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누구에게나 배울 것이 있다 (1)
아침 일과를 마치고 수술실로 간 김지훈은 위암에 대한 수술 기록지를 꺼냈다. 환자가 도착할 때까지 중얼거리며 수술 과정을 머릿속에 박았다.
첫 수술이 시작됐다.
마치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송재덕 과장의 수술은 엄청나게 빨리 진행됐다. 김지훈으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어제 응급실 근무로 거의 잠을 자지 못해 조금만 긴장을 늦춰도 눈이 감길 판이었다. 더구나 세컨드는 위치상 원래 수술 과정을 제대로 보기가 정말 힘든 자리였다. 수술까지 너무 빨라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간신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위와 임파선을 포함한 주변 조직이 제거됐다.
깜빡 졸음이 몰려온 김지훈은 야야라는 말을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잠을 쫓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는 사이 어느새 남은 위와 소장을 잇는 과정이 끝났다.
생리 식염수로 배 속을 세척하고 드레인을 박은 송재덕 과장이 장갑을 벗었다. 여기까지 불과 3시간이 채 안 걸렸다. 3년차 중에서도 수술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최철한에게도 벅찬 모양이었다. 수술 모자가 흠뻑 젖어 있었다.
“마무리하자, 마무리. 허허! 천천히 해, 천천히.”
‘엄청 빨리 수술하시고 마무리는 또 천천히 하라고 하시네.’
역시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천천히 하라는 말을 분명히 들었을 텐데 최철한이 평소 보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손을 놀리며 말했다.
“지훈아, 정말 빠르시지.”
“예. 손이 안 보이는 것 같아요.”
“나도 처음엔 그랬다. 이렇게 빨리 수술을 하는데 환자에게 거의 문제가 안 생기는 걸 보면 참 대단하신 분이야.”
한참 배를 닫고 있을 때 송재덕 과장이 슬며시 들어와 수술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허허! 거의 다 끝났네. 그래그래, 천천히 해, 천천히.”
생각을 해 보니 일요일 새벽에 비장 절제술을 할 때도 똑같은 말을 했다. 말에는 여유가 넘치지만 정말 급한 성격을 가졌는지도 몰랐다. 봉합사를 자르며 힐끗 송재덕 과장을 본 김지훈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급한 성격 때문에 수술까지 급하게 하는데 사고가 안 날 수가 있나? 그런데 과장님까지 되셨으면 최철한 선생님 말대로 실력이 대단하시다는 소리네.’
수술을 못하는 외과 의사가 과장 자리까지 오르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후배 모두 일반 외과 의사로서의 능력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인간성을 떠나 금경태 과장 역시 상당한 실력을 가진 의사라는 평판이 자자했다. 그렇다면 송재덕 과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워야 할 것이 무궁무진하다는 말이었다.
수술이 끝나고 환자를 이동 침대에 옮기는 김지훈을 보던 송재덕 과장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지. 수술은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해야 하지만, 끝난 후에는 이렇게 살살 조심스럽게 옮겨야지. 환자를 대하는 자세도 아주 좋아. 잘 배운 거냐, 아니면 원래 그런 놈이냐?’
“허어! 그래, 김지훈. 음! 김지훈. 수고해.”
김지훈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마음에 들어서 하는 소리라도 어색하기만 했다. 이름이 귀에 박힐 것 같았다.
곧 다음 수술 환자가 수술실에 도착했다.
똑같은 위암 환자였다. 암의 위치가 조금 다르다고 해서 수술 과정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뭔가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김지훈은 바짝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수술이 시작되는 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변했다.
송재덕 과장의 수술에서 세컨드란 자리는 정말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가뜩이나 수술을 보기 쉽지 않는 자리인데 너무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퍼스트인 최철한도 김지훈을 배려할 틈이 없었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좀처럼 송재덕 과장의 수술을 볼 수가 없었다.
‘아! 하나도 안 보여서 그런지 너무 졸리다.’
수술이 잘 보여도 하는 일이 단순해 졸린 자리가 세컨드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눈을 뜨고 있을 재간이 없었다.
김지훈이 눈짓으로 간호사를 불렀다.
찬물에 얼음까지 동원해 밀려오는 졸음과 사투를 벌였다. 졸면 죽는다는 말만 아니었으면 아마 초장에 포기하고 그냥 졸았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래, 수술에 들어왔으면 뭐라도 보려고 노력해야지. 이 교수 말대로 신현수보다 나은 면이 있네. 이런 열성이 이준영이를 다시 돌아오게 한 걸까?’
송재덕 과장이 번개처럼 손을 놀리면서도 힐끗 김지훈을 보며 웃고 있었다.
오후 4시가 넘어서 위암 수술 2개가 끝났다.
아직도 수술이 4개나 더 남아 있었다.
김지훈이 시간을 계산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후! 언제 다 끝나나. 아무리 수술을 빨리하셔도 8시는 넘어야 다 끝나겠네. 그럼 밥은 언제 먹고, 일은 또 언제 하지? 이래서 지옥이라고 하나?’
걱정도 팔자였다. 송재덕 과장이 괜히 과장일까?
이때쯤이면 수술실에 여유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철한아, 양방으로 돌리자.”
“예, 과장님. 지훈아, 환자 옮길 때 석재 빨리 내려오라고 연락해.”
김지훈의 귀가 번쩍 띄었다. 수술실 두 곳에서 동시에 수술이 벌어진다면 세컨을 면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갑자기 신이 나 힘이 팍팍 솟은 김지훈이 재빨리 유석재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2개의 수술이 동시에 벌어진다는 말이 아니었다.
세 번째 수술 환자의 배를 닫을 때가 되자 최철한에게 마무리를 맡긴 송재덕 과장이 유석재와 네 번째 수술을 시작했다. 마지막 봉합을 한 최철한이 김지훈에게 고갯짓을 했다.
“지훈아, 과장님 수술하시는 방으로 빨리 들어가.”
“예? 다음 환자는요?”
“그건 걱정하지 말고. 저쪽 수술 마무리할 때 여기서 다음 환자 수술 시작할 거야. 빨리빨리 움직여. 졸지 말고.”
착각이자, 오산이자, 절망이었다.
네 번째 환자의 수술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직전 세 번째 수술에 참여한 김지훈이 또 세컨드를 섰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지 김지훈의 어깨가 축 처졌다.
‘으아아! 난 몇 개를 하든 세컨드만 서는 거였구나. 아! 졸려. 배고파.’
그렇게 6개의 수술이 모두 끝났다. 점심도 못 먹었는데 시간이 벌써 오후 7시가 넘었다. 하지만 불평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최철한은 물론 송재덕 과장도 점심때 우유 하나 먹은 것이 다였다.
‘나는 젊기라도 하지. 과장님은 저 연세에 일주일에 3일을 이렇게 사시고도 힘든 기색을 하나도 안 보이시네. 그러고 보니까 이준영 선생님이나 박경일 과장님도 주말까지 일하셨잖아.’
아무리 자긍심을 가져도 외과 의사의 사명감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병동으로 올라가던 김지훈이 어깨를 마구 앞뒤로 흔들며 각오를 다졌다.
파이팅!
그러나 배고픔은 어쩔 수가 없었다.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 저녁 업무를 마치고 오더를 받은 후 드레싱까지 끝났을 때는 눈앞이 흐릿할 지경이었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첫 끼니를 먹을 수 있었다. 정말 엄청나게 먹어 댔다. 이미 김지훈의 먹성을 알고 있던 최철한과 유석재도 놀랄 정도였다.
“볼 때마다 놀라워. 인간이 이렇게 많이 먹을 수가 있나?”
“그러게요. 저도 지훈이 먹는 거 보면 참 놀랍습니다.”
일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을 내려면 최대한 많이 먹어야 한다. 그러건 말건 밥 네 공기를 비운 김지훈이 그나마 점심을 먹은 유석재가 남긴 밥까지 마저 먹었다.
하루 종일 세컨드만 서며 다소 지쳤던 김지훈이 차트를 정리하며 히죽 웃었다. 기분 좋은 일이 남아 있었다.
오프다!
게다가 리포트 발표도 일주일에 한 번인데 금요일이었다.
구미에서처럼 응급 수술이 떠도 오프 중에는 수술에 참여하지 않아도 됐다. 약간은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솔직히 만세라도 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후다닥 일을 끝낸 김지훈이 밤 1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최소한 4시간 반을 아무 방해도 없이 쭉 잘 수 있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 행복해. 동기들과 함께 일하면 이렇게 좋은 일이 있었네. 이 정도는 껌이지. 왜 지옥이라고 하는 거야?’
동기들이나 선배들 모두 지옥이라고 하는 천안에서 김지훈은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만큼 지난 6개월이 힘들었단 의미였다. 여전히 힘든 생활임은 분명했지만, 한계까지 밀렸던 김지훈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화요일은 송재덕 과장의 수술이 없는 날이었다.
신현수가 맡은 구영선 교수 파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일이 없을까?
회진을 돌며 쏟아져 나온 오더를 따라 병동 환자를 보고 다음 날 있을 수술 스케줄을 챙겨야 했다. 천안 병원은 모든 과가 지나치다 할 정도로 환자가 많아 컨설트를 보기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주로 컨설트를 요청해야 하는 내과는 북새통이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담당 교수를 찾아 진료실과 처치실 혹은 병동을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고 나서야 스케줄을 모두 챙길 수 있었다.
4시 반쯤 신현수와 병동 의국에서 만났다.
신현수가 피곤에 지친 눈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손을 내밀었다. 송재덕 과장은 위장관 파트였고, 구영선 교수는 대장 항문 파트였다. 양쪽의 수술이 도합 10개였다.
“스케줄 내가 낼게.”
‘어? 현수 이 자식, 정말 많이 변했네.’
1년차에겐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일까?
예전 같았으면 스케줄 내는 문제로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을 신현수였다. 김지훈이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스케줄을 내러 가는 신현수를 보았다.
잠시 후, 송재덕 과장이 올라와 회진을 돌고 갔다.
병동 의국으로 들어와 오더를 내려던 최철한이 혀를 찼다.
“구영선 선생님도 참 노골적이야. 과장님 파트 돌 때도 몇 번 수술을 줬다더니, 자기 파트로 오자마자 수술을 주시네.”
유석재가 입술을 모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 파트도 불만이 많더라구요.”
“왜 없겠어. 그래도 어쩌겠냐. 구영선 교수님이 서울로 올라가려고 안달이 났는데. 현수한테 잘해 주면 이사장님은 물론 금 과장님의 눈에도 확 띌 거 아냐.”
“현수는 그래도 작년보다 훨씬 나아졌고, 처신을 잘하려고 노력도 하는 것 같은데 주변에서 그냥 놔두질 않네요.”
“모르겠다. 오더나 내자.”
오더를 받던 김지훈이 자꾸 눈가를 찌푸렸다. 신현수가 의도한 일은 아니겠지만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먼저 자청해 수술 스케줄을 내겠다는 사실도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이 씨! 불평을 해 봐야 나만 손해지. 하긴, 음성에서 그만큼 수술을 한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그래도 이렇게 가면 뒤처질 게 뻔해. 전보다 편해졌다고 방심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천안 병원은 눈이 뱅뱅 돌 정도로 바쁘게 돌아갔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온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환자가 많았다. 외래도 바빴지만 역시 응급실이 꽃이었다. 외상 환자들로 넘쳐 날 지경이었다.
일이 많으면 반드시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신현수는 몰론 김지훈도 사소한 실수를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들 웃으며 지나갔다. 둘 다 최선을 다해 일하는 데다 이번처럼 실수가 적은 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정갑수였다. 툭하면 응급실과 수술실을 가리지 않고 큰 소리가 났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백무용 교수가 1년차에게 대놓고 화를 냈다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병동에서도 뺀질거리며 일을 안 할 궁리만 했다. 그 모습이 위 연차들의 눈에 안 띌 리가 없었다. 조용했던 의국이 점점 시끄러워졌다.
참다못해 폭발해서 그렇지, 마음에 안 들 때마다 지적했다면 하루에도 몇 번씩 큰 소리가 났을 것이다. 그때마다 정갑수가 성질을 내며 김지훈과 신현수를 찾았다.
“에이! 씨팔! 김지훈, 현수야, 이럴 땐 니들이 좀 커버해 줘야지. 이 많은 일을 나 혼자 다 어떻게 해? 내가 벌써 몇 번이나 말했는데 이따위로 할 거야?”
신현수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정갑수가 김지훈에게 삿대질까지 해 댔다.
“야, 김지훈. 넌 어디서 자는지 모르지만 얼굴이 제일 멀쩡하니까 내 일이 많을 때는 네가 좀 해. 어찌 됐든 동기잖아, 이 새끼야. 씨펄! 숨어서 자는 새끼는 가만히 내버려 두고 나한테만 지랄들이야.”
웃기지도 않은 말이었다. 실제로 그렇다고 해도 부탁을 해야지 욕을 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한두 번은 욕까지 해도 참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나한테 욕까지 하면서 또 분풀이를 하는 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정갑수, 아직도 학교 다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알아서 잘해 봐. 이따위로 일하면 넌 의사로서 자격도 없어.’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김지훈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었다.
“내가 왜?”
“뭐?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봐. 어디서 반말이야. 너 이 새끼야, 너도 내가 졸로 보여?”
“대우를 받고 싶으면 먼저 일을 열심히 해. 그리고 부탁할 때는 아무리 후배라도 욕을 하면 안 되지. 내가 뭐 빚진 거라도 있어?”
정갑수가 부들부들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