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52화 (152/1,329)

제4화 좌절? 안타까움? (1)

박경일 과장이 흠칫 놀랐다. 서울에서 구미가 어딘데, 설마 집도식을 할 때 내려온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럼 메스는 나중에 따로 주고, 오늘 할까요?”

“그럼 좋지. 내가 좋아하는 놈들은 여기 다 있어. 박 과장, 철한이하고 석재. 아주 뛰어난 놈들이지 않아?”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만 쏙 빼면서도 눈으로는 김지훈을 보고 있었다.

“그럼요, 선생님. 아주 든든합니다. 김지훈, 집도식 어디서 할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김지훈이 슬며시 눈치를 보며 말했다.

“싱글벙글이요.”

“복 매운탕 좋지. 선생님, 어떠십니까?”

“나도 복 좋아해. 가자, 오늘은 내가 사지.”

“아이고! 선생님. 구미까지 오셨는데 제가 사야죠.”

“그런 말 마라. 나 오늘 박 과장과 얘들을 보니까 기분이 참 좋다. 언제 또 사겠나. 우리 마취과 선생도 같이 가야지.”

이혁민 교수 때문에 입장이 묘했던 김진호가 반색을 했다.

이왕이면 여럿이 같이하면 더 좋은 일이었다. 싱글벙글이라면 입 몇 개 늘어난다고 해서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선생님, 여기 장성기 과장님과 변상훈 과장님이 계십니다. 물론 우리 과 이용철 과장님도 계신데, 어떻게 할까요?”

이혁민 교수가 크게 웃었다.

“그렇구나. 내 구미 과장들 모두 잘 알지. 우리 과 오라고 인턴 때 리포트까지 줬는데 다 도망간 선생들이야. 시간 되면 다들 오라고 해.”

판이 은근히 커졌다.

환자가 병실로 올라가자마자 부랴부랴 일과를 마무리했다. 이혁민 교수 때문에 마음이 급한지 최철한과 유석재가 직접 오더까지 냈다.

김지훈이 드레싱을 끝내기가 무섭게 바로 출발했다.

싱글벙글, 복 매운탕집으로!

집도식을 위하여!

장성기 과장과 변상훈 과장이 이용철 과장과 함께 들어오며 김지훈의 어깨를 툭 쳤다.

“축하한다, 김지훈.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박 과장, 집도식이 너무 빠른 거 아냐?”

“빠르긴, 수술실에서 보니까 줄 만하던데, 뭐.”

평일도 아닌 토요일에 과장들이 모두 왔다. 물론 이혁민 교수가 함께하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정말 감사한 마음만 들었다.

“샘, 축하해요.”

간호사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수술실은 물론 병동과 응급실 간호사들까지, 많이도 왔다. 주말에 비번들일 텐데도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오프였던 서도진과 서도훈, 그리고 안호석까지 보였다.

김지훈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작년에 단 3개월을 돌았을 뿐이었다. 올해 역시 이제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특별히 잘해 준 것도 없는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문득 그리운 이들이 생각났다.

‘보고 계시죠? 저 잘 살고 있습니다.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즐거워해야 하는데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이준영 선생님도 이 자리에 계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욕심이겠죠.’

마침 들려온 박경일 과장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눈시울을 붉힐 뻔했다.

“선생님, 이제 올 사람들은 대충 다 온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 한 마디 해 주시죠.”

“그걸 내가 왜 하나. 박 과장하고 김지훈 자리야. 난 이 자리에 함께한 것만으로도 정말 즐거워.”

“에이! 선생님. 서열이 있지, 왜 이러십니까? 참! 우리 예쁜 간호사들, 인사들 해요. 서울에서 오신 이혁민 교수님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이혁민 쌤.”

이혁민 교수가 간호사들의 젊고 발랄한 목소리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다소 진지하게 진행되는 서울 집도식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선생님, 이렇게 뜨거운 환영을 받으셨는데 한 말씀 하셔야죠. 장 과장, 안 그래?”

“그럼. 선생님,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경일 과장이 거푸 재촉하고 다른 과장들까지 가세하자 이혁민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이혁민입니다.”

“안녕하세요, 쌤.”

간호사들이 합창이라도 하는 것처럼 일제히 인사를 하며 박수를 쳤다. 환호성까지 터졌다. 정말 자유스럽고 즐거운 분위기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질 정도였다.

“오늘 김지훈 선생이 첫 수술을 받았습니다. 먼저 축하의 말부터 전합니다. 수술도 잘했고, 임하는 태도도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익숙해지고 스스로 잘한다고 느끼는 순간 누구나 자만할 수가 있습니다. 자만은 환자를 보는 우리가 가장 경계를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 선생은 앞으로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 역시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코 자만하지 말고 지금처럼 정진해야 할 겁니다. 그래야 마음속에 품은 꿈과 희망을 이룰 수가 있는 법입니다. 김지훈 선생.”

“예, 선생님.”

“자만하지도, 실망도 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하길 바란다. 오늘 자네를 축하해 주기 위해 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결코 실망시키지 마라. 입 꾹 다물고 자네가 해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난 김지훈을 믿는다. 자! 그럼 축하의 의미로 건배를 하실까요?”

“예, 쌤.”

“김지훈의 첫 수술과 구미 병원을 위하여!”

“위하여!”

한 잔의 술이 비워졌다. 매콤하면서도 새콤한 복 매운탕이 들어왔다.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에게 술 한 잔을 권하는 것으로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왁자지껄. 즐거운 소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김지훈이 술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박경일 과장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이 더 빨개졌다.

“장 과장, 변 과장, 김지훈이 이 자식, 대단해. 얘 수술할 때 기회 되면 한번 와서 봐 봐. 1년차가 아니야.”

“그럴 줄 알았어. 작년에 괜히 내가 체스트 튜브를 준 게 아니야. 철한이하고 석재에 김지훈까지, 박 과장은 좋겠다.”

꼼짝없이 주는 대로 받아 마셔야 할 판이었다. 술 한 잔에 국물 한 모금이었다. 한 시간도 안 돼 열 몇 잔을 마신 김지훈이 머리를 흔들었다.

몸이 좋아도 무리한 속도였다.

가뜩이나 피곤한 데다, 무엇보다 수면 부족이 심각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술기운이 올라왔다. 단 서너 시간만이라도 푹 잤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어후! 정식 집도식 날인데 이게 뭐냐. 너무 졸리다. 소주가 이렇게 독한 술이었나?’

어느새 주인공은 멀리 사라지고, 다들 마시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하품을 연발했다.

그때 이혁민 교수가 손짓을 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꽤 술에 취한 모습이었다.

“힘드나.”

“아닙니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니 지켜 줄게.”

“예? 선생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혁민 교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김지훈의 어깨를 잡았다.

“내 기대 많이 하고 있다. 넌 멋진 써전이 될 거야. 그때까지 내가 지켜 줄 테니까, 넌 다른 생각 말고 일만 열심히 해라. 이준영 선생님도 그걸 간절히 바라실 거다.”

몰려오던 잠이 슬그머니 물러났다.

“선생님, 이준영 선생님을 잘 아세요?”

“알지, 너무 잘 알지. 이준영 선생님이 말씀하는 것들은 하나도 잊으면 안 된다. 슬프다. 미안하다, 지훈아.”

이혁민 교수가 한숨을 쉬며 또 한 잔을 비웠다.

기뻐하며 축하해 주기 위해 온 자리였다. 더구나 교수가 1년차를 앞에 두고 슬프다는 말을 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술이 과한 탓이겠지만 왠지 정말 슬퍼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일까?

분명 이준영 과장과 관련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병원에서 근무하던 외과 의사가 10년 동안 음성에 파묻혔다. 웬만한 사연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음성에서 청주로 갈 때 이상한 말을 듣긴 했다.

‘설마 사고로 환자가 죽었다는 말이 이준영 선생님 얘기는 아니겠지. 그럼 뭘까?’

이혁민 교수는 그 사연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수술실에서부터 지금 하는 말까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수술실에서도 그러시더니 왜 자꾸 내게 이준영 과장님에 대해 말씀을 하시지? 또 뭐가 미안하고 슬프시다는 걸까?’

이준영 과장과의 관계는 3개월 동안 본 것이 다였다.

김지훈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하기 전에는 단순한 관계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상했지만 머리를 짜낸다고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예, 선생님. 그런데 미안하시다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이혁민 교수가 갑자기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했나?”

“예, 선생님.”

“내가 오늘 즐거워서 술이 과했나 보다. 니한테 미안할 일이 뭐가 있겠나. 신경 쓰지 말고 내 술이나 한 잔 받아라.”

공연히 물어봤다가 술만 한 잔 더 먹었다. 때마침 박경일 과장을 비롯해 모든 과장들이 이혁민 교수 옆으로 와 자리를 비켜야 했다.

속이 니글거려 매운탕 국물에 밥 한 그릇을 해치웠다. 술을 견디려면 어떻게든 탄수화물을 섭취하는 것이 최고였다. 하지만 결국 유석재와 최철한의 일격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천근처럼 무거워진 눈꺼풀이 꽝 소리를 내며 닫혔다.

술이 김지훈을 먹어 치웠다.

간호사들이 탁자에 머리를 박은 김지훈을 흔들었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흔들어도 눈을 뜨질 못했다.

유석재가 입맛을 다셨다.

“깨워도 소용없을 겁니다. 다들 지훈이가 아직도 100일 당직 중이란 걸 알잖아요.”

“샘, 그래도 그렇지, 오늘 집도식인데. 작년에는 4차까지 가셨었잖아요.”

기억력도 좋았다.

“그랬었나? 에이! 그건 모르고, 얘는 이제 끝났어요. 술이 아무리 세도 100일 당직은 못 이기는 거 잘 알면서 그래요. 인턴 선생들.”

한창 공짜 술을 열심히 먹던 인턴 3명이 쪼르르 달려왔다. 술에 꼭지가 돌아도 2년차가 부르면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이 바로 인턴이었다.

“이따 한 명만 나하고 같이 병원에 들어가자. 지훈이 이 자식, 완전히 뻗었다.”

인턴 3명이 긴장된 눈초리로 서로를 보았다.

하나, 둘, 셋! 가위바위보! 서도진 당첨!

2명은 만세를 부르고 1명은 눈물을 삼켰다.

“나 병원 갔다 다시 올 거니까 2차 어디로 가는지 여기 사장님한테 확실하게 말해 놔.”

아무리 친한 후배면 뭐하겠는가.

공짜 술과 즐거운 자리 앞에서는 선배고 뭐고 필요 없었다.

그래서 어디에서든 최소한 눈은 뜨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9시도 안 돼 김지훈이 축 늘어진 채 병원으로 돌아갔다. 이혁민 교수를 비롯해 남은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2차 자리로 향했다.

김지훈의 공식적인 집도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집도식 다음 날이 일요일이었지만 어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역시 이런 몸으로 술은 무리였다. 술에 취한 후, 아침 6시가 될 때까지 잤지만 더 피곤했다. 몇 시간 푹 잔다고 풀릴 몸이 아니었다.

병동과 응급실을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렸다. 중간중간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졸음이 몰려왔다. 김지훈을 본 간호사들이 눈을 흘기며 투정을 부렸다.

“샘, 수술을 엄청 잘하셨다면서요?”

“누가 그래요?”

“집도식 갔던 애들이 들었다고 그러던데요. 치사하게 우리만 쏙 빼놓고 가는 게 어디 있어요? 칭찬이란 칭찬은 혼자 다 받으면서.”

응대할 힘조차 없는지 김지훈은 손만 저었다.

밤 10시가 넘어 병동 의국으로 들어간 김지훈이 졸린 눈을 억지로 뜨며 책을 펼쳤다. 내일 있을 수술들을 준비할 생각이었지만 몇 장 넘기지도 못했다.

의자 몇 개를 나란히 놓고 그대로 누웠다.

눈을 감자마자 코를 골던 김지훈이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응급실이었다.

(선생님, 57세 된 남자 환자입니다. 금일 발생한 교통사고로 복부 통증을 호소…….)

“바이탈은?”

(스테이블(stable:안정적) 합니다.)

“알았어, 내려갈게.”

노티를 다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목을 한껏 뒤로 젖히고는 신음을 터뜨렸다. 최근 들어 작년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노티를 받다 말고 졸았던 선배 의사들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누구였지? 100일 당직 서다가 코피까지 터졌다고 했는데.’

가물가물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하품을 하고 일어서던 김지훈이 쓱 코밑을 닦았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것이 손등에 빨간 줄을 그었다.

“아! 씨펄! 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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