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53화 (153/1,329)

제4화 좌절? 안타까움? (2)

휴지로 코를 틀어막고는 한동안 손으로 꽉 누르던 김지훈이 목을 꺾으며 의국을 나왔다.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간호사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김지훈 샘, 지금 코피 흘리는 거예요?”

“어, 아직도 나오나?”

김지훈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손을 흔들고는 응급실로 내려갔다. 중간에 화장실에 들러 세수를 하고 코피가 멎었는지 확인했다.

이젠 몸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호소를 하고 있었다. 자판기 커피 한 잔을 하며 찬바람을 쐬자 조금은 정신이 돌아왔다.

환자를 보고는 유석재의 오더를 받아 복부 CT를 냈다.

‘이 정도는 나 혼자 봐도 되는데.’

한 시간 이내에 끝날 일이 유석재까지 거쳐야 하는 탓에 30분 정도 더 걸렸다. 함께 CT를 보며 설명해 주는 유석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새벽에 한 차례 응급실 환자를 더 본 후 잠시 눈을 붙였다.

그냥 감았을 뿐인데 어느새 드레싱을 해야 할 시간이 됐다. 회진을 돌고, 하루 종일 수술실에 있다가 허겁지겁 화요일 수술 스케줄을 챙겼다.

마음이 얼마나 급했던지 이때만큼은 정신이 또렷했다. 간신히 시간 내에 스케줄을 제출하고 저녁 회진을 준비했다. 회진이 끝난 후, 박경일 과장이 김지훈을 뚫어지게 보며 물었다.

‘힘들겠지. 코피를 흘리고도 남을 때다.’

박경일 과장이 짐짓 모른 척하며 돌려 물었다.

“그저께 술을 그렇게 먹었는데 몸은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다행이다. 최철한, 휴가 일정들 정해. 난 7월 첫째 주에 간다. 근무에 문제 생기지 않게 잘 정해.”

“예, 과장님.”

“그리고 김지훈, 오늘부로 100일 당직 끝내자. 마음 같아서는 한 달 더 시켜야 하는데, 집도식까지 한 마당에 100일 당직을 세우는 게 좀 그러네.”

귀가 번쩍 뜨였다.

드디어 100일 당직이 끝났다.

김지훈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부르르 떨었다.

유석재까지 입이 쫙 벌어졌다.

“석재는 그렇다고 쳐도, 얘 왜 이렇게 좋아해? 김지훈, 100일 당직 끝났다고 1년차 일 없는 거 아니다. 알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응급실에서 수술을 요하는 환자 이외에는 혼자 결정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프도 갈 수 있었다.

물론 오프라고 해도 밤 12가 넘어야 일이 끝나는 탓에 외출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더구나 구미는 1년차가 김지훈뿐이었기에 그나마도 일주일에 한 번밖에 갈 수 없었다.

다음 날 일을 생각하면 단 하루 응급실 콜을 받지 않는다는 것뿐이긴 했다. 그러나 김지훈에게는, 아니 1년차들에겐 가뭄의 단비보다 더 달콤했다.

그만큼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그것은 곧 단 몇 시간이라도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있다는 말이었다. 1년차에게 이만큼 반가운 일은 없었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생기를 찾은 김지훈은 저녁도 엄청 먹어 댔다. 입을 쩍 벌리며 먹는 모습을 보던 최철한이 휴가 가는 날을 지정했다.

‘1년차 때는 다들 많이 먹기는 하지만, 정말 볼수록 위대한 놈이다.’

휴가 기간은 한 달인데 차례차례 정하고 나면 김지훈은 남은 시간에 갈 수밖에 없었다. 1년차가 여러 명이라면 언제 갈까 생각이라도 하겠지만 구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지훈, 넌 내가 휴가 갔다 온 뒤에 가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아직 휴가까지는 멀었지만 신나는 일이 연이어 생겼다.

김지훈이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병동으로 올라갔다.

희한하게도 피로가 풀린 것처럼 몸이 움직였다.

환자 차팅부터 내일 있을 리포트 준비까지 무난하게 다 마쳤다. 하지만 마음까지 푹 놓은 것은 아니었다.

응급실 콜을 받고 내려가던 김지훈이 각오를 다졌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 보니까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 한다. 방심하다 환자를 놓치면 모두 내 책임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 돼.’

김지훈이 전보다 더욱 집중해 환자를 보았다.

100일 당직 때와 비교하면 시간은 확실히 절약됐다.

100일 당직이 끝났지만 피로는 여전했다. 그나마 더 심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뿐인 오프 날이면 5시간 정도는 편하게 잤다.

박경일 과장이 상황을 봐 가며 퍼스트를 세우기 시작했다. 서너 번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야! 김지훈. 너 참 퍼스트 잘 서. 볼 때마다 1년차 같지가 않단 말이야.”

매번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이준영 과장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그 덕인지, 아니면 점점 경험이 쌓여서 그런 것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수술의 기본이 뭘까? 직접 해야만 실력이 는다면 굳이 전공의들이 세컨드를 설 필요가 없잖아. 이것도 분명 수련의 과정이니까 이유가 있을 텐데, 보는 것만으로도 기초를 다질 수 있기 때문일까?’

세컨드를 서는 요령이 생겨 어느 정도는 수술 과정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든 이후로 어떤 어시스트를 서든 온정신을 다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두 번째 아뻬를 받았다.

머릿속에만 그렸던 수술을 직접 한다는 것은 언제나 흥분과 감동을 주었다. 아뻬 수술을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닌데 가슴까지 벅차 왔다. 얼마나 티가 났던지 박경일 과장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찰 정도였다.

“너처럼 수술 받고 좋아하는 놈도 처음이다. 그렇게 좋아?”

“그럼요, 과장님.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습니다.”

수술이 시작되는 순간 김지훈 특유의 분위기가 풍겼다.

박경일 과장의 눈에도 미숙한 점이 보였지만, 과감하고도 완급을 조절하는 모습만은 절로 감탄이 나오게 할 정도였다. 1년차가 아니라 4년차도 이런 느낌은 주기 힘들었다.

‘참! 묘하네. 미숙한 것 같은데도 아주 잘해. 게다가 이놈이 수술하는 걸 보고 있으면 금방 끝나는 것 같단 말이야. 퍼스트를 세울 때도 그렇고, 정말 이상하네.’

박경일 과장도 이혁민 교수가 받았던 느낌을 받고 있었다.

수술이 끝나고 환자를 옮기려고 할 때 마취를 담당했던 윤서연이 엉뚱한 말을 했다.

“과장님, 지훈이 주말 오프는 왜 안 주세요.”

“윤서연 선생님, 왜 우리 과 일에 신경을 쓰시죠?”

농담처럼 던진 박경일 과장의 말에 윤서연이 입을 삐죽거렸다.

“데이트 좀 하려구요.”

“뭐?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야?”

얼굴이 벌게진 김지훈이 윤서연을 노려보았다.

“야, 오해하시잖아. 시간 되면 밥 살게.”

“흥! 시간이 언제 나는데.”

박경일 과장의 눈빛이 묘해졌다.

어째 김지훈은 동기한테 하는 말 같은데 윤서연은 왠지 이상했다. 마치 연인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수술실에서 나온 박경일 과장이 김지훈에게 속닥거렸다.

“니들 진짜 사귀는 거야?”

“아니에요, 과장님. 전에 밥 한번 산다고 했는데 볼 때마다 저러네요.”

“흐음! 그래?”

여하튼 수상쩍은 상황이었다.

‘으휴! 기집애. 때 되면 어련히 살까 봐.’

투덜거리며 병동으로 올라간 김지훈이 콜을 받고 급히 응급실로 다시 내려갔다. 응급실 근무 중인 서도진이 환자도 보기 전에 X-ray부터 확인해 달라고 했다.

뷰 박스에 걸린 복부 사진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휴가를 2주 앞둔 날이었다.

복부 X-ray가 온통 까맣게 보였다.

늘어날 대로 늘어나 대장에 가스가 가득 차 있었다.

‘장 폐쇄가 너무 심하게 발생했네. 가만, 이거 대장이잖아?’

김지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도진아, 자 있어?”

서도진이 내민 자를 받아 든 김지훈이 사진상으로 보이는 대장의 직경을 쟀다. 가스가 찬다고 해도 통상 3~4센티미터에 불과한데 직경이 10센티미터에 육박했다.

언제 대장이 파열될지 모르는 상태였다. 어쩌면 이미 미세하게 터졌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초응급 수술을 요하는 상황이었다.

김지훈이 급히 환자를 찾았다.

19살, 꽃다운 나이의 여자 환자였다.

안색은 다소 창백했고, 무력한 모습이었다.

사람을 알아보기는 했지만 흐릿한 의식 상태를 보였다.

‘설마 셉시스(sepsis:패혈증)까지?’

“간호사, 바이탈 어때요?”

“혈압은 90/60이고, 맥박 수 110회. 호흡 수는 25회 정도고, 체온은 38.5예요.”

패혈증 초기 증상이었다.

원인은 거의 100프로 대장 폐쇄였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대장의 벽은 종이처럼 얇아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장 내의 세균을 막을 방어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결국 세균이 장 밖으로 빠져나와 미세하나마 복막염을 일으키게 된다. 이런 경우 불과 하루 이틀 만에도 혈액을 타고 전신으로 세균이 퍼져 패혈증을 유발할 수 있었다.

“패혈증이 의심되니까 빨리 수액 달고, 폴리(소변 줄) 끼워요. 항생제 알레르기 테스트하고 괜찮으면 투여해요. 방사선과에 연락해서 복부 CT 바로 찍읍시다.”

급히 오더를 내린 김지훈이 환자를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최선희 씨, 눈 떠 봐요.”

환자가 눈을 뜨기는 했지만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복부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나?’

장 폐쇄의 가장 많은 원인은 복부 수술이었다. 장이 공기에 노출되고, 수술 부위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염증 반응을 일으킨다. 이때 일종의 흉이 생기며 장이 서로 유착되거나 고무줄 같은 구조물을 만들어 장을 조여 폐쇄를 유발한다.

환자의 옷을 올리고 배를 살폈지만 수술한 흔적은 없었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환자의 손을 꼭 잡은 채 김지훈을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할머니, 보호자 되시죠?”

“예, 선생님.”

“혹시 환자 부모님은 안 오셨나요?”

“나하고 손녀 둘밖에 없어요.”

“알겠습니다. 환자분이 언제부터 아팠죠?”

“그저께부터 배가 많이 아프다고 했어요. 평소 변비가 심했다가 한동안 설사를 하는 일이 잦아서 그런가 보다 했네요. 근데 오늘 저녁에 갑자기 애가 이상해졌어요. 선생님, 어떻게 된 거예요? 피붙이라고는 달랑 우리 둘인데, 우리 손녀 큰 병은 아니죠?”

할머니가 발을 동동 굴렀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평소 변비와 설사가 반복됐다. 그리고 수술 병력도 없는데 대장 폐쇄가 발생했다면 유력한 원인은 단 하나였다.

‘이제 19살인데, 설마 대장암은 아니겠지?’

“할머니, 일단 검사를 더 해 봐야 하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도진아, 엘 튜브(코 줄) 해. 비지에이(aBGA:동맥혈 가스 분석)도 내보내고.”

곧 환자가 방사선실로 옮겨졌다.

김지훈이 바로 유석재에게 노티를 하고 방사선실로 달려갔다. 복부 CT 촬영이 시작됐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여긴 유석재도 허겁지겁 달려왔다.

10밀리미터 간격으로 한 컷씩 찍을 때마다 기계에 연결된 모니터에 화면이 떴다. 폐 하부와 횡격막부터 시작해 차례차례 단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지훈이 긴장된 눈으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서히 대장의 단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 사진에서 본 것처럼 가스가 가득 찬 대장은 터질 것처럼 늘어나 있었다. 드디어 하복부의 단면이 화면에 나타나자 유석재와 김지훈이 동시에 신음을 터트렸다.

“선생님, 이거 매스(mass:덩어리)죠?”

“그래, 맞는 것 같아.”

지름이 5센티미터 정도 되는 종양이 S 결장으로 의심되는 부위를 꽉 막고 있었다. 십중팔구 악성 종양에 의한 대장 폐쇄였다. 하지만 지금은 종양이 악성이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패혈증이 동반된 대장 폐쇄는 그 자체로 치명적이었다.

“스케줄 챙기겠습니다.”

“최철한 선생님에게는 내가 노티 할 테니까, 빨리 수술 준비하고 스케줄 바로 제출해.”

응급실로 돌아가자마자 마취과에 연락을 했다.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윤서연이 환자의 상황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김진호 선생님께 바로 연락할 테니까, 환자 준비되는 대로 빨리 올려.)

“땡큐!”

수술에 필요한 추가 검사를 내고 스케줄을 작성했다. 결과가 나올 동안 환자를 살폈다. 고열은 여전했고, 다량의 수액을 투여했지만 혈압이 회복되질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소변량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주요 장기는 살아 있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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