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천안이 지옥이라고? (2)
그냥 단순히 생각해도 천안 병원은 1년차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게 확실했다.
일단 드레싱부터 할 요량이었던 김지훈이 의국을 바라보았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신현수는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더 자게 놔둘까? 아니지, 그러다 밤샌다.’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이 신현수를 깨웠다. 너무 잠에 취한 나머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지훈을 보던 신현수가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드레싱!”
드르륵! 드르륵!
두 대의 드레싱 카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드레싱을 끝낸 김지훈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젠 상당히 익숙해져 웬만한 드레싱은 빠르게 끝냈지만, 꼬박 한 시간 반이 걸린 것이다. 잠시 후, 신현수도 똑같은 모습으로 들어왔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때 정갑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수야, 형 왔다.”
드레싱은커녕 환자 파악도 하지 못했을 텐데 참 느긋했다.
김지훈, 신현수, 정갑수.
1년차 셋이 모두 모였다. 천안 병원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한 신현수가 1년차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꺼냈다. 바로 오프였다.
“오프는 3일에 한 번이고, 파트 일과 끝나고 각자 가면 돼. 주중 당직은 응급실과 수술실을 각각 담당하면 되고, 주말 오프는 3주에 한 번이야. 일이 엄청 많으니까 최소한 자기 일은 확실하게 처리해.”
정갑수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당직 중 어느 게 더 힘들어?”
“응급실 당직. 잘못하면 꼬박 밤새. 오늘은 근무 교대라고 9시부터 서라고 하셔서 연락이 없는 거야. 수술 당직은 병동까지 커버해야 하지만 인턴도 있고, 수술이 없을 때가 있어서 그나마 편해. 그래서 순서도 수술, 응급실, 오프. 이렇게 돌아가.”
당장 오늘 9시부터 응급실 당직을 누가 설지 결정해야 했다. 정갑수가 눈을 치켜뜨며 고민했다. 어떤 게 제일 유리할지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주말인데 푹 좀 쉬자.’
정갑수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김지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정갑수는 모르지만 신현수는 확실히 피곤해 보였다. 물론 김지훈도 일요일 내내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어차피 조삼모사였다.
더구나 이럴 때 조금만 양보하면 왠지 어색한 사이도 개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경일 과장의 말도 생각난 참이었다.
“현수 네가 상태가 제일 안 좋네. 너부터 주말 오프 챙겨라. 어째 꼴이 말이 아니다.”
신현수가 다소 놀란 눈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한눈에도 고생을 더 했으면 더 했지, 덜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 첫 주말부터 고생을 자청한 것이다.
‘병원의 분위기도 파악을 못 했을 텐데 내가 주말 당직을 서야 하는 거 아닌가?’
잠시 고민하던 신현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정갑수가 짜증을 내며 소리를 지른 것이다.
“김지훈, 왜 네 마음대로 오프를 결정해, 인마. 만일 현수가 지난주에 오프였으면 연장으로 가는 거 아냐?”
말끝마다 욕에 조금도 손해는 보기 싫다는 말이었다.
김지훈도 인상을 쓰고 말았다.
“현수 상태 안 보여요?”
“고생은 현수만 해? 나도 서울에서 이혁민 선생님 때문에 직사하게 고생하고 왔어.”
‘고생? 고생한 얼굴에 개기름이 좔좔 흘러?’
한마디 쏴 주고 싶었지만 첫날부터 얼굴을 붉히고 싶진 않은지 김지훈이 지그시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구요?”
“원칙대로 해. 사다리를 타든지, 아니면 하다못해 파트별로 쉬는 때가 있을 거 아냐?”
사다리를 타자는 말까지 나오자 신현수가 눈가를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 정갑수가 이혁민 교수 파트를 돈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전주에 서울에서 내려온 2년차가 학을 뗄 정도로 일을 안 했다며 성질을 내는 것을 보았다.
‘보기 싫다고 차갑게 대한 김지훈은 나보고 먼저 오프를 가라고 하는데 평소 술 먹으며 헤헤거렸던 정갑수는 자기가 먼저 간다고 하네.’
지난 3개월 동안 동기들의 힘이 얼마나 귀중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누군가 일을 미루는 순간 1년차 전체가 힘들어졌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힘든 곳인데 이런 일로 싸울 수는 없었다.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았어. 먼저 오프 가. 대신 도와달라고 안 할 테니까 형도 도와달라는 말 하지 마.”
정갑수가 움찔거렸다.
“야, 그렇다고 그렇게 말할 필요 있어? 난 그냥 공평하게 결정하자는 거야.”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지는 게 공평한 거 아냐? 김지훈, 수술 당직부터 설래? 아니면 응급실부터?”
신현수의 냉랭한 표정을 보며 왠지 속이 후련해진 김지훈이 슬며시 웃으며 턱을 괴었다.
‘말투는 딱딱해도 확실히 뭔가 전하고는 다르네.’
“그럼 우리도 공평하게 하자. 가위바위보 하지, 뭐.”
“가위바위보?”
“그래, 인마. 진 놈이 수술 당직부터 서고, 내일 응급실 커버하는 거다. 남자는 주먹인 거 알지? 난 남자다.”
하릴없는 농담을 던진 김지훈이 정말 주먹을 냈다. 본능적으로 보를 낸 신현수가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김지훈을 보았다. 가위바위보를 한 것도 우습지만 이기고도 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오늘은 내가 수술 당직이네. 현수야, 고생해라.”
김지훈이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스테이션으로 나가 환자를 마저 파악했다. 사흘에 한 번씩 오프에 일을 나눠서 할 동기들이 있다면 구미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오후 9시를 시작으로 천안 근무가 정식으로 시작됐다. 숙소에 올라가 잠을 청하던 김지훈이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김지훈, 인턴하고 응급실로 내려와.)
새벽 4시에 응급 수술이 떴다. 재빨리 가운을 걸치고 눈도 못 뜨는 인턴과 함께 응급실로 내려갔다. 악명 높은 천안의 응급실답게 환자와 보호자에 의료진들로 아수라장이었다.
교통사고로 인한 혈복강이었다.
신현수가 정신없이 바이탈을 잡고 있었다. 수술에 필요한 검사는 이미 결과까지 나온 상태였다. 김지훈이 재빨리 수술 스케줄을 작성한 후 마취과에 제출했다.
“수술실이 바이탈을 유지하고 수술실 간호사들도 준비를 해야 하니까 30분 후에 올려.”
“예, 알겠습니다.”
응급실로 내려온 김지훈이 신현수와 손을 맞췄다. 혼자 하려면 그렇게 바쁘고 힘들었던 일이 너무도 쉽고 편안하게 진행됐다. 도리어 시간이 남을 지경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미 신현수가 필요한 처치들을 한 덕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지식만큼이나 의사들의 노력이 중요했다. 바로 1년차 중 가장 뛰어난 전공의 2명이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흔들리던 바이탈이 점차 안정을 찾아 갔다. 환자의 의식도 또렷했고, 마취나 수술에 전혀 지장이 없는 상태를 유지했다. 곧 환자를 수술실로 옮길 준비가 완료됐다.
“현수야, 수고해.”
김지훈이 신현수에게 손을 흔들고는 부리나케 수술실로 향했다. 밤새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던 신현수가 이제야 쉴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 피곤에 절은 눈가를 비비며 침대에 눕다 말고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김지훈과 정갑수를 뺀 나머지 동기들과는 모두 함께 일해 보았다. 분명 힘이 되고 도움을 받을 부분이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면도 많았다.
특히 응급실에서 위급한 환자를 볼 때마다 동기들을 보며 답답함을 금치 못했었다. 부족한 면이 너무 많이 보였다. 경험은 위 연차보다 부족할지 몰라도 머릿속에 든 지식만큼은 뒤지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동기들에게 지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거의 흠잡을 곳이 없는 손일석에게까지 몇 번 언성을 높이고야 말았다. 당연히 서로 얼굴을 붉히고 말았지만 타협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은 지금도 확고했다.
그런데 처음 손을 맞췄음에도 김지훈은 달랐다. 환자에게 필요한 처치를 적절한 시점에 정확하게 하고 있었다. 바이탈을 잡으며 여유를 느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김지훈 때문이었을까? 실력 때문이라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진 않겠지.’
그간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김지훈에 대한 감정이 미묘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1년차 때는 잊기로 했던 윤서연까지 생각났다. 거칠게 고개를 흔든 신현수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수술실로 향하던 김지훈도 눈가에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바이탈을 다루는 신현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역시 신현수야. 내 손이 하나도 필요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어. 대단해. 그동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현수는 한 발 더 앞에 있을지도 몰라.’
답답한 마음에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순간 정말 넘을 수 없는 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 또한 기회였다.
‘동기라고 배울 게 없다는 소리가 아니잖아. 신현수, 확실하게 보여 줘. 너한테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모두 배워서 반드시 널 뛰어넘고 말 테니까.’
눈빛까지 굳히며 각오를 다지던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마터면 수술을 앞두고 습관처럼 해 오던 일까지 잊을 뻔했다.
‘비장 파열로 인한 혈복강이면?’
수술 과정을 상기하는 김지훈의 손이 마치 직접 비장을 떼는 것처럼 허공을 누볐다.
이번 주 주말 당직 스태프는 송재덕 과장이었다.
과장 정도 되면 주니어(junior) 스태프들에게 응급 수술을 맡겼지만 송재덕 과장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당직 근무를 태만히 하지 않았다.
한참 수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송재덕 과장이 들어왔다.
수술을 들어온 위 연차들의 인사를 받고는 김지훈을 빤히 쳐다보았다. 김지훈이 급히 인사를 하자 웃으면서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허허! 너, 누구냐?”
“예, 1년차 김지훈입니다.”
“김지훈? 그래, 김지훈. 어느 파트 돌아?”
“예, 과장님 파트 돕니다.”
“흐음! 네가 내 파트였구나. 김지훈, 흐음! 김지훈. 열심히 해야 한다.”
“예, 과장님.”
앞머리가 살짝 벗겨진 데다 다소 느릿한 말투가 꼭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스타일이었다. 대개의 과장들이 보이는 근엄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마취가 끝나고 수술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마치 습관인 것처럼 자꾸 웃었다.
‘일요일 새벽부터 수술인데 기분이 저렇게 좋으실까? 수술을 정말 좋아하시나 보네. 나도 퍼스트 서면 과장님처럼 계속 웃을 텐데.’
천안에서는 인턴 때도 일반 외과를 돈 적이 없었다. 나름 혼자 추측하고는 세컨드 자리에 섰다.
수술이 시작됐다.
메스를 잡은 송재덕 과장이 돌변했다.
눈 몇 번 깜짝하는 사이에 배가 열렸다.
탭과 석션을 이용해 피를 제거한다 싶었는데 어느새 비장으로 연결된 동맥을 잡고 있었다.
잠시 후, 간호사가 적출된 비장을 받아 들고 있었다.
김지훈은 눈만 껌뻑거렸다.
‘뭐야, 벌써 거의 다 끝난 거야?’
인턴 때를 포함해 그동안 여러 교수들의 수술을 봤다. 그중에서 이준영 과장이 가장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훨씬 더 빠른 것처럼 보였다. 김지훈의 눈에는 무모하게 보일 정도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으로 드레인(심지)까지 넣은 송재덕 과장이 수술실을 나갔다.
‘와! 딱 한 시간 걸리셨네. 배까지 다 닫아 봐야 한 시간 반이면 수술이 끝나네. 정말 엄청나게 빠른 거잖아. 이러다 사고 안 나나?’
시계를 보며 입을 쩍 벌린 김지훈이 복벽을 닫고 있는 3년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원래 이렇게 빨리 수술하세요.”
“너 인턴 때 천안에서 우리 과 안 돌았어?”
“예, 안 돌았습니다.”
“그래서 모르는구나. 과장님은 수술 모토가 빠름이야. 서울에서는 네다섯 시간 걸리는 암 수술도 3시간 반이면 끝내신다. 빨라서 좋긴 한데, 대신 어시스트 제대로 못 서면 죽어. 그리고 수술 중에 심하게 졸아도 죽는다.”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어시스트 서다 조는 사람은 1년차와 인턴뿐이었다.
“1년차도요?”
“세컨은 어시스트 아니야? 조심해. 몇 번 졸다가 야야 소리 나오면 초상나는 거다.”
야야라는 말에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