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65화 (165/1,329)

제9화 주머니 속의 송곳 (2)

유석재가 탈장 수술을 연달아 받았다. 그것도 두 번째 케이스는 3년차인 최철한도 몇 번 해 보지 못한 소아 탈장 수술이었다. 어시스트를 자청한 최철한이 유석재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역시 유석재야. 잘하네.”

수술이 끝난 후, 김지훈이 유석재를 부러운 눈으로 보았다. 얼마나 좋은지 유석재가 수술 후 오더까지 직접 내고 있었다.

“선생님, 전 언제 2년차가 될까요?”

“왜, 부러워?”

“엄청 부럽죠. 최철한 선생님도 여기 와서 3개인가밖에 못하셨잖아요.”

“자식! 너도 인마 곧…….”

유석재가 말을 하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하마터면 탈장 수술을 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할 뻔했다. 수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김지훈인 데다, 결정은 오직 박경일 과장만이 내릴 수 있는 일이었다. 함부로 말할 내용이 아니었다.

수술 기록을 작성할 때까지 눈을 뜨고 있던 김지훈이 어느새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100일 당직이 끝났다지만 1년차가 혼자였기에 도리어 다른 병원보다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유석재가 조용히 병동 의국에서 빠져나왔다.

‘금요일에 하나 더 예약돼 있는데 정말 주실까? 다음 주 우리가 천안으로 가고 새 텀이 오면 주기 쉽지 않으실 텐데, 어떻게 하실지 모르겠네.’

벌써 구미에서의 근무도 다 끝나 가고 있었다.

최철한과 함께 유석재가 일주일 먼저 천안으로 가고, 그 후 김지훈이 뒤따라온다. 수술 건수야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곳이 천안이었지만 도리어 1년차에겐 기회가 없는 병원이기도 했다.

후반기가 되면 4년차들이 손을 놓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삼 년차만 모두 9명이었다. 그나마 송재덕 과장의 눈에 들면 아뻬라도 받겠지만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 정갑수가 천안에 오잖아? 수술이고 뭐고 일단 일이나 빵꾸 안 나면 다행이네. 그래도 현수가 있어서 괜찮겠지? 일석이나 경수가 오면 최고로 좋았을 텐데 너도 참 운이 없다.’

힐끗 병동 의국을 본 유석재가 입맛을 다시며 숙소로 향했다. 최철한이 고기를 사라고 난리를 쳐 모두 함께 나가 진달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역시 전공의에겐 고기가 힘이었다. 빡빡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난다는 해방감도 한몫을 할 것이다.

김지훈은 금요일 아침까지 그럭저럭 힘차게 뛰어다녔다.

금요일 두 번째 수술로 탈장이 잡혀 있었다.

최철한과 뭔가를 상의한 박경일 과장이 결정을 내렸다.

수술 준비를 하던 김지훈이 이삼 년차가 다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과장님이 수술하시는데 최철한 선생님까지 들어오면 세컨이 아니라 써드를 서야 하잖아. 탈장 수술 하는데 왜 다 들어오시는 거야.’

김지훈이 속으로 투덜거리며 알아서 써드 자리로 갔다.

수술 가운을 입던 박경일 과장이 웃으며 말했다.

“철한아, 석재야, 니들 내일 가지?”

4년차 때는 구미에서의 근무가 없었다.

최철한이 아쉬운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예, 과장님. 전 구미가 진짜 마지막이네요.”

“그럼 오늘 저녁 같이 먹자. 김지훈, 뭐 먹을까?”

김지훈의 눈이 반짝였다.

뭐니 뭐니 해도 회식은 일단 고기다.

돼지를 먹느냐, 소를 먹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최철한에게 물어보지 않고 김지훈에게 물을까?

김지훈이 유석재와 눈을 마주치며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았다. 무조건 소고기였다.

“과장님, 등심이요.”

“등심? 그거 비싼데 살 수 있겠어? 나랑 나눠 내도 만만치 않을 텐데. 하긴, 1년차면 월급 그대로 있을 테니까 등심 먹어도 되겠다.”

김지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등심을 제가 산다구요?”

“그럼 누가 사?”

“아니, 그게, 최철한 선생님 가신다고 먹자는 거 아닌가요?”

“겸사겸사. 김진호 선생님, 윤서연 선생, 지훈이가 산다는데 이따 같이 갑시다.”

“좋지요. 그런데 정말 지훈이가 사는 건가요?”

김진호가 좋아하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윤서연이 박경일 과장을 향해 눈을 흘겼다.

“어머! 1년차한테 고기를 사라는 게 어디 있어요? 과장님이 사셔야죠. 지훈이 얼굴이 반 토막이 났는데.”

박경일 과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윤서연을 보았다.

“어째 이상해. 김진호 선생님, 얘네 둘 좀 이상하지 않아요? 특히 윤서연 선생이 너무 수상해.”

“과장님, 뭐가 수상해요?”

“묘한 느낌이 쫙 다가오네. 둘 사이에 뭔가 있어.”

윤서연이 얼굴이 발개진 채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도리어 좋아하는 것 같았다. 김진호도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김지훈과 윤서연을 번갈아 보았다.

‘서연아, 다 좋은데 거기서 왜 얼굴 얘기가 나오냐. 하아! 미치겠다. 이거 빨리 정리를 해야지 이러다 스트레스 받아서 쓰러지겠네. 갈팡질팡하는 내가 나쁜 놈이지.’

김지훈이 딴청을 피우며 박경일 과장에게 말했다.

“선생님, 마취 다 됐는데 수술하시죠.”

“응? 그래야지. 자! 그러면 지훈이한테 등심 좀 얻어먹어 볼까? 김지훈, 네 자리에 서.”

“예, 과장님. 근데 왜 자꾸 저보고 사라고 하세요?”

김지훈이 집도의 옆인 써드 자리에 서며 투덜거렸다.

박경일 과장이 씨익 웃었다.

“어쭈! 김지훈, 많이 컸네. 수술하기 싫으면 마음대로 해. 수술하고 등심 사든지, 아니면 돈 아끼고 써드 서든지.”

‘어? 지금 탈장 수술을 주신다는 건가?’

멍한 눈으로 박경일 과장을 보자 최철한이 웃으며 세컨 자리에 섰다. 유석재가 슬금슬금 다가와 김지훈을 툭 쳤다.

“지훈아, 네 덕에 등심 좀 먹자.”

박경일 과장이 퍼스트 자리에 서며 손으로 재촉했다.

눈만 멀뚱거리던 김지훈이 집도의 자리에 서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탈장 수술을 받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당연히 불만을 토해 내야 할 이삼 년차까지 웃고 있었다. 가슴이 벅찬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최철한 선생님, 유석재 선생님, 감사합니다.”

“수술은 내가 주는데 왜 얘들한테 고맙다고 해? 자식이.”

김지훈이 쑥스럽게 웃으며 김진호를 보았다.

“김진호 선생님,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예. 빨리 시작하세요, 김지훈 선생님. 야! 1년차 중반에 탈장을 받아? 과장님, 이거 너무 총애하시는 거 아닙니까?”

“어디 가서 소문내지 마세요.”

깜짝 놀란 윤서연이 주먹을 쥐며 파이팅을 외쳤다.

잠시 숨을 고른 김지훈이 수술 과정을 다시 되짚었다.

이준영 과장과 수술했을 때는 물론 최근 유석재가 한 수술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침착하게 하자.’

수술이 시작됐다. 박경일 과장을 비롯해 일반 외과 선배들의 눈이 한곳으로 집중됐다. 과연 김지훈이 수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두들 불안함과 기대감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메스.”

피부를 절개한 김지훈이 빠르게 수술 부위로 접근했다.

단단하게 남아 있는 근육과 인대를 확인한 후 2개의 구조물을 연결해 복벽을 보강했다. 수술 과정을 설명하려고 하던 박경일 과장이 내심 크게 놀랐다.

퍼스트를 세울 기회가 없어서 솔직히 걱정이 앞섰었다. 그런데 정확하게 주요 구조물을 확인하고 적절한 두께로 연결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젓고 말았다. 어시스트를 서던 최철한과 유석재도 할 말을 잃었는지 수술실이 조용하기만 했다.

쓱쓱쓱!

김지훈이 수술의 핵심 중 하나인 탈장이 발생한 구멍의 크기까지 확실하게 조절했다. 과감하면서도 신중했다. 손과 기구를 적절하게 사용하며 완급을 조절하고 있었다.

누가 가르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탈장 수술을 해 봤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김진호마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 번 경험했다고 두 번째도 잘할 수 있는 수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피부 봉합이 끝나 가고 있었다. 환자를 깨우고 있던 윤서연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진호 선생님, 저 정도면 수술 엄청 잘하는 거죠?”

“그럼 당연하지. 너무 잘하네.”

수술이 끝나고 난 뒤 입이 찢어진 김지훈이 회복실로 환자를 옮겼다. 박경일 과장이 멍한 눈빛으로 최철한을 보았다.

“철한아, 저 자식 뭐야?”

“그러게요. 탈장 수술을 이렇게 잘하는 1년차가 있었네요. 아뻬 할 때도 저런가요?”

유석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 선생님, 손재주도 정말 타고나는 게 있나 봐요. 어떻게 나보다 더 잘하는 것 같죠?”

“에이! 그럴 리가 있어?”

최철한이 고개를 저으면서도 틀린 말이 아니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경일 과장은 가타부타 말도 하지 않았다. 수술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한 가지 사실에 놀란 것이다.

“이유가 있었어?”

뜬금없는 말에 유석재가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이유라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수술 기구를 다루는 손이 1년차가 아니야. 저 자식, 우리가 안 보는 사이에 정말 노력을 많이 하는 게 틀림없어.”

그때 우연히 지나가던 간호사가 유석재에게 눈짓을 했다.

“유석재 샘, 이번 주에 가세요?”

“그런데요. 왜요?”

“그럼 김지훈 샘한테 수술 기구 좀 꼭 반납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직접 얘기하려고 했는데 벌써 나가셨는지 안 보이시네요.”

“수술 기구요?”

“휴가 갔다 오시고 나서 바로 빌려 갔거든요. 내일 깜빡 잊고 그냥 가시면 우리 난리 나요. 아시잖아요.”

수술 기구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가격이 꽤 비쌌다. 관리 책임을 맡은 간호사들 입장에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시에 한숨 비슷한 소리가 터졌다.

“정말 할 말이 없는 놈이네.”

다들 할 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만 보았다.

그날 저녁, 오더를 내던 최철한이 자꾸 김지훈을 보았다.

회진을 돌 때 수술 기구가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를 들은 것이다. 신경을 쓰지 않았거나 수술실 간호사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결국 궁금함을 못 이긴 최철한이 묻고 말았다.

“김지훈, 주머니에 뭐가 들은 거야?”

“예? 아무것도 아닌데요.”

“아무것도 아니긴, 회진 돌 때 계속 무슨 소리가 들리더만. 꺼내 봐.”

김지훈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수술에 사용하는 기구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할 말이 없어 최철한은 기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따르륵!

기구에 달린 톱니가 맞물리며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그때 유석재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김지훈을 보았다.

“따르륵 선생님? 이게 지훈이 너 인턴 때 별명이었지?”

“예? 전 잘 모르겠는데요.”

“흐이구! 맞아, 기억난다. 선생님, 얘 내과 돌 때 니들 홀더(needle holder:봉합할 때 바늘을 잡는 기구) 들고 다니다가 시도 때도 없이 따르륵 소리를 내고 다녀서 그런 별명이 붙었었어요.”

“그래? 정말 이유가 있었네.”

웬만한 사람은 생각도 하지 못할 노력이었다.

오더를 다 내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김지훈은 눈치만 보았다.

‘왜들 이러시지? 손에 익힌다고 수술 기구를 들고 다닌 게 잘못은 아니잖아. 설마 다른 이유라도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일은 없었다.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지만 이내 잊고 말았다. 등심 앞에 눈이 먼 것이다.

회식을 나가며 김지훈이 잠시 응급실에 들렀다. 혹시라도 환자가 있으면 미리 해결하고 연락처도 주어야 했다. 중환이 한 명 있었다. 내과 전공의와 인턴들이 모두 그 환자에게 매달려 있었다.

‘다들 최선을 다하는구나.’

그때 간호사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바쁘게 뛰어다니며 환자의 치료를 보조하고 있었다. 누구나 최선을 다할 때가 바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일 것이다.

나이팅게일!

문득 의료 봉사 때 본 고경아의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회식의 최고 메뉴는 등심이었다.

최철한과 유석재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던 박경일 과장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고개만 저었다. 가끔 자신의 이름이 들려 고개를 내밀던 김지훈이 이내 고기에 정신을 팔았다. 먹는 게 남는 것이다.

오물오물 등심을 씹던 윤서연이 잠시 김지훈을 보다 한숨을 쉬며 물었다.

“지훈아, 너 다음 근무가 천안이지?”

“응. 넌?”

“난 서울이야. 그다음이 천안이고.”

“나랑 반대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에 김지훈이 딴청을 부렸다.

“서연아, 너도 힘들 텐데 많이 먹어. 음료수 시킬까?”

“응. 하나만 시켜 줘.”

김지훈이 음료수를 시키는 사이 윤서연은 한숨만 폭폭 내쉬었다. 그동안 휴가 때 의료 봉사에 못 갔다는 사실을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김지훈과 마주 앉아 얼굴을 보자 단 몇 시간이라도 얼굴을 비췄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저녁 비행기였으니까 시간은 맞출 수 있었는데 갈걸 그랬나? 아니야. 그랬으면 준비할 시간도 없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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