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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66화 (166/1,329)

제10화 천안이 지옥이라고? (1)

잠시 후, 음료수를 들고 온 김지훈이 잔을 채웠다.

“지훈아, 의료 봉사는 잘 갔다 왔어?”

“응. 너도 오지. 생각보다 아픈 데도 병원에 못 오는 사람이 정말 많더라.”

“힘들진 않았어?”

“그날 무척 더웠거든. 거기다 환자들까지 많아서 힘들긴 했지. 그래도 함께 봉사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보람이 있어서인지 나중에는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윤서연이 콧등을 찡그렸다.

“못 가서 미안해.”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다 자기 사정 되는 대로 하는 거지. 사실 난 갈 데도 특별히 없었거든. 넌 휴가 때 재밌게 지냈지?”

별말 아니었지만 윤서연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김지훈도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청평으로 가던 날 하얀 박꽃 앞에서 활짝 웃던 고경아의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환자를 보며 미소 짓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후우! 기회가 되는 대로 확실하게 말해야겠다.’

전문의가 될 때까지는 일에 모든 것을 걸고 싶었다. 그때쯤이면 어떤 식으로든 노력에 대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신현수라는 강력한 라이벌을 두고 여자 문제로 고민할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두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윤서연이나 자신을 위해서도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김지훈의 마음이 문제였다.

윤서연을 앞에 두고 고경아의 얼굴이 떠오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윤서연도 의미는 다르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올해는 서로 만날 시간이 없지만 그래도 내년이 되기 전에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 해. 나도 내가 정말 지훈이랑 끝까지 함께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어. 지금이 아니면 말할 시간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

김지훈을 빤히 쳐다보던 윤서연이 눈빛을 굳히는 순간 김진호가 맥주를 들고 쓱 옆에 앉았다.

“김지훈, 한잔해라.”

“선생님, 저 당직이에요.”

“야! 탈장 수술까지 했는데 한 잔 정도는 해야지. 박경일 과장님, 지훈이 맥주 한 잔 먹여도 되죠?”

“그럼요. 저 술의 반은 지훈이가 사는 건데. 하하하!”

박경일 과장이 크게 웃으며 도리어 잔을 들어 보였다.

김지훈이 마지못해 맥주를 마셨다. 마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당직 때 술은 금물이었다. 더구나 고기도 먹을 만큼 먹었는지 내일 발표할 리포트까지 생각이 났다.

김지훈이 슬며시 유석재 옆에 앉아 귓속말을 했다.

“선생님, 저 내일 리포트 써야 합니다. 먼저 들어갈게요.”

“그래, 먼저 들어가.”

“서연아, 내일 일 때문에 먼저 들어가야겠다. 미안해.”

윤서연에게 미안하다는 손짓까지 한 김지훈이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계산대 앞에 섰던 김지훈이 웃으며 만 원짜리 2장을 내밀었다. 이미 계산은 끝나 있었고, 추가로 들어간 맥주 값만 치르면 됐다.

‘에이! 내가 반 내려고 했는데 벌써 계산을 하셨네.’

병원으로 향하는 김지훈의 발걸음이 가벼우면서도 무거웠다. 윤서연에게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답답했다. 터벅터벅 걷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6개월 동안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로 좋은 친구이자 동료로 남았으면 좋겠는데.’

병동에 올라가 수술 기록지를 작성하려던 김지훈이 미친놈처럼 혼자 히죽히죽 웃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탈장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에 피곤이 싹 사라졌다. 이런 날이 있기 때문에 죽도록 힘든 날을 견디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시간, 아직도 식당에 남아 술을 마시던 박경일 과장이 최철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철한아, 석재야, 김지훈 저놈 저렇게 일하다 퍼지는 수가 있으니까 천안에서 확실하게 챙겨라. 그렇다고 잘못한 일까지 마냥 봐주지는 말고. 알았지?”

“예, 과장님. 그런데 정갑수가 와요. 아휴! 동기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우리 파트는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최철한이 인상까지 쓰며 고개를 저었다.

“니들 어느 파트 도는데?”

“과장님 파트요.”

“설마 과장님도 들으신 게 있을 텐데 정갑수를 돌리겠어? 그리고 신현수가 지금 과장님 파트 아니야?”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럼 김지훈이 돌겠네. 신현수를 한 파트에서 6개월씩 돌릴 수는 없잖아. 지훈이 정도면 야야 소리는 안 나오겠지?”

유석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야야 소리 나오면 지훈이는 내 손에 죽습니다.”

“그 전에 네가 먼저 죽겠지. 하여튼 송재덕 과장님도 평소 에 그렇게 좋으신 양반이 화가 나면 불처럼 변하시니. 쩝! 이젠 안 그러실 때도 됐는데 말이야. 항상 조심해라.”

“그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근데 결국 들을 것 같습니다.”

유석재의 말에 최철한이 한숨까지 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박경일 과장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지훈이 정도면 절대 안 들을 것 같은데, 왜?”

“과장님은 정갑수를 보시고도 모르세요? 지훈이가 문제가 아니죠. 송재덕 과장님 당직하고 정갑수 선생 당직이 겹치는 날이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냥 큰 실수를 해도 있는 그대로만 말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구나. 재수 없으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네. 그나저나 지훈이 저놈, 수술 정말 잘하지? 평소에 수술 기구를 끼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유석재가 소주잔을 비우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저도 오늘 많이 느꼈습니다. 더 노력해야 될 것 같아요. 이러다 지훈이한테 추월당하겠어요.”

“석재야, 나도 마찬가지야. 그동안 연차 올라왔다고 게을러진 것 같아서 창피하더라.”

박경일 과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1년차가 자신들보다 수술을 잘하면 시샘을 하다못해 화까지 내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그런데 최철한과 유석재는 스스로 반성하며 도리어 아래 연차에게 배우고 있었다.

정말 아낄 수밖에 없는 후배들이었다.

“별소리를 다 하네. 김지훈이 아무리 잘해도 니들보다 몇 수 아래야. 천안 가서 수술 많이 받고 실력이나 왕창 쌓아.”

“예, 과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쉬운 시간이었다.

간단히 맥주 몇 잔을 걸친 박경일 과장이 집으로 돌아갔다.

김진호와 최철한이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날 밤, 둘 다 늦도록 병원에 들어오지 않았다.

최철한과 유석재가 천안으로 떠나고 새로운 위 연차들이 왔다. 다들 구미에 오면 무엇보다도 수술을 받기를 원했다. 그 탓에 김지훈은 퍼스트를 설 꿈조차 꾸지 못했다.

그래도 마지막 일주일은 언제나 빠르게 흘렀다.

마지막 날 박경일 과장에게 인사를 하고 천안으로 향했다.

“천안에서도 열심히 해. 만일 과장님 파트 돌게 되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리고 동기들하고 처음 함께 돌지? 가능하면 먼저 양보해라. 그래야 3개월이 편해져.”

“예, 과장님. 명심하겠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그래, 내년에 또 보자.”

박경일 과장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세 달마다 겪는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이 무거워 보였다. 김지훈 때문일까?

‘내년에는 나를 얼마나 놀라게 할까?’

한편으로는 기대감에 가슴이 뛰는지 병원을 나서는 김지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드디어 후반기 첫 근무지인 천안 병원에 도착했다.

어느 병원이나 기본적인 일과는 동일했다. 하지만 정규 수술은 물론 응급 수술까지, 수술이 워낙 많아 1년차들에겐 지옥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더구나 이젠 일이 익숙해지고도 남을 때였지만 4년차들이 손을 놔 도리어 인력이 매우 부족한 시기였다. 이래저래 1년차들은 1년 내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천안 병원을 바라보던 김지훈이 입을 꽉 다물었다.

첫 근무이기도 했지만 동기들과 함께 일한다는 생각에 은근히 가슴이 떨렸다. 특히 신현수와 함께 근무한다는 사실에 흥분과 긴장이 동시에 다가왔다.

‘정갑수랑 같이 돈다고? 재수도 지지리 없네. 하지만 내 라이벌인 신현수가 있다 이거지. 좋았어. 최선을 다해서 한번 붙어 보자. 지옥이라고? 음성하고 구미도 지옥이었네요.’

진짜 지옥이라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음성과 구미를 돌면서 어디까지가 자신의 한계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가슴을 쫙 편 김지훈이 천안 병원으로 들어섰다.

1년 만에 온 탓인지 모든 게 새롭게 보였다.

숙소에 올라가 짐을 풀던 김지훈이 혀를 찼다.

근무지가 바뀔 때는 첫날이 무척 중요한데 정갑수가 열심히 자고 있었다. 벌써 토요일 오후 7시였다. 내일 아침에 회진 돌 준비는 했는지 걱정이 앞섰다.

‘환자 파악은 언제 하려고 아직도 자나.’

싫다고 해도 트레이닝 동기는 분명했다. 서울에서 아무리 빨리 내려왔다고 해도 환자를 파악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잠시 턱을 만지며 고민하던 김지훈이 정갑수를 흔들었다.

“갑수 형, 일어나요. 7시예요.”

정갑수가 눈도 뜨지 않고 손을 휘두르며 신경질을 냈다.

“귀찮게 뭐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인마.”

“환자 파악 안 해요?”

“아! 새끼 정말. 신경 끄라니까. 너나 알아서 해.”

6개월이나 지났는데 변한 것이 없었다.

‘그래, 마음대로 하셔. 내가 깨지나.’

주섬주섬 짐 정리를 한 김지훈은 병동으로 내려갔다.

신현수가 스테이션에 앉아 있었다.

항상 단정하고 깔끔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넥타이는 아예 매지도 않았고, 이삼 일은 머리를 감지 못한 것 같았다. 면도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 턱밑이 거뭇거뭇했다.

천안 병원이 엄청나게 힘들든지, 아니면 신현수가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든지 둘 중 하나였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란 생각에 등짝이 서늘해진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현수가 정말 열심히 일한 모양이네.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최소한 뒤처지지는 말아야 할 거 아냐.’

“현수야, 반갑다. 6개월 만이네.”

“왔어?”

졸음이 가득한 눈이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차가왔다.

‘자식, 말투는 하나도 안 변했네. 바늘로 찔려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겠다.’

김지훈이 혀를 차며 옆에 앉았다.

“그동안 잘 지냈지? 널 보니까 천안이 엄청 힘든가 보다. 나 어느 파트 도는 줄 알아?”

“과장님 파트야. 난 구영선 선생님 파트고, 갑수 형은 백무용 선생님 파트야.”

김지훈이 주변을 보며 물었다.

“갑수 형은 숙소에서 자고 있던데, 환자 파악은 하고 자는 거야?”

“나도 몰라. 알아서 하겠지. 과장님 파트 인계해 줄 테니까 의국으로 들어가자.”

어느 병원이나 메이저 과는 병동 옆에 의국이 딸려 있었다.

환자를 빠르게 보기 위해서는 당연히 있어야 했다.

“일단 내가 정리한 것부터 먼저 읽어 봐.”

의국으로 들어간 신현수가 종이 한 장을 건네고는 머리를 파묻었다. 인계장을 다 읽기도 전에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현수를 보았다.

‘인턴 때는 필요한 것만 딱 적어 놓더니 지금은 자세히도 적었네. 전하고는 좀 달라졌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인계장만 읽어도 특별히 물어볼 것이 없었다. 빠진 것이 있다면 시간 나는 대로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하도 달게 자서 깨우기가 미안해진 김지훈은 조용히 의국에서 나와 차트를 모았다. 주말 근무인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차트를 보던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왜 지옥이라 불리는지 알 만했다. 환자의 수도 많은 데다 메이저 수술이나 응급으로 수술을 받은 경우가 태반이 넘었다.

‘휘유! 구미하고는 비교도 안 되네.’

눈이 뻑뻑할 정도로 피곤함을 느꼈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한참 동안 차트를 보던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신현수였다. 차트에 쓰인 기록만으로도 환자를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수술 기록지를 포함한 모든 기록이 깔끔하기만 했다. 흠잡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강렬한 자극이었다.

‘환자가 50명이 넘는데 응급 수술도 꽤 많고, 마이너 수술보다 메이저 수술을 한 환자가 더 많네. 이 자식, 정말 열심히 일했구나. 나도 질 수 없지.’

어느 정도 환자를 파악한 김지훈은 눈빛을 굳히며 일어서다 말고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한쪽 벽에 내일 수술 일정표가 걸려 있었다. 송재덕 과장과 구영선 교수가 수술하는 날이었다.

두 파트를 합쳐 정규 수술만 11개였고, 그중 송재덕 과장의 수술이 6개였다. 김지훈이 스케줄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위암 수술만 2개네. 나머지 수술까지 다 하고 나면 도대체 몇 시에 끝나는 거야?”

신현수가 왜 저런 몰골이 됐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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