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더 배우고 싶습니다 (1)
“과장님 연결해 주세요.”
간호사가 깜짝 놀랐다.
“기흉 환자 보시려구요? 선생님 언제 가실 건데요? 설마 다시 근무하러 오신 건 아니죠?”
당연한 질문이었다. 최소한 일주일은 입원해야 할 환자였다. 더구나 입원만 시킨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매일 신경을 쓰고 치료할 사람이 있어야 했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 일주일 동안 휴가라니까요. 그때까지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단 연결해 주세요.”
김지훈의 말이었다. 3개월 동안 너무 강한 인상을 받았던 데다 흉부 도관을 삽입하는 모습도 여러 번 보았다.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연결은 했다.
(여보세요?)
이준영 과장의 무뚝뚝한 말투는 여전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김지훈입니다.”
(김지훈? 너 웬일이야.)
살짝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것만으로도 이준영 과장이 상당히 반가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김지훈이 눈빛을 굳히며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환자 한 명 노티 드리겠습니다. 39세 남자 환자입니다. 금일 교통사고로 인해 발생한 기흉으로 내원했습니다. 튜브 박고, 입원시키겠습니다.”
잠시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김지훈, 너 지금 어디야?)
“응급실입니다, 선생님. 휴가 때 온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그건 그렇다고 치고, 환자는 뭐야?)
“선생님도 뵙고, 더 배우려고 왔습니다. 지금부터 근무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의료 봉사 가실 때 뵙겠습니다, 선생님.”
묘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일주일 동안 있을 거야?)
“예. 일요일 12시까지 구미로 가면 됩니다.”
(그럼 입원시켜.)
뚜뚜뚜뚜뚜!
‘야! 반갑다는 소리는 한 마디도 안 하시네. 어쩌면 이렇게 한결 같으시지? 그래도 웃으시긴 한 거지?’
김지훈이 툭 끊긴 전화를 보며 웃고 말았다.
“간호사, 오더 떨어졌으니까 튜브 준비해 주시. 인턴 선생들, 같이 환자 보자.”
인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김지훈이 환자와 보호자를 만나 입원 동의를 받았다.
인턴들에게 차근차근 술기에 대해 설명을 하며 흉부 도관을 삽입했다. 눈을 부릅뜨고 귀를 기울이는 후배들을 보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확 좋아지며 가슴까지 뿌듯해졌다.
‘자식들! 이 정도에 가지고. 많이 배워라. 하하하!’
아마도 이준영 과장 역시 똑같은 기분일 것이다.
웬만한 환자는 인턴들이 알아서 입원을 시켰다.
김지훈이 간간이 환자를 보며 당직실에서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잠을 잤다. 새벽녘 인턴들이 우물쭈물하며 김지훈을 깨웠다. 일주일간 있겠다고는 했지만, 공식적인 근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노티를 하는 것이 어쩐지 어색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 있어?”
“예. 정형외과 환잔데, 혹시 몰라서 복부 CT를 찍었습니다.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던 김지훈이 조용히 인턴을 보다 한숨을 쉬었다. 옆에 붙어서 가르쳐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낮에 외래를 보아야 하는 과장들에게 응급실에서 그런 역할까지 기대하기에는 큰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휴우! 음성 병원 참 문제네. 나처럼 운이 좋지 않으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3개월을 보내야 하잖아.’
한번 잠이 들었다 깨자 온몸이 나른하기만 했지만 인턴들의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특별한 소견은 없었고, 김지훈이 일어난 김에 알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전했다.
“복부 CT는 이렇게 보면 돼. 그리고 앞으로 일주일간 환자에 대해 잘 모르겠으면 밤중이라도 바로 노티 해. 나도 한참 더 배워야 한다는 것은 알지? 방심하지 말고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자.”
“선생님, 정말 일주일 동안 응급실 환자를 봐주실 거예요? 휴가라면서요.”
“그건 걱정 말고, 환자에게만 신경 써.”
“예, 선생님. 감사합니다.”
인턴들의 목소리가 힘찼다.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었는데 천군만마가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환자에 대한 처리가 빨라지면 그만큼 쉴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날 아침, 김지훈은 밖이 소란스러워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7시였다.
“아아아! 죽겠다. 그래도 잠을 좀 잤더니 낫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벌써 의료 봉사를 갈 준비를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부랴부랴 씻고 밖으로 나갔다.
한창 준비에 열중하던 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최치수 과장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어이구! 김지훈 선생님, 여기는 웬일이십니까?”
“저도 의료 봉사 가려구요?”
“예에, 같이 가신다구요? 근무는 어떻게 하시고?”
“일주일간 휴가입니다. 제가 도울 일은 없나요?”
넋이 빠진 사람처럼 눈만 껌뻑이던 최치수 과장이 손사래를 쳤다. 우두커니 서 있기 뭐해 김지훈이 의료 봉사에 쓸 물품들을 나르자 직원들까지 난리를 쳤다.
기분 좋은 실랑이를 벌이며 옥신각신하던 중 낯익은 차 두 대가 동시에 병원으로 들어섰다.
‘먼저 들어온 차는 이준영 선생님 차인데. 뒤에 있는 차는 훈철이 형 차 아닌가? 에이!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번호를 잘못 알았나 보네.’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며 급히 주차장으로 달려가던 김지훈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거구의 이준영 과장 뒤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김지훈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이준영 과장이 의아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며 다가왔다.
“김지훈, 반갑다. 아는 사람이냐?”
“예, 선생님.”
‘과장님보다는 선생님 소리가 듣기 좋네.’
이준영 과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된 거야?”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간단히 말할 문제도 아니었고, 난데없이 나타난 고경아와 정훈철부터 해결해야 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자세한 말씀은 조금 있다 드리겠습니다. 잠깐 얘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난 직원들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로 와.”
이준영 과장이 성큼성큼 의료 봉사를 준비하는 직원들에게 향했다. 김지훈이 재빨리 반갑게 웃는 고경아와 정훈철에게 달려갔다.
그 뒤에 고경희와 자고 있는 승희를 업은 한수임까지 보였다. 김지훈이 놀란 눈으로 인사부터 하고 물었다.
“안녕하셨어요, 형님. 휴가 간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경아 씨, 어떻게 된 거예요?”
“지훈아, 잘 지냈지? 우리도 휴가 온 거야.”
“물놀이 간다고 들었는데, 근처의 계곡에라도 오신 거예요?”
정훈철이 손가락으로 김지훈을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참! 너도 눈치가 없다, 인마. 휴가 때 꼭 놀아야 해?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의료 봉사도 돕고, 겸사겸사 취재까지 하면 이것도 훌륭한 휴가지.”
김지훈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의료 봉사를 가신다고요?”
“지훈아, 처제가 간호사 아니냐. 처제는 너랑 같이 의료 봉사를 하면 되고, 우리는 사랑원 원생들을 돌보면 되지. 딱 답이 나오잖아. 의사가 아니라도 해야 할 일이 많을 거다.”
“아니, 그건 그런데요, 형님.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정훈철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니까 네가 나랑 같이 얘기를 잘해야지. 그리고 인마, 취재해서 화면 잘 나오면 방송을 탈 수도 있어. 그럼 병원하고 사랑원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냐. 잔말 말고 행정 책임자부터 만나자. 내가 이런 일 한두 번 해 본 게 아니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음성 병원이 방송을 탄다면 병원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김지훈이 정훈철과 함께 최치수 과장을 찾았다.
대화를 나누던 최치수 과장의 입이 점점 찢어졌다.
급히 원장과 과장들에게 정훈철을 소개하고 몇 마디 말을 하자 다들 환영하는 기색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슬며시 빠져나와 김지훈에게 다가왔다.
“PD가 확실해?”
“예, 확실합니다. 작년에 서울 병원 응급실에서 취재도 했고, 장례식장 문제도 저 형님이 터뜨리신 거예요.”
“장례식장?”
김지훈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준영 과장이 묘한 눈으로 정훈철을 보았다.
‘흐음! 이런 인연이 있었어? 금 과장, 김지훈이 어리다고 얕보다가 잘못하면 큰코다치겠어.’
방송국 직원이라면, 그것도 보도국 담당 PD라면 언젠가는 김지훈에게 큰 도움을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약간은 미심쩍어 했던 이준영 과장이 도리어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잠시 후, 병원 차량들과 함께 승용차 한 대가 사랑원으로 향했다. 병원 차량을 타고 가며 나름 기대에 부풀었던 김지훈이 갑자기 홱 뒤를 돌아보았다.
‘윤서연, 설마 너도?’
머릿속에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 마구 떠올랐다.
제법 넓은 사랑원 앞 공터에 천막들이 쳐졌다.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이 벌써부터 진을 치고 있었다.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여 의료 봉사 준비를 마쳤다.
진료가 시작됐다. 길게 늘어선 환자들을 보는 과장들의 얼굴이 진지하기만 했다. 이준영 과장도 환자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며 가끔씩 미소를 머금었다.
과장들과 나란히 앉은 김지훈이 다소 쑥스러운 표정으로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만성 질환과 경증 환자였기에 진료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도리어 환자들의 어렵고 딱한 사정이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는 정말 돈이 없어서, 누군가는 거동이 힘들어서 병원을 찾지 못했다. 그런 환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보람을 느끼면서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20여 명의 환자를 본 후,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병원에 못 오는 환자가 이렇게 많았네요.”
옆에서 진료를 돕던 고경아도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했다.
“학교 다닐 때의 의료 봉사하고는 정말 많이 다른 것 같아요. 그때는 마음만 들떠서 환자분들이 얼마나 불편한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거든요.”
아직도 많은 환자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공짜라서, 혹은 병원에 가기 뭐해서 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고령에 몸이 불편해 병원을 이용하지 못하는 환자들이었다.
허리나 무릎이 아파 움직이기 힘들어도 참는 것을 일상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도시라면 호들갑을 떨었을 상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덧난 사람들도 많았다.
전체 상황을 살피던 최치수 과장이 다가왔다.
“김지훈 선생님, 여기는 과장님들로도 충분하니까 사랑원 원생들부터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저야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간호사들이 좀 모자라서 그런데, 같이 오신 분께도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고경아가 밝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병원용 간이 치료 세트를 들고 사랑원 건물로 향했다.
고경희와 한수임이 자원봉사자들과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 영훈 어머니, 오늘도 오셨네요.”
“어머머! 김지훈 선생님이시네. 내가 왜 선생님을 못 봤을까? 다시 오신 거예요?”
영훈 엄마가 빨래를 하다 말고 치마에 손을 닦으며 다가 와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요, 오늘 과장님들 도우려고 왔어요.”
“아휴! 너무 고맙네요. 음료수라도 드릴까요?”
김지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틈을 타 한수임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음료수를 가져오던 영훈 엄마가 궁금한 눈초리로 다가왔다.
“어머! 김지훈 선생님. 서로 잘 아는 사이예요?”
“네, 우리 오빠예요.”
고경희의 말에 영훈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지훈 선생님이 친오빠야? 아까 고씨라고 했잖아.”
그새 친해진 모양인지 영훈 엄마가 고경희를 동생 대하듯 했다. 정이 많은 만큼 쉽게 친해지는 모양이었다.
“친오빠는 아니고, 저녁 사 준다면서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안 사 주는 나쁜 오빠예요.”
다들 고경희 때문에 웃었다. 김지훈이 짐짓 화난 얼굴로 고경희를 노려보고는 사랑원 건물로 향했다.
“나도 저런 오빠 한 명 있으면 원이 없겠네. 경희 씨, 승희 엄마, 저 선생님이 어떤 줄 알아요? 그러니까 맨 처음 본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