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59화 (159/1,329)

제7화 과장님, 배우러 왔다니까요 (1)

‘엄청 맛있네. 야! 3개월 동안 있으면서 이걸 몰랐다니 정말 억울하다. 하긴, 먹을 시간도 없긴 했지.’

남은 닭 뼈에 붙은 살까지 깨끗하게 발라 먹는 김지훈을 보며 다들 웃었다.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시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이준영 과장도 나직한 목소리로 꾸준히 입을 열었다.

특히 정훈철에게 몇 번이나 김지훈을 잘 봐달라는 말까지 했다. 가끔 고경아를 보며 씨익 웃기까지 했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정말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뜬 거 아냐?’

김지훈이 누룽지를 먹으며 힐끗힐끗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얘기가 흘러가다 의료 봉사에 이르렀다.

김지훈의 거짓말이 그대로 들통이 났다.

정훈철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오늘 하룬데, 왜 며칠이라고 했어? 어떻게 된 거야?”

누룽지를 먹던 김지훈이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그게 사실은 제가 선생님께 조금 더 배우기 위해 음성에 온 거거든요. 그런데 마침 휴가가 겹쳤고, 경아 씨에게 그대로 말하려니까 왠지 쑥스럽더라구요. 죄송합니다.”

사실 김지훈의 잘못은 아니었다. 고경아와 정훈철이 음성에 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도리어 연락도 없이 왔기에 정훈철도 화를 낼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솔직하게 얘기를 했으면 더 좋았지. 그런데 너 엄청 고생한다며. 처제가 100일 당직인지 뭔지를 너만 더 선다고 끌탕을 하던데. 네가 어떻게 일하는지 듣는 내가 다 아찔하더라. 그런 놈이 휴가 때까지 일을 하고 싶어? 니네 병원 교수들도 작작 좀 해야지. 그러다 사람 잡겠다. 과장님, 솔직히 안 그렇습니까?”

“그… 그렇죠.”

이준영 과장이 커피를 마시다 말고 움찔거렸다. 100일 당직을 더 세우라고 부탁한 당사자니 놀랄 만도 했다. 헛기침을 하며 잠시 딴청을 피우던 이준영 과장이 슬며시 귀를 기울였다. 정말 무슨 생각으로 왔는지, 혹시 다른 일은 없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이 구미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최선희를 보며 안타까웠던 마음과 만일 자신의 실력이 모자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고 솔직하게 토로했다. 다들 한숨을 쉬며 말을 잃었다.

묵묵히 김지훈을 보던 이준영 과장이 물었다.

“일주일 더 배운다고 그게 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술 욕심이 아니고?”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구미에서는 어렴풋하게 들었던 생각이 이준영 과장을 보자 명확해졌다.

“집도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구미에서 일하면서 어시스트를 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습니다.”

“어시스트가 왜 중요한데?”

“기본이 부족하면 수술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술의 기본은 어시스트를 서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제야 조금은 그 말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이준영 과장을 빼고는 누구도 일반 외과 의사에게 수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김지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모를 수는 없었다.

‘기본을 무시하면 자만하기 마련인데, 정말 고맙다.’

잠시 김지훈을 쳐다보던 이준영 과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알았다.”

정훈철이 이준영 과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비록 친형은 아니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과장님.”

말과는 달리 정말 친형처럼 김지훈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이준영 과장이 입술을 모은 채 웃다 말고 갑자기 맥주를 시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 잔 드리겠습니다. 받으시죠.”

“감사합니다. 과장님도 제 술 한 잔 받으십시오.”

잔이 오고 가자 잠시 무거웠던 분위기가 풀렸다.

병원 근무만 아니었다면 술 한잔하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

두 잔째 맥주를 비운 이준영 과장이 허리춤을 보았다.

병원 응급실에서 콜이 온 것이다.

“병원에 환자가 온 모양입니다. 죄송하지만 김지훈과 함께 일어나야겠습니다.”

“예, 그러셔야죠. 오늘 정말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었다. 김지훈이 간다는 소리에 승희가 울먹이며 매달렸다. 승희를 꼭 안으며 볼에 입맞춤을 한 김지훈이 고경아를 보았다.

“미안해요, 경아 씨.”

“아니에요. 공연히 전화를 해서 신경 많이 쓰셨죠? 이런 건 거짓말 안 하셔도 돼요. 오늘 지훈 씨 덕분에 저도 많은 걸 배웠어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고경희가 꼭 밥 사라고 소리를 질렀다.

“오빠, 밥은 언제 살 거예요? 그러다 양치기 소년이 되는 수가 있어요.”

“12월에 올라가니까, 그때 꼭 사 줄게. 걱정하지 마.”

“지훈아, 우리도 사 줄 거지?”

“예, 형님. 월급이 그대로 있어요. 걱정 마세요.”

김지훈이 정훈철 가족과 고경아가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너무 고마웠다. 이준영 과장이 경적을 울리고서야 차에 탔다.

‘서연이가 안 와서 정말 다행이다.’

문득 윤서연이 안 왔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사랑원 식구를 치료할 때 본 고경아의 미소가 떠올랐다.

김지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내내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김지훈이 나직하게 코를 골고 있었다.

이준영 과장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김지훈은 자신이 집도식 때 받은 메스를 준 제자였다. 휴가 때 다시 오겠다는 말에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기대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정말 가슴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뿌듯하기만 했다. 하지만 배우고자 하는 김지훈의 열망과 의지는 이준영 과장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복막염 수술까지 주었었는데 어떤 식으로 트레이닝을 시켜야 하지? 이삼 년차에 준해 가르쳐? 아니야, 수술을 잘한다고 해도 1년차에 불과해. 기본이라고 했나?’

이준영 과장이 끄덕끄덕 졸고 있는 김지훈을 보며 눈가를 좁혔다. 일주일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확실하게 가르치고 싶다는 의지가 감돌았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이준영 과장이 고갯짓을 했다.

환자를 보라는 말이었다.

당직 인턴이 2명의 환자를 노티 했다.

“탈장하고 아뻬? 탈장 환자가 왜 응급실로 왔지?”

탈장으로 응급실에 오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탈장 환자부터 찾았다. 그런데 마침 환자가 화장실에 가 자리에 없었다.

“일단 아뻬가 의심되는 환자부터 보자.”

환자를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증상이 전형적이지 않았고, 복부 진찰상 통증을 느끼는 부위도 아뻬의 위치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다른 경우라면 가장 흔한 감별 진단인 장간막 임파선염부터 의심했을 것이다.

‘이상한데. 임파선염치고는 너무 아파하네. 압통에 반사통까지 제법 느껴지고. 일단 입원을 권유하고 지켜보는 게 좋겠다.’

나름 몇 개의 임프레션(임시 진단)을 내리고 이준영 과장에게 노티를 했다. 김지훈이 진료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준영 과장이 직접 환자를 진찰했다. 다른 때보다 상당히 신중하게 진찰을 해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선생님도 확실한 진단을 못 내리시는 건가?’

진찰을 끝낸 이준영 과장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경우에는 첫 번째 임프레션으로 게실염을 생각해야 하는데 아직은 경험이 부족하구나. 다시는 잊지 않도록 단단히 가르쳐야겠어.’

“뭐가 의심돼?”

“장간만 임파선염이 제일 의심되지만 이뻬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

“아뻬가 전형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 있는 경우가 10프로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임프레션이 임파선염이야? 이 배가 정말 내과 배인지, 외과 배인지 구분이 안 돼? 넌 수술을 결정해야 하는 일반 외과 의사야. 다시 생각해.”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문득 자신도 약물 치료보다는 수술을 할 가능성이 높은 환자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진단이 애매모호할 때 내리는 일반 외과의 임프레션!

Surgical abdomen(써지칼 업도멘:외과 복증).

김지훈이 첫 번째 임프레션으로 외과 복증을 쓰자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를 저버리진 않았다.

‘그렇지. 진단은 힘들어도 일단 외과 배인지 아닌지부터 확실하게 결정해야지.’

외과 복증은 질환을 특정하지 않은 광범위한 진단명이었다. 말 그대로 어떤 의사가 보아도 환자가 수술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진단명이었다.

즉 무리하게 약물 치료를 시도하기보다는 외과적 질환을 먼저 의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진단을 위한 검사도 외과 질환에 준해서 시행해야 한다. 사소한 문제 같지만 진단명은 최대한 구체적이어야 했고, 지금 이 경우가 그랬다.

“써지칼 업도멘에 준해서 오더 내고 입원시켜.”

처음 내리는 임프레션이었다. 김지훈이 고민을 거듭한 끝에 복부 초음파와 CT를 포함한 오더를 냈다. 오더를 본 이준영 과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통과! 외과 복증은 이렇게 오더를 내면 되는 거구나. 첫 환자부터 처음 보는 환자가 오다니, 출발이 아주 좋네.’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김지훈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음 환자를 보았다. 탈장 환자가 잔뜩 인상을 쓰며 침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허리를 곧게 펴질 못했다.

‘탈장 환자가 아닌가? 왜 저렇게 아파하지?’

약간의 의문을 가진 채 환자를 진찰하던 김지훈이 옆에 서 있는 인턴을 보며 인상을 팍 구겼다.

‘몰라서 그랬겠지만,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다.’

내원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지만 처음과 비슷한 상태라 불행 중 다행이었다. 환자 앞에서 혼을 낼 수는 없었다. 김지훈이 슬며시 인턴을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이 환자, 언제 왔어?”

“한 시간 조금 넘었습니다.”

“처음 올 때부터 이랬어?”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때 바로 노티를 했어야지, 인마. 빠져 나온 장이 배 속으로 안 들어가는 걸 봤을 거 아냐. 너 탈장에서 응급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 안 배웠어?”

김지훈의 나직한 목소리에 인턴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우측 서혜부 탈장은 확실했다. 장이 빠져나온 부분을 만질 때마다 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문제는 인위적으로는 장을 배 속으로 다시 밀어 넣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벌써 장이 죽은 거 아냐?’

김지훈이 간호사를 불러 바이탈을 다시 체크하게 했다.

“혈압 등은 다 괜찮은데 체온이 39도예요.”

“일단 항생제부터 투여해요. 인턴 선생은 폴리 끼우고.”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지훈을 본 이준영 과장이 뚜벅뚜벅 환자에게 다가왔다. 곧 나직한 신음을 터뜨리며 환자와 보호자에게 병력을 묻기 시작했다.

김지훈이 귀를 바짝 열고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저으며 김지훈에게 물었다. 증상이 발생한 지 하루가 지난 후였다. 너무 늦게 온 것이다.

“진단은?”

“감돈 된 탈장으로 판단됩니다.”

“치료는?”

“응급으로 탈장 부위를 열어서 장을 살려야 합니다. 만일 장이 괴사했다면 절제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술 준비해.”

이준영 과장이 보호자에게 수술에 대한 설명을 하는 동안 김지훈은 수술에 필요한 검사와 오더를 냈다.

‘꽤 아팠을 텐데 어떻게 참았을까. 장까지 잘라야 하면 수술이 꽤 커지는데, 큰일이네. 어제 왔으면 탈장 수술만 하고 끝났을 텐데, 빨리 좀 오지.’

문득 의료 봉사를 하면서 본 환자들까지 생각난 김지훈이 한숨만 푹푹 쉬었다. 인간의 몸은 중요한 타임을 놓치면 훨씬 큰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탈장은 장이 자유롭게 드나들어 다른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다. 하지만 탈장이 유발되는 작은 구멍으로 너무 많은 장이 빠져나와 꽉 끼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감입된 탈장(incarceration)은 빠져나온 장이 자연적으로는 배 속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쉽진 않지만 직접 손으로 다시 밀어 넣어 주고 복구가 되면 일반 탈장과 똑같이 수술을 하면 된다.

감돈 된 탈장(strangulation)은 오랫동안 장이 빠져나와 장의 혈류가 막혀 일부가 괴사하는 경우를 말한다. 손으로는 복구가 불가능하고, 패혈증을 비롯한 합병증의 발생 위험이 높아 응급으로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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