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63화 (163/1,329)

제8화 자신만의 수술이 있다 (2)

원칙과 정도를 버린 것이 아니라 금 과장의 전횡에 맞서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제 일반 외과 수련을 시작한 김지훈으로 인해 두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이준영 과장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두운 거실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답답한 숨을 연거푸 내쉬다 말고 갑자기 피식 웃었다.

“배우러 왔다지만, 휴가인 놈에게 밥도 안 사 줬네. 내일부터는 같이 먹어야겠어. 제자라고 딱 한 놈 있는데 얼굴이라도 자주 봐야지.”

이준영 과장이 자신도 놀랄 정도로 변해 가고 있었다.

어쩌면 10년 전의 모습을 되찾는 것인지도 몰랐다.

다음 날 예약됐던 탈장 수술을 들어간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보았다. 당연하다는 듯 수술 과정을 말하고는 퍼스트 자리에 서고 있었다.

똑같은 수술의 반복이었지만 김지훈의 눈은 갈수록 빛났다.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이준영 과장의 손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준영 과장도 방법을 바꿨다.

수술실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로지 수술에만 집중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손을 따라오는 김지훈이 대견하기만 했다.

‘야! 정말 대단하시다. 전에는 얼마나 날 봐주신 거야? 선생님의 손을 따라가는 내가 다 자랑스럽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수술을 할 수가 있지?’

전과는 또 다른 흥분이었다.

수술이 끝난 후에도 감탄만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부러워 미치겠는지 김지훈은 한동안 수술실에서 나가질 못했다. 수술 기구를 닫고 푸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따르륵! 따르륵!

마치 손의 일부인 것처럼 붙어 다니는 수술 기구들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됐다.

슬슬 배가 고파진 김지훈이 수술실에서 나가다 말고 흠칫 놀랐다. 얼굴이 다소 상기된 이준영 과장과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막 수술실로 들어오려던 것 같았다.

‘외래에 수술 환자가 왔나?’

“과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다. 너 밥 먹어야지.”

“예. 안 그래도 지금 식당으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선 이준영 과장이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김지훈을 본 인턴들이 반갑게 인사를 하며 의자를 빼고 있었다. 김지훈이 식판을 든 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과장님 혼자 드시네. 다른 과장님들은 외부로 나가셨나?’

김지훈이 인턴들에게 슬며시 손을 젓고는 이준영 과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름 어려운 결정이었는데 쓱 고개를 들어 힐끗 보는 것으로 끝이었다.

묵묵히 밥을 다 먹은 이준영 과장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저녁은 어디서 먹어?”

“여기서 먹습니다.”

“그래? 김치찌개 잘하는 집 있다. 저녁에 같이 가자.”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이준영 과장이 휙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김지훈은 눈만 껌벅거렸다.

‘지금 저녁 같이 먹자고 하신 거지? 맞지?’

저녁 먹을 때도 이런 분위기라면 체하기 딱 좋았다. 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준영 과장과의 거리가 단순히 한 발짝 좁혀진 것이 아니었다.

스승과 제자!

문득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김지훈이 커피 한 잔을 뽑고는 조심스럽게 진료실 문을 열었다. 이준영 과장이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선생님, 커피 드십시오.”

김지훈이 책상 위에 커피 한 잔을 놓고 꾸벅 인사를 하며 나가자 이준영 과장이 피식 웃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다 말고 중얼거렸다.

“맛있네.”

오늘따라 유난히 커피 향이 고소했다.

환자라는 파도가 크게 밀려왔다.

김지훈으로서는 대단한 복이자 행운이었다. 외래에서 아뻬 아니면 탈장을 매일처럼 올렸다. 응급실로 내려가면 어김없이 수술 환자가 왔다고 할 정도로 응급 수술이 많이 벌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구미보다 수술 건수가 적었고, 잡일은 할 필요도 없었다. 시간이 한결 넉넉해진 덕에 수술 전 많은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열심히 준비해도 이준영 과장이 날리는 날카로운 질문을 피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새카맣게 타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수술을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준영 과장의 수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김지훈의 짧은 안목으로도 대단하다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보고 또 봐서 반드시 배우고 말겠다는 의지만 강해질 뿐이었다.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했다.

“시간아, 제발 천천히 가라.”

그렇게 빌었지만 어느새 금요일이었다. 매일처럼 수술이 벌어졌지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편한 일과였다. 피곤이 완전히 풀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충분히 잘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한결 개운해진 데다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웠다.

여건이 된다면 몇 주고 더 음성에 있고 싶었다.

오늘도 이준영 과장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언제 출발할 거야?”

“일요일 새벽에 일찍 출발하면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늦어. 내일 오후에 가. 그래야 다음 주부터 일을 하지. 마지막 날이니까 오늘은 고기 먹자.”

김지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준영 과장이 삼겹살을 시켰다. 단 몇 시간이라도 더 있고 싶었지만, 구미에서의 근무를 생각하면 맞는 말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지글지글 고기만 익어 갔다. 말없이 노랗게 변하는 삼겹살만 보던 이준영 과장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배웠어?”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대도 하지 못했을 정도로 생각보다 많은 수술을 보았고, 분명 배웠다. 하지만 안개처럼 흐릿해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수술을 보면서 느낀 점은 정말 많은데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손이 빠른 게 부러워?”

“그런 것 같은데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정확하고 침착했을 때가 부러웠어?”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분명 부러운 일인데 막상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준영 과장이 웃었다.

“네가 지금 무엇을 배웠는지 말할 수 있다면 1년차가 아니겠지. 그래도 기본이 무엇인지는 대충이라도 알았을 거야. 수술을 더 많이 보면 저절로 알 수도 있고.”

“그게 참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해?”

“처음에는 수술을 어떻게 하는 줄 아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다른 생각이 듭니다.”

이준영 과장이 빤히 김지훈을 보았다.

“솔직히 수술 기구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떨 때 어느 기구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이 되는 수술인 아뻬도 환자나 상황에 따라 다 다르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수술을 한다는 의미도 확실히 모르겠고, 언제 과감해야 할지 판단을 하지도 못하겠습니다. 볼수록 더 어렵다는 생각만 든 것 같습니다.”

겸손이 아니었다. 이준영 과장의 수술을 보며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었다.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던 이준영 과장이 피식 웃었다.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면을 말한 것이다.

나름 수술을 하며 생각했던 것을 말해 주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기본은 수술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수술을 지배하는 거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네 말대로 먼저 기구를 마치 내 손처럼 움직여야 하겠지.”

“따로 연습을 해야 될까요?”

“사람의 배 속과 젓가락 하나면 먹을 수 있는 삼겹살은 달라. 직접 수술을 해야지. 어떤 수술을 하더라도 최고의 집중력을 갖고 지금처럼만 준비하면 조금 더 나아질 거야.”

역시 경험뿐일까?

김지훈은 입술을 모으며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김지훈, 넌 이제 1년차야. 설마 단번에 몇 년씩 수련한 선배들을 따라잡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당연합니다, 선생님.”

“조급해하지 마, 김지훈.”

“예, 선생님.”

“오늘 술 한잔하자.”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함부로 먼저 꺼낼 말이 아니었기에 참았을 뿐 정말 바랐던 일이었다. 하지만 응급실 환자가 마음에 걸렸다.

“왜, 싫어?”

“아닙니다. 그런데 응급실에 환자가 오면 어떻게 하죠?”

“음주 수술 하지, 뭐.”

“예에? 선생님!”

“농담이다. 오늘은 환자 오면 다른 병원으로 보내자. 환자들에겐 미안해도 널 또 언제 볼지 모르니 어쩔 수가 없다.”

눈을 동그랗게 떴던 김지훈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농담이라지만 덤덤하기만 한 목소리에서 이준영 과장의 마음이 느껴진 것이다.

‘스승님, 고맙습니다.’

소주 한 병이 들어왔다.

한 잔 한 잔 비우다 보니 어느새 술기운이 확 올랐다.

얼굴이 시뻘게진 이준영 과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김지훈, 수술은 말이야, 일종의 장애물 경기야.”

“장애물 경기요?”

“너는 지금 출발선에 섰어. 총소리가 나면 달려 나가겠지. 하지만 처음부터 무턱대고 전력 질주를 한다면 완주할 수 있겠어? 거리가 길고 짧은 문제가 아니야.”

김지훈이 눈을 치켜뜨며 생각에 잠겼다.

“없을 것 같습니다. 전력으로 달린다면 아마 얼마 못 가서 장애물에 걸려 넘어질 것 같은데요.”

이준영 과장이 잔을 들었다. 한 잔을 또 비웠다.

“그렇지. 수술도 똑같아. 달려야 할 때는 달리고, 장애물이 나타나면 극복을 해야지. 하지만 의사는 달리기 선수가 아니야. 무턱대고 넘어서 빨리 가도 상을 받지는 못해.”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게 완급이야. 때론 장애물을 피해서 달릴 수도 있어야 해. 수술은 정해진 모든 규칙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게임이 아니거든. 돌아가도 된다는 말이야.”

김지훈이 딸꾹질을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감히 이준영 과장 앞에서? 많이 컸다.

“아! 예전에 선생님이 손가락으로 아뻬를 막 휘저었을 때처럼요? 농양 환자 있었잖아요.”

“맞아, 그거야. 수술을 하는 집도의에겐 출발선과 결승선만 같아. 만일 앞에 장애물이 있다면 단호하게 결정을 내려야 해. 피해 가든지, 아니면 훌쩍 뛰어넘든지. 그걸 잘하면 실력 있는 놈이고, 못하면 이거야.”

이준영 과장이 엄지로 바닥을 가리켰다.

김지훈이 엄지를 척 추켜올리며 씨익 웃었다.

“전 반드시 이게 되겠습니다, 선생님.”

“당연히 그래야지. 나보다 훨씬 난놈인데. 한 잔 마셔.”

소주병이 하나둘 늘어났다.

식당이 끝날 때까지 술을 마셨다.

비틀거리는 이준영 과장을 부축한 김지훈의 입가에 행복이 가득 걸렸다. 존경하는 스승과 술을 마실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문득 이혁민 교수가 생각났다.

“선생님, 이혁민 교수님 아시죠?”

“어, 잘 알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구미에 이혁민 선생님께서 오셨었습니다. 입국식 때도 언뜻 좋은 얘기를 해 주셨던 것 같은데 기억은 잘 안 나구요.”

“근데 갑자기 이 교수는 왜 찾아?”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술기운을 빌려도 직접 말하기에는 조금은 창피한 말이 생각난 것이다.

“선생님은 스승님이시구요. 이혁민 선생님은 제 멘토이십니다. 괜찮죠, 스승님.”

술이 머리끝까지 오른 이준영 과장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스승과 멘토? 그게 무슨 차인데? 똑같은 거 아냐?”

“같은 말인가요?”

‘결과적으로는 모두 네가 관련된 일이지만, 이 교수와 나와의 관계는 물론 금 과장의 생각도 아예 모르는 게 나아.’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이준영 과장이 너무 술에 취했는지 거의 넘어질 뻔했다. 김지훈이 급히 부축을 하자 이준영 과장이 척 어깨에 팔을 둘렀다.

식당을 나오자 한여름 밤의 더위가 후끈하게 몰려왔다.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머리가 어질어질해 이혁민 교수와 어떤 관계인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택시를 타고 이준영 과장 집으로 갔다.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이준영 과장이 엉뚱한 말을 했다.

“김지훈, 너 혼자지?”

아마도 이혁민 교수에게 들었을 것이다. 이준영 과장답게 이런 문제도 참 무덤덤하게 물었다. 김지훈은 이런 모습이 오히려 편했다.

“예, 혼잡니다.”

“의료 봉사 때 온 아가씨 괜찮더라. 너랑 잘 어울려. 정훈철 PD 가족도 좋은 사람들처럼 보이고. 오래 살아도 주변에 그런 사람들 있기가 쉽지 않아. 고마운 일이야.”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이준영 과장이 나직하게 코를 골았다.

잠시 후, 집에 도착해 이준영 과장을 침대에 눕힌 김지훈이 조용히 빠져나왔다.

“스승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왔지만 행복하기만 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침대에 누워 있던 이준영 과장이 슬며시 눈을 떴다.

“스승이라, 듣기 나쁘지 않네. 네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정훈철 PD와의 인연은 끝까지 유지했으면 좋겠구나.”

병원으로 향하는 김지훈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술자리를 함께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이준영 과장이 한 말을 떠올리자 문득 고경아가 생각났다.

‘괜찮은 아가씨가 나랑 잘 어울린다고 하셨나?’

차창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오늘따라 시원하기만 했다.

그날, 다행히도 응급실은 고요했다.

열심히 일하며 밤을 새웠을 인턴들 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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