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자신만의 수술이 있다 (1)
물론 아뻬가 맞다면 내일 아침에 해도 됐다. 하지만 손에 감이 남아 있을 때 퍼스트를 서고 싶었다.
‘연달아 하면 뭔가 느끼는 게 더 있을지도 몰라.’
아뻬가 맞았다. 이준영 과장에게 노티를 하자 김지훈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득달같이 달려왔다. 마취과 과장에게 연락하자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김지훈 선생, 꼭 이 밤에 해야 하나?)
“예. 과장님께서 하자고 하십니다.”
(에휴! 알았어.)
‘역시 김진호 선생님 같은 사람이 없네. 윤서연, 넌 이런 거 배우면 안 된다.’
여느 때처럼 준비를 하고 탈 거 다 탄 다음 수술실에 들어가자 이준영 과장이 퍼스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이 조심스럽지만 확실하게 말했다. 당장 수술을 하는 것보다 기본을 익히는 게 몇 배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턱대고 수술에 욕심을 낸다면 애초에 오지를 말았어야 해. 난 지금 기본을 배우려고 온 거야. 끝까지 잊지 말자.’
“선생님, 전 퍼스트를 서고 싶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취과 과장과 미스터 최도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수술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 배우러 왔고, 퍼스트도 아직 제대로 서지 못하는데 수술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것도 배우는 거야.”
“전 선생님이 어떻게 수술을 하시는지 보고 배우고 싶습니다. 수술은 구미에서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나직한 신음을 터뜨렸다.
직접 하는 것만큼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전에 기본이 탄탄하지 않으면 도리어 제대로 수술을 하지 못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수술에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1년차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만큼 한계를 경험해야 가능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설혹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해도 자존심 때문에 결국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김지훈의 이런 면은 정말 대단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준영 과장은 말없이 집도의 자리에 섰다.
‘그래. 지금은 나보다 수술을 잘하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겠지만 한때는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고, 인정도 받았었다. 보여 주마. 따라와 봐.’
수술이 시작됐다. 이준영 과장의 손이 마치 날아다는 것처럼 보였다. 김지훈이 정신없이 퍼스트를 섰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팔면 실수할 것만 같았다.
이준영 과장은 수술 도구를 마치 자신의 손의 일부인 것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쓰으윽! 서걱! 툭!
말 그대로 배를 열고 아뻬를 절제한 후 배를 닫았다.
불과 15분 만에 수술이 끝났다.
놀랍도록 빠르게 수술이 끝났지만 모든 과정이 너무도 깔끔하고 깨끗했다. 김지훈에게 보여 주기 위해 허술하게 수술할 이준영 과장도 아니었다.
‘뭐야, 벌써 끝난 거야?’
김지훈이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축이며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그동안 이준영 과장은 자신을 배려해 왔던 것이다. 물론 다른 병원 교수들도 마찬가지겠지만, 4년차와 수술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끝내지는 못했다.
이것이 바로 이준영 과장의 실력이었다.
수술을 끝낸 이준영 과장도 다소 놀란 눈으로 김지훈을 보고 있었다.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마음껏 수술했는데 내 손을 따라왔어? 내 젊은 시절을 보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구나. 김지훈, 너라면 우리가 바랐던 최고의 써전이 될 수도 있겠다.’
어디선가는 막힐 줄 알았다. 그런데 마지막 봉합사를 자를 때까지 제대로 쫓아왔다. 김지훈의 경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후우! 이젠 더 태울 것도 없는데 큰일이네. 타길 바라는 놈을 안 태울 수도 없고.’
쓸데없는 걱정이란 생각에 이준영 과장이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이준영 과장은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한 마음으로 퇴근을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이혁민 교수였다.
이준영 과장은 기분 좋게 웃었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다 보는 날인가?’
“이 교수, 웬일이야?”
(그간 별일 없으셨죠? 말씀드릴 게 좀 있습니다.)
“뭔데?”
이혁민 교수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엉뚱하게도 김지훈을 거론했다.
(제가 저번에 경주에서 있었던 학회에 갔다가 김지훈이 수술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음성에 있을 때 여러 번 수술을 주셨는데, 혹시 그때 뭔가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이준영 과장이 생각에 잠겼다. 김지훈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많았다. 수술실에서도 참 많은 느낌을 받지만 이혁민 교수의 말은 일반적인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그러셨습니까? 전 김지훈의 손 때문에 수술을 주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선생님 손이 김지훈에게도 있더군요. 똑같을 수는 없지만 과감하면서도 완급을 조절하는 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예전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1년차의 미숙함은 있었지만 수술을 참 편하게 하더군요. 그런 생각이 안 드셨습니까?)
남의 손은 잘 보이지만 자신의 손은 잘 못 보는 모양이었다. 이혁민 교수는 단박에 김지훈에게서 이준영 과장의 손을 보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비슷한 스타일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사마다 다 스타일이 달랐다. 그동안 수많은 의사를 보았지만 비슷하다는 느낌조차 받은 적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생각이 든 이준영 과장이 입을 열려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득 전공의 시절과 서울 병원에서 근무한 때가 생각난 것이다. 함께 수술하면 유독 편안한 의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수없이 손을 맞췄을 때였다.
김지훈과는 어땠을까?
김지훈은 수술을 몇 번 해 보지도 못했다. 이준영 과장의 관점에서는 이제야 퍼스트를 제법 선다는 소리는 들을 만한 정도였다. 그런데 확실히 편했다.
자연스럽게 오늘 일이 떠올랐다.
언제 과감해야 할지, 언제 신중해야 할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자신의 손을 절대 따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그랬나? 그럴지도 모르지.’
이준영 과장의 말이 없자 이혁민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3개월을 데리고 계셨는데 그걸 못 느끼셨습니까. 참 희한한 일입니다. 김지훈이 잘만 키우면 최고라는 소리를 당연하게 들었던 선생님보다 수술을 더 잘할 것 같습니다.)
“최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런데 갑자기 김지훈 얘기는 왜 꺼낸 거야? 그놈이 지금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예에? 김지훈이 왜 거기 있습니까?)
이혁민 교수가 크게 놀라 목소리까지 높였다.
구미에 있어야 할 김지훈이 음성에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준영 과장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놈이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에 있다니 놀랄 수밖에 없겠지. 솔직히 휴가 때 혹시 오지 않을까 기대를 했던 나도 막상 그놈을 봤을 때는 정말 많이 놀랐으니까 무리도 아니지.’
“수술을 배운다고 휴가 받자마자 왔어. 지난 일요일에 의료 봉사가 있었는데 거기에도 왔더군.”
(허어! 그놈이요?)
기가 찬 지 이혁민 교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김지훈만큼 열심히 하는 전공의는 못 봤다. 아직 직접 수련을 담당한 적은 없었지만 인턴 때의 경험과 들리는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휴가까지 반납하고 배우러 갔어? 이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놈이었네.’
김지훈을 다시 판단해야 할 때였다.
타고난 능력은 신현수가 더 나을지도 몰랐다. 가장 빡빡하다는 서울에서는 물론 1년차에게는 지옥이라는 천안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
수술하는 모습에서도 김지훈보다 더 매끄러운 면이 있었다. 김지훈이 흐름을 탄다면 신현수는 침착하고 정확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지훈에게는 특별한 면이 있었다. 누구나 갖고 있지만 실제로 실행하기에는 정말 어려운 것들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꿈을 향한 집념.
환자에 대한 정성과 사랑.
결코 자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열망.
금경태 과장이 음성에 보내는 순간 누구나 꺾이고도 남았을 테지만, 지금까지 절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이 궁금해진 이혁민 교수가 물었다.
‘그 정도로 수술을 하고 싶었나?’
(수술을 좀 주셨겠습니다.)
“수술? 오늘 아뻬를 준다니까 안 받았어. 희한한 놈이야.”
(음성까지 가 놓고는 수술을 안 받았다구요?)
“그래. 내가 수술하는 것을 보면서 기본을 배운다고 퍼스트를 서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더군. 웃기는 놈이지?”
이혁민 교수가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지 못했다. 갑자기 꿈과 열정이 넘쳤던 전공의 시절이 생각나며 가슴 벅찬 흥분을 느낀 것이다.
묵묵히 전화기를 들고 있던 이준영 과장이 기지개를 펴며 물었다. 간만에 수술을 연이어 몇 개를 해서 그런지 몸이 뻐근했던 것이다.
‘이 정도에 피로를 느끼다니, 나도 늙었나?’
“이 교수, 그런데 왜 전화한 거야?”
이혁민 교수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선생님, 기회가 된다면 서울로 오셔야겠습니다. 김지훈 핑계를 대고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이젠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겠습니다.)
“서울로 오라니, 무슨 소리야? 어디를 가도 여기와 다를 바가 없어. 수술 많은 병원에서 이 나이가 된 외과 의사를 쓰겠어?”
이혁민 교수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 결정된 바는 없습니다만, 신상민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우리 과를 개편해 보고자 합니다. 그때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소아과 과장인 신상민 선생님이 어떻게 외과를 건드려?”
(혁신 위원회에 부위원장으로 계시지 않습니까. 이번에 각 과의 발전 방향이 안건으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신동석 이사님이 직접 안건을 내셨다고 하니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장례식장 문제가 금 과장만의 문제일 것 같아? 신동석 이사도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거야. 만일 그렇다면 금 과장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을지도 몰라. 어차피 서로에게 손해가 아니잖아.”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1년차에 신현수가 있습니다.)
“신현수? 누군데?”
(신동석 이사님의 아들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금 과장의 전횡이 장기적으로는 해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 과의 힘에 병원장 자리라도 꿰차게 되면 신동석 이사라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 아닙니까? 훗날을 생각하면 신현수에게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일견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준영 과장이 서울 병원으로 와야 한다는 명분까지 줄 수는 없었다. 10년 전에 떠났는데 다시 교수 자리를 준다는 것은 수많은 반발에 직면할 문제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게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 같은데. 설혹 교수 자리가 있다고 해도 문제가 너무 커.”
(방안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먼저 선생님께서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죄송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은 알고 계셔야 합니다.)
이혁민 교수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이준영 과장도 차마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겠네.”
(그럼 일단 동의하신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래야 확실하게 김지훈을 지켜 줄 수 있습니다.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란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준영 과장이 이마를 주물렀다.
솔직히 금 과장으로부터 김지훈을 지켜 주고 싶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후배가 꺾이는 것은 일반 외과 차원에서도 큰 손실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날 스승이라고 부른 놈을 지켜 주지 못한다면 그땐 10년이 아니라 평생을 후회하겠지.’
스승은 제자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 스승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스승으로 남고 싶었다. 김지훈이 허리가 굽고, 머리가 희끗한 자신을 찾아와 웃어 주기를 바랐다.
음성에 안주하는 이상 발전은 없을 것이다.
김지훈을 다시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혹여 다시 본다고 해도, 지금은 1년차라 가르칠 것이 있다고는 하지만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설혹 가능하다고 해도 그다음 해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김지훈과 자신을 위해서라도 큰 무대로 나가 스스로 발전해야 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알겠네. 단, 자네가 다치는 것은 용납 못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예전의 이혁민이 아닙니다. 절 보시면 실망하실지도 모릅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이혁민 교수도 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