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더 배우고 싶습니다 (2)
영훈 엄마의 수다가 등 뒤로 따라붙었다.
‘정도 참 많고, 말도 참 많아.’
김지훈이 슬며시 웃으며 사랑원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직원의 안내로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살폈다.
욕창이 심한 환자.
피부병에 긁어서 난 상처가 덧나기까지 한 환자.
곳곳에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노력한 흔적은 많이 보였다. 하지만 위생 상태는 좋지 못했고, 무엇보다 환경이 열악했다. 김지훈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고경아를 보았다.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경아 씨, 욕창 치료부터 합시다.”
욕창을 치료하며 직원에게 관리법을 설명했다.
많은 부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손도 모자라고 치료할 의료 물품도 부족한 것이 많다고 호소를 했다. 마음 아픈 현실이었지만 당장은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만이라도 최선을 다하자.’
더욱 신중하게 환자를 치료하던 김지훈의 눈에 문득 땀을 흘리며 자신을 돕는 고경아가 보였다. 제대로 닦질 못해 더럽기만 한 환자의 몸을 스스럼없이 만지고 있었다.
힘이 들어 낑낑대면서도 눈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정말 예쁘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그때 정훈철이 카메라를 들고 들어왔다. 김지훈에게 치료를 계속하라는 손짓을 하며 열심히 카메라를 돌렸다.
“지훈이, 약간만 옆에서 치료할래? 처제는 조금 더 뒤로 가고. 그렇지, 그래야 환자들이 잘 나와.”
단순히 촬영을 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기에는 정훈철의 표정이 너무 심각했다.
여러 각도에서 환자들을 찍던 정훈철이 땀을 뻘뻘 흘리며 옆방으로 건너갔다. 힐끗 김지훈을 보며 주먹을 흔들었다. 언제나 믿고 의지해도 될 정도로 든든했다.
김지훈이 남은 환자를 진찰하며 필요한 치료를 했다. 불과 30명도 안 되는 인원이었지만 점심때까지 꼬박 매달려야 했다. 스스로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까닭에 손이 갈 곳이 너무 많았다.
1시가 넘어서야 오전 진료가 끝났다.
한여름의 더위에 다들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도 보람 찬 일을 한 후 다 같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없던 입맛도 다시 생길 판이었다.
진료를 받았던 환자들도 병원에서 제공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최치수 과장이 원장과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이러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과장들은 물론 직원들의 얼굴이 꽤 밝았다.
김지훈 역시 환자를 볼 때는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즐겁기까지 했다.
“오길 정말 잘했네요.”
고경아의 말에 김지훈이 콧소리를 냈다.
“우리가 필요한 사람이 병원 밖에도 참 많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런 곳에 와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지훈 씨의 꿈은 어떻게 하구요?”
김지훈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내 꿈을 얘기했었나요?”
“어머머! 술 취해서 한 말이라 기억을 못하는 모양이네.”
“하하하! 그런가 봐요. 그런데 최고의 써전이 된다는 게 뭔지 아직도 흐릿해요. 수술만 잘한다고 최고는 아니겠죠?”
고경아가 대답 대신 미소만을 보냈다.
정훈철의 가족과 고경희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몸은 힘들지만 이만큼 보람이 가득한 일도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다들 그늘에 앉아 쉬었지만 김지훈은 그럴 틈이 없었다. 어린 승희의 체력이 정말 만만치 않았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된 김지훈이 구원을 청했지만 다들 고개를 돌리며 딴청만 피웠다.
‘치사한 인간들. 훈철이 형하고 형수는 엄마 아빤데 아예 보이지도 않네. 어디 간 거야?’
어디 가긴?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 발 담그고 있지.
오후 진료가 시작됐다.
김지훈도 이제야 칭얼대는 승희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무더운 날에 승희가 한수임의 등에 달라붙었다. 단 한 시간도 안 돼 엄마들이 얼마나 힘든지 뼈저리게 느꼈다.
‘엄마는 누구나 다 위대하다더니. 아니지. 그럼 점심때 보였어야 되잖아? 형수는 매일 승희를 봐야 하니까 그렇다 치고, 훈철이 형은?’
김지훈이 카메라를 멘 정훈철을 째려보았다.
그러거니 말거나 정훈철은 카메라를 돌리기에 여념이 없었고, 환자들의 진료를 미룰 수도 없었다.
환자들의 줄이 점점 짧아졌지만 4시가 넘어서야 진료를 끝낼 수 있었다. 작고 외진 동네라 여겼는데 의외로 환자가 많아 준비한 물품이 부족할 정도였다.
김지훈은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사실에 꽤나 놀랐다. 따가운 햇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진료를 받고 돌아가는 환자들 생각에 은근히 가슴이 아려 왔다. 느낀 점이 많았다.
‘최고의 지식과 실력으로 대학 병원에 근무한다고 최고의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파도 병원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잊지 말자.’
한숨을 돌린 이준영 과장이 땀을 닦고 있었다.
덩치가 산만 한 사람이 굳은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앉아 있다면 누구도 쉽게 다가가질 못할 것이다. 하지만 김지훈에게는 그런 모습이 친근하기만 했다.
생각해 보니 고경아가 인사도 하지 못했다.
“경아 씨, 아침에 인사 제대로 못 드렸죠? 음성 있을 때 날 가르치신 선생님이세요. 인사합시다.”
고경아가 움찔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정훈철은 아직도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한수임과 고경희에게 손짓을 했다.
“언니, 지훈 씨가 저기 보이는 선생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리자고 하네요. 경희야, 가자.”
역시 순간적이나마 멈칫거렸다.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음성에 처음 왔을 때 김대성 뒤에서 나타난 거구의 이준영 과장을 보고 자신도 놀랐었다. 그러니 여자들은 오죽할까?
‘내가 봐도 선생님 얼굴은 확실히 무서워. 그래도 인사드릴 때 얼굴들 펴세요. 선생님께도 부탁드립니다.’
다들 김지훈의 뒤에 서서 졸래졸래 따라왔다.
“선생님, 아침에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인사는 무슨. 됐어.”
역시 이준영 과장이었다. 낮고 굵은 목소리로 툭 잘라 버렸다. 그래도 김지훈 뒤에 서 있는 여자들 때문인지 눈길까지는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분들은 아침에 보신 정 PD님과 같은 온 분들입니다. 이분이 정 PD님 사모님 되시고 여기 둘은…….”
김지훈이 말을 얼버무렸다. 자신 때문에 왔으니 이름이 아니라 어떤 관계인지 밝히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순간 어떤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입이 막힌 것이다.
한수임이 힐끗 김지훈을 째려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한수임이라고 합니다.”
“이준영입니다.”
“저희 딸 승희예요. 승희야, 인사드려야지. 의사 선생님이셔. 삼촌보다 높으신 분이니까 예쁘게.”
한수임의 뒤에 숨어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던 승희가 앙증맞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래, 네가 승희구나. 아주 예쁘네.”
고경아도 뭔가 새침한 표정으로 김지훈을 보고는 인사를 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고경아라고 합니다. 얘는 제 동생이고요.”
“안녕하세요, 고경희예요.”
다들 목소리가 밝기만 했다.
무서운 게 아니라 낯설었을 뿐이었다.
“반가워요. 이준영입니다. 세 분 다 미인들이십니다.”
이준영 과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게 무슨 일일까? 혹시 젊은 여인들 때문에?
세 여인들도 밝게 웃고 있었다.
김지훈이 얼빠진 표정으로 눈만 껌뻑거렸다.
어느 쪽을 보아도 완전히 예상 밖의 일뿐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정말 놀랍게도 한술 더 떴다.
“그런데 경아 씨는 지훈이하고 어떤 사이십니까? 아침부터 지금까지 함께 계시네요. 둘이 사귀는 것처럼 보여요.”
‘선생님, 왜 이러세요? 평소처럼 행동하셔야죠. 갑자기 말은 또 왜 이렇게 많으세요. 이 사람들 환자 아니에요.’
김지훈이 난감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고, 고경아는 얼굴이 발개진 채 배시시 웃기만 했다.
“제 짐작이 맞군요. 그렇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오늘 다들 수고하셨는데 시간이 되시면 제가 저녁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어머! 언니, 어떻게 하죠?”
“시간은 있는데 선생님께 폐가 아닐지 걱정이 되네요.”
“전 괜찮습니다. 하하하!”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준영 과장이 이렇게 호탕하게 웃는 것은 처음 봤다. 한수임이나 고경아도 좋아하고 있었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멍청히 서 있는 김지훈을 보며 혀를 찬 이준영 과장이 다시 웃었다.
“음성에 오시면 꼭 드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닭백숙과 누룽지를 잘하는 곳이 있습니다. 마음에 드실 겁니다.”
‘난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뭐야?’
“어이쿠! 저도 여기 백숙이 맛있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우리 지훈이 선생님이신데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정훈철까지 와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요. 손님이신데요.”
한껏 웃는 표정으로 저녁 약속을 잡은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보았다. 표정이 싹 사라졌다.
“김지훈, 이분들 잘 모셔.”
“예, 선생님.”
김지훈에게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빙 둘러앉아 크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일행들을 보며 입맛만 다셨다. 직원들도 해가 서쪽에서 뜬 것처럼 크게 놀란 눈으로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김지훈, 세상은 말이야,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 잘해야 하는 법이다. 네게 이런 인복이 있어 다행이다.’
이준영 과장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연히 김지훈과 눈이 마주치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김지훈에게는 언제나 무뚝뚝하고 근엄한 사람이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어느새 의료 봉사를 마칠 시간이 됐다.
봉사 활동을 총괄하던 최치수 과장이 직원들과 조용히 필요 없는 물품부터 정리를 시작했다. 뜸하게 몇 명의 환자를 더 보고는 5시가 넘어 의료 봉사를 마쳤다.
다들 아쉬워하며 사랑원 식구들과 작별을 했다.
차를 타던 김지훈이 갑자기 사랑원 원장에게 달려갔다.
무엇 때문인지 한참 실랑이를 벌이고 돌아왔다.
이준영 과장이 창밖을 보며 물었다.
“뭐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선생님.”
‘얼마 안 되지만, 의국비를 이런 데 쓰는 게 더 좋겠지? 사랑원 식구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
김지훈이 자리에 앉으며 맑게 웃었다.
단 하루였지만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조금은 더 알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프고 고통스러워하는지 절대 잊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가슴속에 품은 꿈과 희망은 최고의 일반 외과 의사가 되는 것이었지만 결코 상충되는 일이 아니었다. 환자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실력만 뛰어나다면 최고의 의사가 되기는커녕 반쪽짜리에 불과할 것이다.
이준영 과장이 원장에게 따로 식사를 한다는 양해를 구하고 저녁 식사 장소로 향했다. 함께 탄 김지훈이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가는 내내 한마디도 없었다.
‘아! 왜 갑자기 지킬 박사와 하이드 생각이 날까?’
입맛을 다시던 김지훈의 눈이 슬슬 눈이 감겼다.
그간 쌓인 피로와 한여름의 땡볕을 이겨 낼 몸이 아니었다.
한쪽으로 몸이 쏠리는 느낌에 눈을 뜬 김지훈이 멍한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장수촌!
닭백숙과 누룽지!
음성과 충주 사이에 백숙집이 꽤 여러 곳 있었다. 그중 제일 잘하는 집이라며 이준영 과장이 자신만만하게 일행을 안내했다. 미리 예약을 했는지 도착하자마자 백숙이 나왔다.
무려 3마리!
그다지 양이 많지 않은 정훈철이 다소 당황스럽게 웃었다.
“어이쿠! 선생님, 이거 너무 많이 시키신 것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놈이 제법 양이 많더군요.”
“그렇긴 한데 닭이 작지는 않네요.”
걱정도 팔자였다. 이준영 과장도 대식가였다. 김지훈과 이준영 과장이 한 마리씩 해치우고 남은 사람들이 한 마리를 먹었다. 다들 누룽지 한 그릇을 끝으로 배가 불러 아우성이었지만 김지훈의 손은 여전히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