌이 전해졌다.

환자가 아프고 불편한지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3~4센티미터 정도 집어넣자 직장 부분에 도달하며 손가락에 여유가 생겼다. 배 쪽에 위치한 전립선을 확인하고 손가락을 돌려 가며 장을 촉진했다. 등 쪽을 만지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이거 뭐야? 치질이 아니네.’

상당히 단단하고 표면이 울퉁불퉁한 덩어리가 만져졌다. 항문 입구에서 불과 7~8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부위였다. 이 부위에 딱딱하고 거친 종양이 있다면 거의 100프로 직장암이었다. 다른 경우는 떠올릴 수도 없었다.

김지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암이 맞다면 일이 주 정도 치료가 지연된다고 해서 예후에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의사의 입장이지 환자에게는 하루가 급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에 처음 내원했을 때 최소한 기본 검사는 반드시 시행했어야 했다. 만에 하나 김지훈까지 기본을 무시했다면 정말 치명적인 문제를 만들 뻔한 것이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기본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정갑수 개새끼. 환자를 이따위로 보냐. 치질인 줄 알고 왔다가 직장암이 의심된다는 소리를 들으면 충격이 클 텐데, 이 환자는 또 어떻게 하지? 후우!’

속으로 정갑수에게 냅다 욕을 한 김지훈이 당직이었던 유석재에게 노티를 했다. 곧 최철한과 함께 응급실로 내려와 환자를 보고는 즉시 입원을 권유했다.

환자에게 여러 가능성을 설명하면서도 굳은 안색을 풀지 못했다.

암 환자는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진단을 위해서라면 외래를 통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환자의 경우는 다르게 접근해야 했다. 암 덩어리에서 발생한 출혈은 대량인 경우가 많고, 잘 멈추지도 않기 때문에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직장암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환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결정을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대개 환자들이 그렇듯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환자가 결정하기를 기다리던 최철한이 한숨을 쉬었다.

“에휴! 응급실에 와서 암이 의심된다고 들었으니 환자에겐 날벼락이 따로 없네. 그건 그렇다고 해도 하필이면 과장님 당직 날에 직장암이 의심되는 환자가 오냐. 구영선 선생님한테 또 싫은 소리 듣겠어.”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도 과장님 앞으로 입원시켜야죠.”

옆에 있던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선생님,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지훈아, 너는 회진 돌면서 그 미묘한 분위기를 아직도 못 느꼈냐? 환자는 잘 보면서 이런 문제에는 왜 이렇게 둔해.”

최철한의 말에 유석재가 김지훈을 보며 슬쩍 웃었다.

“에이! 1년차잖아요. 일하기 바빠 죽겠는데 그런 문제가 눈에 보이겠어요? 지훈아, 과장님하고 구영선 교수님하고 사이가 안 좋아.”

가만히 생각해 보니 회진 돌 때나 수술실에서 마주치면 둘 사이가 냉랭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송재덕 과장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는 구영선 교수의 모습이 어딘가 어색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생님, 두 분의 사이가 왜 안 좋은데요?”

“과장님은 천안 병원이 다라고 생각하시고, 구영선 교수님은 서울로 올라가려고 안달이 나셨어. 그래서 금경태 과장님에게 이거를 많이 하거든.”

최철한이 손을 비비는 동작을 보였다.

은근히 흥미가 동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요?”

최철한의 목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작아졌다.

“거기다 송재덕 과장님하고 금경태 과장님이 앙숙이야. 나이는 송 과장님이 많으시지만 트레이닝을 같은 해에 받았거든. 근데 서울 과장이라고 천안을 무시하고 누르려고 한다는 소리가 있어. 그러니 금경태 과장님에게 매달리는 구영선 교수님과 사이가 좋겠냐?”

같은 재단의 산하지만 3개 병원의 일반 외과는 각자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물론 전체가 관련된 일은 주로 서울이 주도했지만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왜 금경태 과장이 천안의 일까지 간섭하려 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최철한은 뭔가 더 짐작하고 있는 눈치였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전공의들이 추측만으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재수 없게 스태프들의 귀에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들어가기라도 하면 혼이 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문제이기도 했다.

때마침 환자가 입원을 결정했다.

다시 한 번 설명을 하고 오더를 보던 최철한이 욕을 내뱉었다. 응급실 차트가 2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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