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64화 (164/1,329)

제9화 주머니 속의 송곳 (1)

토요일 아침, 김지훈은 떠날 준비를 했다.

간단한 옷가지와 책뿐이었지만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이제 서너 시간 후에는 음성을 떠나야 했다. 그래도 웃을 수 있었다. 휴가를 포기한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제 저녁 이준영 과장과 함께했던 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을 들으며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행복하면서도 묘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움에 김지훈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응급실이었다.

노티를 받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인턴 선생, 프리 에어(free air)가 확실해?”

(예, 선생님. 꽤 크게 떴습니다.)

“알았어, 내려갈게.”

복막염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프리 에어가 떴다는 소리에 가방에 넣었던 가운을 다시 꺼내 입었다.

‘마지막 날까지 선생님의 수술을 볼 수 있네. 정말 난 행운안가 보다. 선생님, 오늘 하나만 더 가르쳐 주십시오. 끝까지 잘 배우고 가겠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응급실에 내려가 환자를 보고 노티를 했다. 이준영 과장도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환자가 와서 좋은 것이 아니라 김지훈과의 인연이 생각보다 참 질기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쩌면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인연일지도 몰랐다.

마취과 과장이 마지막 날까지 귀찮게 한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투덜거렸다.

“오늘 서울 가야 하는데 시간이 좀 애매모호하네요.”

“아직 근무 시간이야. 마취하지.”

“예, 알겠습니다. 환자 빨리 올리세요.”

이준영 과장의 한마디에 꼬리를 말았다. 준비가 끝나자마자 수술실로 환자를 올렸다. 미처 수술 준비를 하기도 전에 빠르게 마취가 진행됐다.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손을 씻고 들어온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보며 말했다.

“수술해.”

김지훈이 대답도 하기 전에 마취과 과장이 소리를 질렀다.

“과장님, 이건 아니죠. 아무리 제가 제일 막내라고 해도 분명히 오늘 서울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런데 1년차한테 수술을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준영 과장이 힐끗 시계를 보았다.

11시 10분 전이었다.

“1시 퇴근이지? 그때까지 끝나.”

“예에? 말이 되는 소리를…….”

이준영 과장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김지훈을 떠나 환자를 앞에 두고 퇴근만 생각하는 꼴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평소 마취과 일에 충실했던 것도 아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마취과 과장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빨리 다른 병원을 알아봐야지. 마취과를 무슨 졸로 아네. 이럴 때는 사정도 좀 봐줘야지. 으휴! 저 자식이 언제 수술을 끝내. 2시는 훌쩍 넘어야 퇴근을 하겠네. 제길!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의사도 각양각색이었다. 입장이 곤란해진 김지훈이 머뭇거리자 이준영 과장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지훈, 1시까지 수술 끝내자. 빨리 들어와.”

위궤양이 터져 복막염이 발생한 환자였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퍼스트 자리에 선 이준영 과장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네 손을 좀 보자.’

김지훈도 굳은 눈빛으로 각오를 다졌다.

‘해 보겠습니다, 선생님. 그동안 무엇을 배웠는지 저도 알고 싶습니다.’

퍼스트를 서는 것과 집도는 달랐다. 하지만 무언가 배운 것이 있다면 수술하는 손도 달라져 있을 것이다.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집도의 자리에 섰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시작해.”

“마취과 과장님, 시작하겠습니다.”

“가급적 최대한 빨리합시다.”

목소리가 영 좋지 못했다.

김지훈이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손을 내밀었다.

“메스.”

과감하게 복부 정중앙을 따라 피부를 절개했다.

지지직!

전기 소작기로 지혈을 하며 동시에 피하 지방을 잘랐다.

백색선이 보였다. 가운데 어림에 조금만 칼집을 낸 후 멧잼(수술 용 가위)으로 위아래를 죽죽 잘랐다. 복막을 열자 하부에 직경 7~8밀리미터 정도의 구멍이 난 위가 드러났다.

“탭.”

탭으로 위의 아래쪽을 지그시 눌러 수술 시야를 확보했다. 멧잼으로 궤양의 주변을 소량 잘라 조직 검사용으로 내보냈다. 다른 병변이 있는지 확인한 후 본격적인 수술이 시작됐다.

천공된 궤양을 중심으로 1차 봉합을 시행했다.

흡수성 봉합사로 연속 수처를 하며 점막이 빠지지 않도록 신중을 기했다. 김지훈의 눈이 반짝였다.

이준영 과장이 어떤 식으로 퍼스트를 서는지 보아야 할 때였다. 정말 가볍고도 편안하게 위 봉합을 어시스트했다.

‘저렇게 하는 거였어. 힘을 주어야 할 부분에서만 확실하게 주고, 그다음에는 실에 여유가 충분히 생길 정도로 풀어 준다. 확실히 나까지 편해지네.’

이미 알고 있는 과정이었지만 이준영 과장이 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새롭게 느껴졌다.

2차 봉합을 했다.

비 흡수성 봉합사로 개별 봉합하는 과정이었다.

대장과는 달리 위는 장막(위의 가장 바깥 조직)을 두껍게 떠야 했다. 김지훈이 이를 잊지 않고 과감하게 바늘을 찔러 넣었다. 이준영 과장이 봉합 과정이 수월하도록 한 손으로는 주변 조직을 누르고 남은 손으로 커트(cut)를 했다.

‘아! 이거였구나. 봉합하기 정말 편하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봉합이 됐는지 확인한 후 배 속을 깨끗이 세척했다. 필요할 때마다 이준영 과장의 손이 들어와 수술을 원활하게 했다. 긴장 속에서 가벼운 흥분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드레인(심지)을 세 곳에 넣고 복벽을 닫기 시작했다. 김지훈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백색 선을 잡았던 손이 어느새 피부를 봉합하고 있었다.

마취과 과장이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이준영 과장이 어시스트를 선다고는 하지만 수술 중에 한마디도 하질 않았다. 그런데 불과 2시간도 안 돼 수술이 끝나고 있었다.

‘얘, 뭐야? 정말 1년차 맞아? 퍼스트 서는 것하고 수술은 다른 문제잖아. 그것도 복막염 수술인데.’

환자가 눈을 뜨기도 전에 김지훈과 이준영 과장이 마취과 과장을 보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뜩 든 마취과 과장이 부랴부랴 환자를 깨우기 시작했다.

“과장님, 수술 끝난 지 벌써 5분 지났습니다. 바쁘다고 하셨는데 퇴근 안 하십니까?”

마취과 과장의 얼굴이 벌게졌다. 김지훈이 마스크로 가려진 입을 믿고 씨익 웃었다. 마스크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이준영 과장의 눈가에도 주름이 잡혔다.

수술이 모두 끝났지만 김지훈은 마무리까지 최선을 다했다. 빨리 가라는 이준영 과장의 재촉에도 오더는 물론 수술 기록지까지 작성을 했다.

어느새 2시 반이 넘었다.

짐을 들고 내려오던 김지훈이 잠시 머뭇거리다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분명 이준영 과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준영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진료실로 들어간 김지훈이 꾸벅 인사를 했다.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2년차 휴가 때도 오고 싶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피식 웃었다.

“그때까지 여기 있으라고?”

“예? 아니요. 선생님께서 어디로 가시든 찾아뵙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 봐.”

이준영 과장이 입을 딱 다물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무뚝뚝하게 대해도 김지훈은 이제 그 속에 담긴 마음을 알고 있었다. 잠시 그 자리에 섰던 김지훈이 주먹을 꽉 쥐며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가 보겠습니다, 스승님.”

이준영 과장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선 시대도 아니고, 스승이란 단어는 누구에게나 쑥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왠지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김지훈 딴에는 자신의 마음을 모두 담고자 했을 것이다.

이준영 과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김지훈은 조심스럽게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후유! 괜히 스승님이라고 했나? 어감이 이상하네. 에이! 그래도 스승님은 스승님이지, 뭐.”

가방을 둘러메고 병원 앞에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타던 김지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준영 과장의 진료실 창문을 보고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택시에 탔다. 지금도 이준영 과장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녀석, 내가 보이지도 않을 텐데 인사를 하고 있네. 스승님이라고 했나? 김지훈, 잘 가라. 벌써 네가 보고 싶구나.’

이준영 과장이 묵묵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한때 최고라고 인정받았던 손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수술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겼던 때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김지훈이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1년 내내 붙들고 앉아 정말 제대로 키워 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모든 노력을 기울여 부족한 구석을 메워 주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김지훈의 손을 보며 내심 놀라고 말았다.

솔직히 2시간 내에 수술을 끝낼 수 있을지 자신하지 못했다. 어디선가는 막히거나 주저할 줄 알았다. 하지만 김지훈은 끝까지 자연스럽게 수술을 주도했다.

이혁민 교수의 말대로 자신의 손과 정말 비슷한 것 같았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지 않으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자신감을 보았다. 조금만 더 키우면 확실하게 수술을 지배할 수 있는 인재였다.

‘다시 볼 수 있다면 그때는 많이 변해 있겠지? 김지훈, 난 널 믿는다.’

터미널로 향하는 동안 김지훈도 마지막 수술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지만 절대 잊지 않기 위해 상기하고 또 상기했다.

‘선생님의 손을 잊지 말자. 수술에 욕심내지 말고, 기본을 쌓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먼저다.’

청주행 버스가 출발했다.

깊은 잠에 빠져든 김지훈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음성에서의 두 번째 배움이 끝났다.

구미로 돌아오자마자 김지훈은 수술실을 찾았다.

간호사에게 사정해 자주 사용하는 수술 기구 몇 개를 얻어 아예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시간만 나면 손에 쥐고 빙빙 돌리며 더욱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일단 수술 기구부터 손에 붙이자.’

운이 좋았는지 일주일 만에 세 번째 수술을 받았다.

수술이 끝나고 난 후 박경일 과장은 물론 유석재까지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석재야, 저놈 이상하지 않냐?”

“그러게요. 휴가 때 어디 가서 특별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보이네요. 후우! 저도 바짝 긴장 좀 해야겠는데요. 이러다 아래 연차보다 수술 못한다는 소리 들을까 봐 걱정입니다.”

박경일 과장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가장 흔하게 보는 수술인 아뻬가 아닌 다른 수술은 어떻게 할지 은근히 궁금해졌다.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신현수의 수술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고 했지만 김지훈만큼 수술을 잘하는 1년차는 본 적이 없었다.

“석재야, 탈장 수술 해 봤지?”

“예. 작년 말에 한 번 해 봤습니다.”

“탈장 수술들 일정을 앞으로 당겨서 잡아야겠다.”

“예? 설마 탈장을 벌써 주시려구요?”

유석재가 깜짝 놀랐다. 1년차에게 탈장 수술은 마지막 텀에서도 받을까 말까였다. 그마저도 유석재처럼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석재 너부터 2개는 더 해 봐야 하지 않겠어? 철한이야 이미 몇 개 줬으니까 욕심 안 낼 테고. 김지훈은 기회가 되면 줄 수도 있고.”

유석재의 입이 쫙 찢어졌다. 김지훈 덕에 2년차라고 해도 쉽게 받지 못하는 수술을 연이어 받게 된 것이다. 어느 교수나 기능을 복원해야 하는 수술은 그만큼 신중하게 생각했다. 만일 같은 질환이 재발하면 수술이 몇 배 더 힘들어지는 것도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

“정말이시죠. 저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걱정 마, 인마.”

‘일정을 조절하면 다음 주에 3개 정도 잡을 수 있는데, 그 전에 아뻬 하나 더 줘 보고 확실히 결정하자.’

박경일 과장이 내심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1년차에게 탈장 수술을 주는 것은 통상적인 경우를 한참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신현수가 서울에서 탈장 수술을 받았을 때 고 연차들이 불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미에서의 트레이닝은 박경일 과장의 고유 권한이었다. 더구나 최철한과 유석재가 이해한다면 별다른 문제가 생길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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